(2) 진천 농다리
'천년 사적'.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28호인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농다리'를 표현할 때 자주 등장하는 수식어다.
진천 농다리의 최초 축조자와 시기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 ▶신라 김서현(김유신 아버지) 장군 축조설 ▶고려초기 임장군 축조설 ▶고려중기 임연장군 축조설 등 3가지 설이 존재해 왔다. 진천군은 논란 끝에 12세기 무렵인 고려초기 임장군 축조설을 '정설'로 인정키로 했다. 이때의 '임장군'은 정황상 12세기 인물은 '임희' 장군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대바구니 모양으로 메쌓기했다 = 축조 공법도 공학과 재료학적인 측면까지 이미 비교적 상세하게 규명돼 있다.
옛 돌다리의 일반적인 모습은 하상에 교각을 세우고 그 위에 상판을 넓게 얹은 것이 보통이다. 이 경우 사람은 물론 우마차도 다닐 수 있다.
그러나 진천 농다리는 이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본래 28간(현재는 24간·94m)이었던 농다리는 주변 사력암질의 붉은색 자연석을 대바구니 모양으로 메쌓기 해 타원형 석축을 만들었다. 이 석축이 교각 기능을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상판이 아닌 널돌(장대석)을 얹었다. 그러나 널돌의 너비가 좁기 때문에 우마차는 다닐 수 없다.
여기까지는 일반인들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왜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601' 지점에 농다리가 놓였고, 그것이 갖는 교량사적인 의미는 잘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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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 문산리 석교로, 하부에 석주를 세우지 않고 대신 사용된 통돌이 교각 기능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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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 청석교로, 사각형 돌기둥 2개를 세운 후 그 위에 널돌을 얹어 길바닥을 만들었다된 통돌이 교각 기능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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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장군 아버지 부임길 = 지금부터가 '교과서 밖의 충북역사'가 된다.
농다리에서 초평 저수지로 넘어가는 길은 현재 거의 폐도가 되다시피 했다. 동쪽으로 초평 저수지가 생기면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끊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달랐다. 지역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경북 상주→소백산맥→보은→미원→구녀산성→청안→증평→진천→경기도 안성→서울에 이르는 길은 이른바 신라의 '북진루트'였다.
북진루트 주변에 여러 개의 신라식 산성과 사찰이 존재하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신라 김서현 장군도 이 루트를 통해 진천에 부임했고, 이때 김유신 장군을 낳았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충청주 34곳을 포함, 전국에 509개의 '역참'(驛站)이 존재했다. 역참은 말 그대로 말(馬)의 정거장으로, 당시 관리들은 역참에 이르서 피곤해진 말을 갈아타곤 했다.
이와 관련, '고려사'는 '진천 지역에 장량(長楊), 퇴량(堆粮), 진천 등 3곳에 역참이 존재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도 고려 역참제도를 상당부분 그대로 계승했다. 대동여지도를 보면 농다리 주변에 장량, 태랑(台良)과 그리고 청안지역에 시화(時化) 등의 역참 이름이 보이고 있다. <그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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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여지도로, 삼국 ~ 조선시대에는 청안서 진천을 가려면 반드시 농다리가 놓인 세금천을 건너야 했다. 이 길은 신라의 북진루트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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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는 나무다리 가능성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자금의 농다리 지역은 신라 북진루트인 청안-진천 도상(道上)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신라 관리나 군인이 서울에 가려면 반드시 농다리가 놓여 있는 세금천을 건너야 했다.
이와관련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유량이 많은 것으로 봐, 삼국시대 농다리 일대에는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이것을 고려 조정이 돌다리로 개축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있다.
문제는 고려 초기의 '어떤 사회적 여건'이 돌다리를 축조할 환경을 조성했는가 하는 점이다. 고려 조정은 개국 초기만 해도 각 지역의 호족반란 때문에 제도와 문물을 정비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12세쯤에 접어들면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지방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런 환경이 고려 조정에게 전국적인 '다리 건설'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왕명전달, 조세수송, 관리파견, 군사이동 등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서는 견고하고 내구성이 큰 다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석교도 함께 축조됐을 가능성 높아 = 도유형문화재 제 222호인 청원문의 문산리 석교와 제 121호인 옥천 청석교 등에서 비슷한 근거가 찾아지고 있다. 학자들은 이 다리를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는 삼국시대설도 주장하나 근거는 미약하다.
