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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exto del Evangelio (Mt 22,1-14): En aquel tiempo, Jesús propuso esta otra parábola a los grandes sacerdotes y a los notables del pueblo: «El Reino de los Cielos es semejante a un rey que celebró el banquete de bodas de su hijo. Envió a sus siervos a llamar a los invitados a la boda, pero no quisieron venir. Envió todavía a otros siervos, con este encargo: ‘Decid a los invitados: Mirad, mi banquete está preparado, se han matado ya mis novillos y animales cebados, y todo está a punto; venid a la boda’. Pero ellos, sin hacer caso, se fueron el uno a su campo, el otro a su negocio; y los demás agarraron a los siervos, los escarnecieron y los mataron. Se airó el rey y, enviando sus tropas, dio muerte a aquellos homicidas y prendió fuego a su ciudad.
»Entonces dice a sus siervos: ‘La boda está preparada, pero los invitados no eran dignos. Id, pues, a los cruces de los caminos y, a cuantos encontréis, invitadlos a la boda’. Los siervos salieron a los caminos, reunieron a todos los que encontraron, malos y buenos, y la sala de bodas se llenó de comensales. Entró el rey a ver a los comensales, y al notar que había allí uno que no tenía traje de boda, le dice: ‘Amigo, ¿cómo has entrado aquí sin traje de boda?’. Él se quedó callado. Entonces el rey dijo a los sirvientes: ‘Atadle de pies y manos, y echadle a las tinieblas de fuera; allí será el llanto y el rechinar de dientes’. Porque muchos son llamados, mas pocos escogidos».
«Mi banquete está preparado, se han matado ya mis novillos y animales cebados, y todo está a punto; venid a la boda»
Rev. D. David AMADO i Fernández
(Barcelona, España)
Hoy, la parábola evangélica nos habla del banquete del Reino. Es una figura recurrente en la predicación de Jesús. Se trata de esa fiesta de bodas que sucederá al final de los tiempos y que será la unión de Jesús con su Iglesia. Ella es la esposa de Cristo que camina en el mundo, pero que se unirá finalmente a su Amado para siempre. Dios Padre ha preparado esa fiesta y quiere que todos los hombres asistan a ella. Por eso dice a todos los hombres: «Venid a la boda» (Mt 22,4).
La parábola, sin embargo, tiene un desarrollo trágico, pues muchos, «sin hacer caso, se fueron el uno a su campo, el otro a su negocio...» (Mt 22,5). Por eso, la misericordia de Dios va dirigiéndose a personas cada vez más lejanas. Es como un novio que va a casarse e invita a sus familiares y amigos, pero éstos no quieren ir; llama después a conocidos y compañeros de trabajo y a vecinos, pero ponen excusas; finalmente se dirige a cualquier persona que encuentra, porque tiene preparado un banquete y quiere que haya invitados a la mesa. Algo semejante ocurre con Dios.
Pero, también, los distintos personajes que aparecen en la parábola pueden ser imagen de los estados de nuestra alma. Por la gracia bautismal somos amigos de Dios y coherederos con Cristo: tenemos un lugar reservado en el banquete. Si olvidamos nuestra condición de hijos, Dios pasa a tratarnos como conocidos y sigue invitándonos. Si dejamos morir en nosotros la gracia, nos convertimos en gente del camino, transeúntes sin oficio ni beneficio en las cosas del Reino. Pero Dios sigue llamando.
La llamada llega en cualquier momento. Es por invitación. Nadie tiene derecho. Es Dios quien se fija en nosotros y nos dice: «¡Venid a la boda!». Y la invitación hay que acogerla con palabras y hechos. Por eso aquel invitado mal vestido es expulsado: «Amigo, ¿cómo has entrado aquí sin traje de boda?» (Mt 22,12).
<혼인 잔치의 비유>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마태 22,2-6).”
‘혼인 잔치의 비유’는 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을 꾸짖으시는 비유입니다.
