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빚 갚기 운동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기록물 살다 보면 어려운 시기가 있다. 생존을 위해 당장 돈이 없으면 빚이라도 내서 살아야 한다. 개인뿐 아니라 국가도 이런 상황을 겪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발생되는 것이 국채(國債)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만들지 않은 빚, 즉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을사조약을 맺게 되고 일본은 통감부를 지으면서 이때부터 높은 이자를 붙여 강제로 빚을 덮어씌웠다. 201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한 경제적 자립운동이다. 국민 스스로 1,300만 원의 나랏빚을 갚기 위한 활동을 알려주는 2천 5백여점의 유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 기록물들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국채보상운동의 발단과 전개를 기록한 것, 둘째 전파와 파급력을 기록한 문서, 셋째 일제 정부 관련 기록물, 마지막으로 신문 등 언론 기록물이 있다.

01.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본격적인 전개를 위하여 발표된 취지문. 외채를 이용한 서구열강의 침략방법과 이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가에 대하여 서술하고, 국가의 운명을 구하기 위하여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국채를 보상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한국금융사 박물관 02. 1970년 2월 21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가 실려 전국 각 지방 많은 국민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유네스코
바람 앞의 등불
19세기 말부터 제국주의 열강은 식민지적 팽창을 하면서 피식민지 국가에 큰 규모의 빚을 지우고 그것을 빌미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일본도 우리나라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루어진 후 식민지로 만들려는 작업은 더욱 빨라졌다. 그중 하나로 많은 빚을 떠안게 해서 경제적으로 혼란을 유도하고 이익을 얻으려고 했다.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우리나라의 엽전과 백동화와 같은 우리 돈을 쓰지 못하게 하였고, 일본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일본 돈만 쓰게 하는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던 때 빚만 1,650만 원이었다. 새로 빚을 내어 350만 원을 갚아도 1,300만 원이 남아 있었다. 그 당시 쌀 한 말 값이 1원 80전이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일 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의 큰 금액이었다고 한다.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일본의 국채를 갚기 위하여 계급 차별, 남녀 구분도 없이 전 국민이 힘을 합하여 대항 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내가 먼저
국채보상운동의 발의는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에서 부사장인 서상돈이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자 사장인 김광제 등 회원들이 전원 찬성하여 시작되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회원들은 모금을 하여 2,000원을 모았다. 2월 초 김광제, 서상돈 등은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를 작성하여 전국 각지에 보내 온 국민의 동참을 요청하였다. 2월 16일 제국신문에서 맨 처음 보도하고 이어서 21일에는 대한매일신보에 취지서가 실려 전국 각 지방 많은 국민들이 호응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高宗)은 2월 27일 “우리 국민들이 국채를 보상하기 위 해서 단연하고 그 값을 모은다 하는데 짐이 담배를 피울 수 없다”라며 금연을 하였고 이에 따라 궁궐에 근무하는 많은 이들도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많은 민족 언론기관들이 자주 자강의 구국운동으로 보도함으로써 많은 이들이 기부를 하였고, 신문사는 기부자 명단을 신문에 게재하여 점차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4월 8일에는 전국에서 모여지는 의연금을 보관하고 이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라는 통합 기관을 만들었다. 당시 가장 많은 부수를 발행하고 있는 대한매일신보사가 전국적인 중심기관으로 활동하였는데 영국인 경영자 어니스트 베델 때문에 일제통감부가 이 신문을 효율적으로 탄압할 수 없었다. 국채보상운동에 꾸준히 베델과 양기탁 등이 주축이 되어 일제통감부의 탄압과 이간 정책에도 불구하고 국민들과 함께 항일구국 언론 활동을 전개하여 국채를 갚기 위한 활동에 대해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운동은 빠르게 확산되었다. 모금액을 받아서 정리하던 각 지방 사무소는 담당자들을 두고 통문(通文)1)으로 문서를 주고받았으며, 신문과 같은 언론이 홍보에 나서는 등 적극적으로 운동을 펼쳤다. 그로 인해, 모금액이 점점 늘어나는 것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운동을 알리는 데 구심점 역할을 했던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과 베델에게 보상금을 횡령했다는 누명을 씌웠고 그 결과 운동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이후에는 모금운동이 아니라 의연금을 조사하기 위한 국채보상금검사소가 설립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와해되었고 몇 사람의 인사로 구성된 사후처리회만이 남게 되었다.
1910년 8월 11일 13도 대표로 구성된 국채보상금처리회를 개최하여 이 의연금을 토지를 매입하기로 하였고, 황성신문사 등 모집한 의연금에 대해서도 민립대학기성회의 기금으로 쓰기로 하고 6백만 원의 토지재단을 세운 바 있으나 통감부가 허가하지 않아 끝내 실패하고 만다.

03. 창원항 상채의연소 문서 ⓒ한국금융사 박물관 소장 04. 1907년(광무 11년) 4월 1일 우정면(牛井面) 신곡(新谷)에서 국채보상금으로 1원 50전을 영수하고 발급한 영수증 ⓒ한국금융사 박물관 05. 김광제 선생이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를 낭독했던 서문시장(1910년대 추정) ⓒ대구도시경관 06.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은 국가적 위기에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시민적 ‘책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물이다. ⓒ유네스코
각계각층, 전 세계에서
국채보상운동은 전 국민이 참가한 운동이었다. 고종을 비롯한 남자들은 담배를 끊고 나라 빚을 갚으려고 하였고 부녀자들도 비녀와 반지를 모으고, 끼니때마다 쌀 한 줌씩을 아껴가면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특히 하층민인 기생 앵두는 그동안 모은 100원을 국채보상수금소에 와서 내어놓고 갔다. 함경남도 단천군에서는 ‘국채보상운동가’ 노래를 만들어 불렀는데 6살, 9살 어린이들도 의연금을 내었다는 가사가 나온다. 황해도 석교마을의 오현구라는 머슴은 담배는 물론 일할 때 마시는 술도 끊겠다고 성금을 보내기도 하였고 경기도 문원마을에서는 마을 나무꾼들이 산으로 가서 나무를 해서 팔아 돈을 보냈다. 북촌의 인력거꾼, 동대문 밖에서 짚신을 삼아 살아가던 노인, 그리고 절에 있는 스님과 교회의 목사와 신도들 등 모든 종교 단체도 기부를 했다고 한다. 또한 일본 유학생, 미국과 러시아 등지에 살던 교포들도 적극 참여하였고, 심지어 한국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이 운동에 동참하였다.
국민들과 함께 항일구국 언론활동을 전개하여 국채를 갚기 위한 활동에 대해 소문이 퍼지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운동은 빠르게 확산된다.
국채보상운동이 쓴 ‘최초’의 기록
국채보상운동은 여러 가지 방면에서 최초의 기록이 많다. 첫째,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일본의 국채를 갚기 위하여 계급 차별, 남녀 구분도 없이 전 국민이 힘을 합하여 대항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일본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민의 단합을 이루었으며, 외세에 대항하여 평화운동을 지향하였다. 둘째, 그 당시 집에서만 살림하는 사람으로 보는 여성의 권리가 높아지는 여성운동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다. 셋째, 나라를 위해 한마음이 되어 빚을 갚기 위한 기부운동이기도 하다. 넷째, 우리나라 최초의 금연운동으로 일본 상인이 담배에서 폭리를 챙기는 것을 알고 대항한, 우리 경제를 지키는 경제주권 수호운동이다.
1) 조선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
글. 박경태(한국금융사박물관 학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