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11:12~12:14)
방법이 거칠었던 야곱,
속이고 계책을 세워 목표를 이루려했기 때문에
그런 부적절한 방법에 대한 혹독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님의 복음적 사랑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것-복음적 사랑-을 양보하지 않고 간직한다면
비본질적인 것-기타 모든 것, 복음적 사랑으로 접근하기 위한
중간 과정이나 매개체-은 다소 흔들리더라도 본궤도를 찾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본질적인 것, 하나만은 무조건 지켜나가되
비본질적인 것은 대상자나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사랑의 마음으로
양보할 수 있다.
그러나 거친 야곱은 비본질적인 것을 양보하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그 보응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본질적인 것을 추구했기에
그런 삶의 방식을 개선되었고, 그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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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일에 교회에 신청하여 받은
‘복음 명함’의 문구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작년 11월 우리들 교회 현수막에서 느꼈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생각에서이다.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 ‘내 고난은 내 죄보다 약합니다.’ |
우리 교회 복음 명함 (주식회사 ‘공감의 기술’) | 우리들 교회 |
우리들 교회는 교회 주변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대형 현수막에 적어서 보도록 하고 내용도 주기적으로 변경하는데
작년 11월에는 위와 같이
‘내 고난은 내 죄보다 약합니다.’를 써서 붙였다.
그것 때문에 성도들 중에서 일부 쟁론이 되었다.
“내 고난은 내 죄보다 약합니다.” O, X로 대답하라고 한다면
백 번 O, 그러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내용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글을 보고, 크게 상처받을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만약 얼토당토 안한 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세상과 인생을 원망하고 자신의 생명도 포기하기 직전에 이른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강도나 흉악범에 의해서 무고한 희생을 당했다면?
세월호처럼 아무 잘못 없는 내 아이가 수장을 당함으로 절망에 쌓여있다면?
모함이나 사기를 당해서 전 재산을 탕진하거나 법적 처벌을 당했다면?)
저 내용이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작용할까?
아무런 잘못 없이 참혹한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세상의 부조리함에 치를 떨 때,
그래서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저런 말이 적절할까?
오히려 사람들을 두 번 죽이고,
교회 다니는 사람은 정말 잔인한 사람이라고 인식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얘기를 밖에서 2번 정도 꺼냈는데
이해해 주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내 고난은 내 죄보다 약하다?’ 틀린 게 없잖아!
그런 대답만 들었다.
그런 고민을 거의 1년을 가지고 있던 차에
지난주 복음 명함을 받을 때 적혀 있던
문구가 눈물을 흘리게 했다.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어떤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꼭 하고 싶은 비밀을 간직한 것같은
여운을 준다.’
복음을 말하고 싶지만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
그에게 결례하지 않도록,
그에게 정중하게,
그에게 복음이 거친 폭력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그의 눈높이를 맞춰서,
사랑의 세심한 마음으로 공감하고 배려하는
정성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하나님, 예수님, 십자가, 죄, 성경책’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강박이 아닐까?
그것을 반드시 문자나 말로 말하지 않으면 복음에서 벗어난 것이라는
강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는 내용은
복음의 용어가 하나도 안 들어갔으니
세상과 구별되지 않았으니 혹시 세상과 타협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세속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정말 양보하거나 타협하거나, 유연성을 발휘해서는 안 되는 것은
단 한 가지만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복음적 사랑!’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절대적으로 우리 가슴에 박혀 있어야 한다.
박혀 있게 하려고 끊임없이 분투해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 외의 거의 모든 것은,
(타자를 인도하는 과정과 방법을 포함해서)
얼마든지 유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연해지고 양보하는 이유는,
바로 그 마음 판에 박힌 복음적 사랑이 작용해서
상대방에게 공감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그 「사람」을 듣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사람은 상대방의 언어에 진정성, 사랑이 담겨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공감과 배려를 행하면 상대방은 나의 언어 이상의 것을 그대로 느낀다.
‘당신이 더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에서 나는
상대방이 들을 준비가 되면
상대방에게 폭탄처럼 나의 가장 소중한 비밀인 ‘복음의 메시지’를
터뜨릴 것이라고 상상한다.
제자훈련 교재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에 우리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명령’이나 ‘통제’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의 관계’를 맺으신다.
사랑의 관계는 결국, 공감과 배려로 표현됩니다.