여기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인 신랑은 임금의 아들, 즉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신부’는 누구일까? 신부는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신랑으로, 신앙인들을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열정을 가지고 여러분을 위하여 열정을 다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2코린 11,2).”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비유에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손님’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손님이 아니라 잔치의 주인공들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당신의 ‘신부’가 되라고 초대하는 선포입니다.)
따라서 초대를 받고서도 참석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은,
그 잔치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인 잔치인데도
마치 남의 잔치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처럼 잔치 참석을 거절하면서,
세속 일만 신경 쓰고 있으니, 대단히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집은 ‘남의 집’이 아니라 ‘나의 집’입니다.
그런데도 마치 남의 나라, 남의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것처럼
그 나라, 그 집에 들어가는 일에 관심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생활입니다.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마태 22,7).”
이 말씀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비유에서는 임금이 진노해서 처벌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최후의 심판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즉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나라의 ‘밖’으로 가는 일입니다.
하늘나라의 ‘안’은 구원, 영원한 생명, 행복, 평화, 안식을 누리는 곳이고,
‘밖’은 절망, 후회, 고통만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살인자들을 처벌하는 일은 당연하다 하겠지만,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그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속 일’들의 허망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일들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들은 모두
허망하게 끝나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8-10).”
이 말씀은, 처음에 초대받았던(선택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자격을 잃게 되었고, 그래서 그 선택과 초대가 그리스도교로 넘어갔고,
그리스도교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종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초대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라는 말은, 강제로 끌고 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는 명령이 아니라, ‘권고’이며 ‘초대’입니다.
‘구원’은 강제로 붙잡아서 끌고 가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에는
앞의 이야기에 나왔던 사람들처럼 참석하기를 거절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잔칫방을 채운 사람들은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악한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악했지만 회개해서 선하게 변화된 사람’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글자 그대로 악한 사람이라면, 초대에 응답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응답은 진정한 응답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초대에 응답하는 일인데,
최종적으로 잔치에 참석할 자격을 얻으려면 세례 받은 것으로 그치지 말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악했지만 회개해서 선하게 변화된 사람’이라면 그냥 ‘선한 사람’입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1-14).”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초대가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어서
옷을 갈아입을 틈이 없었다고 변명할지도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서 참석했으니 그런 변명은 통하지 않습니다.
(혼인 예복을 입은 사람들은 초대에 적극적으로 응답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초대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혼인 예복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기 위한
‘충실한 신앙생활’을 상징합니다.
하늘나라에 들어오라는 부르심이 언제 주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불평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언제나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마태 24,36-44).
송영진 모세 신부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은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초대를 받습니다.
돌잔치 초대, 생일 파티 초대, 동창 모임 초대, 결혼식 초대, 초상집 초대...
기분 좋은 초대가 있는가 하면, 부담스런 초대도 있습니다.
가벼운 발걸음, 설레는 마음으로 가게 되는 초대가 있는가 하면,
갈까 말까 망설여지는 원치 않는 초대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어떤 초대가 가장 마음에 드셨습니까?
혹시 이런 초대 어떻습니까?
교황청에서 한 가지 이벤트를 실시했습니다.
각 대륙별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한 가정씩 교황청으로 초대하는 이벤트.
뜻밖에도 우리 가정이 아시아 대륙 대표로 선정되었습니다.
주 이벤트는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작은 경당에서 봉헌하는 미사 참여,
교황님과 원탁에 둘러앉아 함께 하는 만찬 참석,
그리고 로마에 간김에, 열흘간 성지순례...그런데 이 모든 것이 무료!
이런 초대장을 받았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그런데 그토록 행복한 초대와는 비교도 안될, 훨씬 더 기쁜 초대가 있습니다.
위로 부터 오는 은혜로운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 말씀을 통해 건네시는 하늘 나라 혼인 잔치에로의 초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초대장을 받았지만, 뜯어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던져버렸습니다.
