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 내리는 밤
가을비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 신 경 림 -
간이역에는 희미해지는 기억과 스러져 가는 삶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 쓸쓸함에 바치는 연민과 그리움이 배어 있습니다.
초가을 간이역에 비가 내립니다.
황동규 시인은 가을비를 사랑해서, 세상 뜰 때 딱 하나는 두고 가겠다고 합니다.
“가을의 어깨를 부축하고/ 때늦게 오는, 저 밤비 소리에/ 기울이고 있는 귀는,
두고 가리/ 소리만 듣고도 비 맞는 가을 나무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귀 그냥 두고 가리. ”- 풍장 27에서 -
시인들의 귀에 가을 밤비 소리는 “소나타로 쏟아지고”,
“신이 지휘하는 자연의 대 오케스트라 연주”입니다.
“밤잠 없는 손님처럼, 수수밭 밟고 지나가는 소리”로 들려옵니다.
(조정권‘빗소리’에서)
스산한 가슴을 촉촉히 적셔옵니다. 그래서 이해리 시인은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리를 두고 잔다”고 했지요.
벌써 이틀째, 가을을 재촉하는 밤비가 내립니다. 숨죽여 추적추적 내리는
여느 가을비와 달리, 제법 소리쳐 창가를 두드려댑니다. 가을비는 그렇게
차 한잔을 부릅니다. 시라도 쓰고픈 시심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일상의 소음에 잔뜩 신경이 곤두선 사람들은, 가을비 오는 밤에도 쉬이
잠들지 못합니다. 신라 말 문장가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유학중에 읊었던 시
‘가을밤 빗속에(秋夜雨中)’처럼 말입니다.
“가을바람에 괴로워 읊조리네. 이 세상 뉘라서 내 마음 알아주리.
삼경 깊은 밤 창밖에 비는 내리고, 등불 앞에 심사가 만리를 달리네”
세상이 갈라지고 쪼개져, 부대끼고 으르렁대느라, 어디 하나 마음 둘 곳 없는
시절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의 빗소리는, “후두둑 관에 못질하는 소리”라는
오세영 시인의 탄식처럼 음울하기까지 합니다.
영혼을 부르는 러시아 국민가수의 노래 ‘가을비’ 같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 비 그치면
정신 번쩍 들도록 쌀쌀해진다고 합니다. 하늘을 잿빛으로 덮었던 구름도 미세먼지도 걷히고,
높푸른 가을 하늘이 다시 펼쳐지겠지요.
미당 서정주 시인은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데,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노래했습니다.
가을 어귀에서 궂은 비 내리고 바람 불어도, 슬픔과 아픔 떨치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살아봐야겠습니다. 어느덧 올해도 꼬리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 펌 글에서 >
빗소리
-조정권-
밤잠 없는 손님처럼/ 수수밭에서 가는 실 말리는 바람소리/
수수 잎에 민박하면 좋겠네/ 수수밭 밟고 지나가는 몇 가닥 빗소리/
수수껍데기 밟고 가는 바람소리/ 내 안으로 들이치면 좋겠네/
무한대허로 내 귀때기 끌고 가/ 가느다란 실에 매달아 놓은
밤빗소리/ 창문틀 떨어져 나간 두보(杜甫)네 집/
잠 달아난 베개 들고 / 내 들창가로 찾아오면 좋겠네/
내 안으로 들이치면 좋겠네.
가을비 오는 밤엔
-이해리-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어떤 가지런함이여/ 산만했던 내 생을 빗질하러 오라
젖은 낙엽 하나 어두운 유리창에 붙어/
떨고 있다/ 가을비가 아니라면 누가
불행도 아름답다는 걸 알게 할까
불행도 행복만큼 깊이 젖어/ 당신을 그립게 할까
가을비 오는 밤엔/ 빗소리 쪽에 머릴 두고 잔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이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움 사람을 그리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