(우리 교회 복음 명함의 제작사가 주식회사 ‘공감의 기술’이라 놀랐다.)
세상에서조차 하나님의 이런 이치를 발견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상대방에게 주장할 때 필요한 방법 3가지
1. 당위성이 있는 이야기(옳은 이야기)를 해라
2. 당위성이 있는 이야기라도 때와 장소를 가려라.
3. 당위성이 있는 이야기를 때와 장소를 가려 하더라도 항상 친절하라.
옳은 이야기를 공감과 배려를 가지고 전하라는 것이다.
우리들 교회의 현수막 내용은
안타깝게도 세상에서 내세우는,
‘말하는 원칙의 기준’에조차도 미치지 못한다.
‘무례하고 거칠다.’
무례하고 거칠다는 이미지는
교회 안의 사람들만 모를 뿐, 세상의 많은 사람이 가진 교회에 대한 평가이다.
그 안에 사탄의 계략도 있겠지만
교인 스스로의 죄악도 거기에 더욱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흔히 예시로 거론하는
영화 ‘밀양’에서 정작 자신이 극악한 범죄를 범한
피해자를 고려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회개를 받았다는 확신으로
용서해 주려 온 피해자에게
한 마디 회개의 말도 하지 않은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의 죄악이 모든 세상의 일보다 심각하다는
당위성 있는 말이라고 해서
도저히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처지와 상황,
아픔을 한 번도 신중하게 생각해 보지 않고
무례하고 거칠게 느껴질 수 있는 저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인가?
세상의 상담자들도
절대 편견이나 예측, 보편적 원리를 가지고
개별 상담자를 대하지 않는다.
그들의 말을 100% 수용의 자세로 듣고
조심스럽게 그에 맞는 질문이나
도움이 되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저런 내용으로 말하는 것이 옳은가?
우리 교회의 명함처럼,
아픈 이들이 원하는 ‘행복’의 비밀을 조심스럽게 건네는
공감과 배려를 통해
사람을 초대하고
그들의 개별적 상황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옳지 않았을까?
명함을 QR코드로 찾아 들어가면
담임목사님의 동영상 짧은 메시지가 나온다.
거기서도 목사님은
복음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사람들에 편에 서서
그들이 고민할 만한 상황을 언급하고
목사님이 처한 상황을 솔직하게 말씀하심으로
일방적이 아닌, 뭔가 서로 통할 수 있는 길을 여신다.
세상에서는 rapport형성이라고 하는,
그것을 하신다.
하나님은 사람 각자가 자신의 마음을 열어
자발적 선택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셨기 때문에
마음이 움직이도록 ‘감동’과 ‘설득’의 과정이
타자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만드셨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고백.
우리들 교회는
목사님의 친일적 언행을 들을 적이 있어
그분의 기독교적 가치관을 의심한 적이 있다.
그리고 교회에서 자신의 죄를 반의무적으로
고백하는 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의심했다.
거기에 추가하여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일련의 단서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서
다소 찜찜한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 교회에서 큐티 교재로 사용하는 것을 알게 되어
나는 개인적으로 선택하지 않았다.
열약한 상황에서도
곧은 가치관으로 최상의 것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많은 이들이 있는데
굳이 그러한 교재를 택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교재 전체는 아니겠지만,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혹 문제가 있는 어떤 것에서도
개개인의 성도를 보호하시겠지만.
분명 가치관이라는 뿌리는
가치관을 반영한 열매를 어느 구석엔가는
노출하게 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우연챦게 오늘의 명언이 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대변해 준다.
<오늘의 명언>
우리 삶을 잡동사니로 가득 채운다면, 하나님이 내려 주실
진정 좋은 것들을 받을 공간이 없게 된다. -데이브 얼리
“하나님! 긴 글의 동기가 무엇인지 염려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 어린 이야기인지, 제 논리를 변명하려는 것인지...
하나님께서 알려주십시오.
제 주변에 귀한 영혼들로 가득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지켜주옵소서.
이번 주말부터 연구과제 작업에 들어가고
여러 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임하게 해 주옵소서.
오늘 목자님이 사업을 위해 중요한 일을 하시는데
성과 있게 해 주옵소서.
정환이 수도병원에서의 생활 속에서 평안과 의미,
깊은 하나님과의 사귐을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