돈이 신앙보다 중요했기에, 사업이 생명보다 중요했기에,
지상이 하늘보다 중요했기에, 오늘이 영원보다 중요했기에,
그들은 이 세상 가장 중요한 초대에 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 혼인 잔치 초대장을 들고 잔치에 참여는 했지만
혼주인 임금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의미있는 자리, 성스런 자리에 걸맞는 혼인 예복을 갖춰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늘나라 혼인 잔치에 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입고 지내던 옷 그대로,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에, 머리도 감지 않은 상태로
혼인 잔치에 온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를 옷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세속으로 가득차 있지, 그리스도의 정신은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지만,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늘 나라 혼인 잔치에 오지 않는 것이 더 나았습니다.
오히려 잔치 분위기를 망쳐놓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을 향한 임금의 질책은 날카롭기만 합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오 복음 22장 12~13절)
이런 면에서 리마의 성녀 로사(1586~1617)는 하늘 나라 혼인 잔치에 참여하기 위한
혼인 예복을 가장 아름답게 차려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평생에 걸친 철저한 고행과 보속으로 자신이 입을 혼인 예복을 멋지게 꾸몄습니다.
오랜 세월 괴롭했던 병고 앞에서의 당당함, 고통에 대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수용으로
혼인 예복을 아름답게 장식했습니다.
깊이 있는 기도와 희생, 동정 생활로 자신이 입을 혼인 예복에 멋진 수를 놓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여, 모든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그리스도의 입에서 받은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고통을 당하지 않고서는 은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하느님의 본성에 긴밀히 참여할 수 있고
하느님 자녀들의 영광과 영혼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오늘 누구를 초대할까
[슬픈 예수] 마태오복음 해설 -122
1 예수께서 또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 “하늘나라는 어느 임금이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3 임금이 종들을 보내어 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을 불렀으나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4 그래서 다른 종들을 보내면서 ‘초청을 받은 사람들에게 가서 이제 잔치상도 차려 놓고 소와 살진 짐승도 잡아 모든 준비를 다 갖추었으니 어서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고 일렀습니다. 5 그러나 초청받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밭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가고 6 어떤 사람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 때려주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7 그래서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서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습니다. 8 그리고 나서 종들에게 ‘혼인잔치는 준비되었지만 전에 초청받은 자들은 그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니 너희는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청해 오너라’ 하고 말하였습니다. 10 그래서 종들은 거리에 나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다 데려 왔습니다. 그리하여 잔치집은 손님으로 가득 찼습니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갔더니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습니다. 12 그를 보고 ‘예복도 입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 왔소?’ 하고 물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 내어 쫓아라. 거기서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14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습니다.”(마태오 22,1-14)
예수가 직접 말한 것으로 여겨지는 하느님나라에 대한 비유다. 어느 임금이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두 번 초대하는 이야기다. 첫 번째 초대는 묵살당하고 두 번째 초대에는 손님들이 가득 찬다. 이야기를 주도하는 유일한 주인공은 임금이고 어떤 대화도 등장하지 않는다. 루가 14,16-24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 어휘나 형식상 마태오의 비유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1절의 그들은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킨다. 2절에서 왕은 하느님을, 왕의 아들은 예수를 가리킨다. 식사 비유는 유다교에서 새로운 시대를 뜻하지만 결혼식 잔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을 신랑으로 비유하는 예는 드물며 메시아사상과 결혼식 잔치가 연결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마태오 공동체는 예수를 신랑(마태오 9,15)으로 표현하는데, 초대교회는 예수를 다가오는 하늘나라의 신랑으로 표현한다.(고린토후서 11,2; 요한 묵시록 19,7-9)
3절에서 임금은 종을 보내어 이미 초대한 사람들을 부른다. 식사 초대는 흔히 사람을 통해 말로 전해졌다. 로마인들은 하루 세 끼를 먹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하루 두 끼 식사가 보통이었다. 유다 상류층 일부에서 로마식으로 세 끼 식사가 행해지기도 했다. 오늘 비유는 점심식사를 가리키는 것 같다. 저녁식사를 가리킨다면 5절에서 밭에 가거나 장사하러 간다는 핑계가 이해되기 어렵겠다. 6절에서 마태오 공동체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 나타난 학대받은 예언자들을 당연히 생각할 것이지만 자기 시대에 박해받는 선교사들을 생각할 수도 있다.(마태오 10,16-23)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있고 남을 희생시키며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7절은 의아하다. 사람을 잔치에 초대한 하느님이 손님을 지옥에 쳐 넣다니, 이렇게 분노하는 하느님이 예수의 자비로운 아버지란 말인가. 이런 고뇌로 루터(Luther)는 오늘 비유를 ‘끔찍한 복음’이라 부르며 설교하기를 주저하였다. 탄생 몇 년 전 예수 고향 근처의 세포리스라는 동네를 로마 군대가 불살라버린 역사를 예수가 떠올리고 있는가. 로마 군대에 대한 백성들의 미움이 투영된 구절일까. 예수는 그 끔찍한 역사를 분명 들으며 자랐을 것이다. 제주 4.3 항쟁, 광주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는 어린이들처럼 말이다. 역사의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성서이해도 더 깊어지게 된다. 성서는 가해자들의 승전 기록이 아니라 희생자들의 이야기다.
