뤼미에르 형제(Auguste, 1862~1954 / Louis, 1864~1948, Cinematographe)

1894.2.13 영화 카메라 겸 영사기인 시네마토그라프(Cinematographe) 특허를 얻다
‘영화의 탄생’은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 파리 그랑카페의 지하 인디안 살롱에서 10여 편의 활동사진을 최초로 상영했던 1895년 12월 28일이다. 그러나 ‘영화산업의 탄생’은 그보다 1년여 전인 1894년 2월 13일, 뤼미에르 형제가 촬영기와 영사기를 겸하는 시네마토그라프에 대한 특허를 얻은 때라고 할 수 있다.
시네마토그라프 특허 획득하자마자 유럽은 물론 전세계에 폭발적 인기
영화는 발명될 때부터 대중적인 산업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최초의 영화 상영보다 특허 획득이 1년 여 전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당시에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산업적 가능성이 공유되고 있었다는 점을 알려주고 있다. 물론 최초의 영화상영과 특허획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다른 견해도 있다. 뤼미에르 형제가 최초의 영화상영회를 가지기 두 달여 전에 이미 대중을 상대로 한 유료 영화상영회가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독일의 스클라다노브스키 형제(Max & Emil Skladanowsky)가 1895년 11월 1일 베를린에 있는 뷘토카르텐이란 곳에서 특허를 얻은 비요스코프(Bioskop)로 <권투하는 캥거루들> 등 9편의 활동사진을 유료로 상영했다는 것이다.또 그랑카페 영화상영회 전에 이미 시네마토그라프는 파리 소르본 대학이나 프랑스 사진협회 등에서 수많은 시험 상영이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
영사기 발명 후 의학계로 눈을 돌려 암 연구에 일생을 바친 오귀스트 뤼미에르
어쨌든 영화는 제 모습을 상영해 보여주기도 전인 1894년 2월 13일 특허부터 획득했다. 특허 획득 이후 영화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뤼미에르 형제의 사업적 예견력을 확인해 주었다. 최초의 영화상영회를 가진 지 불과 몇 달 뒤인 1896년, 뤼미에르 형제는 런던과 뉴욕을 방문 시네마토그라프 상영회를 가졌다. 이어 이들의 발명품은 폭발적인 관심을 일으키며,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에서 시연회를 가지는 등의 놀라운 성과를 일궈냈다.
또 이 해 7월 7일에는 인도 봄베이 왓슨 호텔에서 시사회를 가졌으며, 노벨티 극장에서 7월 18일까지 영화를 정기적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1897년에 이르자 이미 전세계에 수백 개에 이르는 시네마토그라프가 팔려나갔다. 이 때는 이미 750편에 이르는 영화카탈로그가 있었다. 1900년에 열린 파리 세계박람회의 주인공은 단연 시네마토그라프였다. 박람회 대형 스크린에 영화가 상영되는 행사가 열렸으며, 뤼미에르 형제와 시네마토그라프는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이후 영화는 전세계 문화산업의 총아가 됐다.
아버지에게 물려 받은 예술적 감수성과 과학적 호기심으로 사진 관련 제품 발명
컬러사진 연구로 전환해 파노라마 사진 기술 등을 발명한 루이 뤼미에르
형인 오귀스트 마리 니콜라스 뤼미에르는 1862년 10월 19일, 동생인 루이 진 뤼미에르는 1864년 10월 5일, 둘 다 프랑스 브장송의 트윈 계곡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앙투안은 그림을 그리다가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앙투안은 1860년 브장송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열었다. 이후 리용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진가들과 다양한 교류를 했으며 파리와 비엔나에서 열린 사진전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모두 과학 과목에서 뛰어난 성적을 냈다. 형제는 모두 아버지 앙투안이 가지고 있는 예술적 감수성과 과학적 호기심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둘 다 유기 화학에 대해 흥미를 느꼈는데, 그 중에서 오귀스트는 생화학과 의학 분야을 좋아했고 동생인 루이는 물리학에 관심을 가졌다. 루이는 마티니에르 기술학교에 다니던 1880년 사진 원판 개선 작업을 시작, ‘블루 레이블’로 알려진 사진건판(photographic plate)의 더 나은 형태를 개발하기도 했다. 뤼미에르 형제와 아버지 앙투안은 이 기술을 이용한 공장을 세워 사진건판 관련 유럽최대회사로 키웠다.
에디슨의 아이디어를 개선해 움직이는영상 필름 개발
1890년에 이르러 사진산업은 흑백에서 컬러로 바꾸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또 미국과 유럽 대륙 양쪽에서 모두 움직이는 사진기술 개발 경쟁이 시작됐다. 1893년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이 키네마토스코프를 만들어 움직이는 사람의 영상을 보여줬다. 뤼미에르 형제의 목표는 에디슨의 아이디어를 개선해 움직이는 영상 필름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곧 뤼미에르 형제는 움직이는 사진을 촬영하고 영사를 한꺼번에 할 수 있는 시네마토그라프를 제작했다. 에디슨이 만든 키네마토스코프에 비해 훨씬 소형이어서 촬영 상영이 용이했다. 또 키네마토스코프는 놀이공원의 오락용 기계 개념이었던 반면, 뤼미에르 형제의 시네마토그라프는 실사 촬영 상영용이란 점이 달랐다.
1894년 2월 13일, 뤼미에르 형제는 시네마토그라프 특허를 획득한 뒤 그 해여름, 루이는 노동자가 공장을 떠나는 장면을 시네마토그라프로 촬영했다. 드디어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 그랑카페에서 영화상영회를 가졌다. 첫 상영회에서는 <뤼미에르 공장의 출구>, <기차의 도착>, <물 뿌리는 정원사> 등 모두 10편의 활동사진이 상영됐다. 첫 영화상영회 이후 시네마토그라프는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영화산업이란 거대 문화산업이 새롭게 시작됐다.
1895년 최초의 상연작 10편 중 <기차의 도착>
이후 루이는 컬러사진 연구로 전환했다. 루이는 1904년에 ‘오토크롬 프로세스’를 개발했다. ‘오토크롬 프로세스’는 1907년 큰 성공을 거두며 판매에 성공한다. 루이는 1902년 파노라마 사진기술을 개발한 데 이어, 1920년에는 스테레오 초상화 시스템을 개발하고 1930년에는 스테레오 필름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오귀스트는 의학공부에 매진해 1910년 리옹에 실험실을 설립하고 결핵 암 연구에 일생을 보냈다. 오귀스트는 1928년 <인생, 질병 그리고 죽음>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오귀스트는 레종도네르 상을 수상했으며 루이는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됐다. 루이는 83세를 일기로 프랑스 방돌에서 1948년 6월 4일 세상을 떠났다. 형인 오귀스트는 91세까지 장수하다 리용에서 1954년 4월 10일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