실제 문산리 석교와 옥천 청석교는 농다리와 비슷한 외양을 갖고 있다. 자연석을 조금만 가공해 교각과 상판석으로 사용한 점이 서로 비슷하다. 일부에서는 청주 남석교도 이때 함께 축조됐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려 초기에 과거 1970년대식의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닐까. 당시 고려 조정은 이같은 국가적 목표를 반영하기 위해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새롭게 축조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진천 농다리는 축대가 교각 기능을 대신하고 있고, 또 상판 너비가 매우 좁은 점 등은 앞의 두 다리와 뚜렷히 다르다. 이 부분에 지네 모양의 농다리 비밀이 있다.
◆홍수나면 징검다리서 잠수교로 변해 = 토목학자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다리는 징검다리→통나무다리→형교(형은 木+行)→돌다리→콘크리트교→현수교 순으로 발전했다. 형교는 나무를 여러개 묶어만든 다리를 말한다. 이밖에 잠수교가 있으나 이는 다리의 유형이 아닌 임시 형태에 속하고 있다.
이와 관련, 농다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징검다리'와 '잠수교'의 장점을 두루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농다리의 경우 평시에는 징검다리 기능을 갖고 있다. 사람은 다닐 수 있어도 우마차는 다릴 수 없다. 그리고 홍수가 지면 물에 잠기면서 잠수교(일명 水越橋)로 변하게 된다.
이 경우 석축과 널돌이 유실되는 것이 불가피한 면이 있다. 농다리를 처음 만든 사람들은 이 부분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유실도 잦지만 개·보수도 쉬운 다리'.
많은 사람들이 농다리에 대해 "천년 동안 원형이 유지해 왔다는데 왜 근래들어서는 유실이 잦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일다. 실제 농다리는 지난 80년대 이후 10여 차례가 유실됐다.
그러나 공학적인 시각으로 보면 농다리는 복원력이 매우 높은 다리다. 앞서 언급한대로 유실도 잦지만 개·보수도 쉬운 다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제적으로 단점이 아닌 장점이 된다.
보통의 다리는 한번 유실되면 새로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러나 진천 농다리는 돌을 몇개 더 쌓으면 바로 원형으로 복원되기 때문이다.
바로 진천 농다리는 고려식 '새마을 운동'의 산물이었고 공학·경제적인 시각이 잘 반영된 다리였다. 당시 사람들의 혜안이 놀라움 따름이다.
도움말: 강민식 백제유물전시관 학계사·이인석 진청군 학예사
◇ 농다리 유실, 왜 잦을까
토목학자들에 따르면 세금천은 ▶보기보다 유량이 많고 ▶유속 또한 빠른 편이며 ▶하천 너비도 100m 정도에 달할 정도로 넓은 편이다.
충북대 안상진 교수가 지난 2006년에 펴낸 용역 보고서를 보면 물이 많을 때는 초당 30m3, 적을 때는 10~15m3 정도 흐른다. 이 경우 홍수가 지면 농다리가 잠기는 것은 물론, 부등류·급변류·와류 등의 현상이 복합적으로 일어난다.
'부등류'는 농다리 전방에 이르러 물흐름이 불규칙하게 변하는 것을, '급변류'는 농다리 밑을 빠르게 통과하는 것을, '와류'는 통과후 다리 바로 뒤쪽에서 소용돌이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토목학자들은 이같은 현상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면서 근래들어 축대와 널돌의 유실이 잦아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 왜 농(籠)다리일까
우리나라 다리 이름에 한자 '籠'(농)이 들어간 것은 것의 없다. 이와 관련, ▶지네 모양 관련설 ▶농짝을 쌓아놓은 모습이기 때문에 ▶대바구니 공법처럼 쌓여졌기 때문에 등 3가지 설이 등장해 있다.
이중 지네 모양 관련설은 설득력어 없어 보인다. 지네를 의미하는 한자는 '籠'이 아닌 '蜈'(지네 오) 자이다.
나머지 두 설은 보기에 따라 모두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외형상 농다리의 석축에 사용된 돌은 마치 농짝을 쌓아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이 경우 '籠' 자는 '농 롱'의 훈을 지닌다.
반면 농다리는 공법상 마치 대바구니 살을 얽기게 엮은 모습으로 쌓아졌다. 이 경우는 '대바구니 농'이라는 훈을 지닌다. 운동경기 농구의 '농' 자도 바구니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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