8절에서 자격 없는 손님을 초대하였다고 자백한 임금의 말은 의아하다. 마태오는 그런 자세한 내용에 관심이 없다. 9절에 ‘거리’는 교차로나 건널목을 가리키지 않고 길이 시작되거나 끝나는 곳을 가리킨다. 임금의 통치력이 미치는 국경 지대까지 돌아다녀서 손님을 찾아오라는 뜻이다. 두 번째 초대에 잔치는 손님으로 가득 찼다. 초대받은 사람에게 예복이 지급되었는지(창세기 45,22; 판관기 14,12-) 입증하기는 어렵다. 준비 없이 초대된 사람에게 임금이 예복을 점검하다니 조금 의아하다. 복장 규정을 미리 알려주었나. 고대에 혼인잔치에 손님들이 특별한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12절의 ‘예복’을 놓고 교회사에서 갖가지 해설이 생겨났다. 육신의 거룩함(테르툴리아누스), 금욕(오리게네스), 사랑(아우구스티누스)에 이어 개신교는 전통적으로 믿음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동양에서는 잔치에 예복이 선사된다는 주장에 근거해 개신교에서 오랫동안 선호되는 의견이다. 그러나 성서주석 상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견이라고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Luz)는 말한다. 예복은 여기서 ‘선행’을 가리킨다. 12-13절에서 예복과 심판 이야기가 이런 해석을 뒷받침한다. 14절은 인류 중 일부만 구원된다는 선언이 결코 아니다. 어떤 종류의 구원예정설도 예수의 가르침과 관계없다. 구원예정설은 그리스도교 교리에 속하지 않는다.
교체된 손님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있다. 1. 바리사이, 율법학자, 대사제등 종교 지배층이 첫 번째 초대객으로, 가난한 백성들이 두 번째 손님 2. 첫 번째 손님은 이스라엘 백성, 두 번째 손님은 이방인 3. 첫 번째 손님은 부자들, 두 번째 손님은 가난한 사람들. 1번 해설이 가장 흔하지만 3번 해설이 본문 뜻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여러분은 잔치를 베풀 때에 오히려 가난한 사람, 장애인, 시각장애인 같은 사람들을 부르시오.”(루가 6,21) 국가를 위한 무슨 기도회에 약삭빠른 목사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초대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에 대한 13절 이야기가 오늘 비유의 결론이다. 예수 메시지를 거부한 이스라엘 지배층에 대한 심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초대를 거절한 유다 지배층에 대한 심판은 비유 전반부에서 언급되었다. 초대를 받았지만 심판에서 안타까운 운명이 결정된 사례가 13절에 나타난다. 초대받음 자체는 인간의 구원을 보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례, 소속 종파, 신분 등은 구원의 보증수표가 전혀 아니다. 하늘 아래 자신의 구원을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다교 지배층의 운명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차라리 경고다.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를 믿음과 정의의 길로 초대하신다. 그 말씀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신앙의 길에서 살아남는다. 마음이 악한 자는 자신의 말과 글과 삶으로 스스로를 숨김없이 폭로하는 법이다.
김근수 (요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