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투성이 신문 기사
어느 지인이 말하기를 요즘 자기는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연유를 물어봤더니, 외래어가 너무 많아서 읽기가 힘들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요즘 나이 많은 세대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쏟아지는 외래어를 감당하기 힘들다. 알고리즘, 커밍 아웃, 가스 라이팅, 플렛폼 등 그 뜻을 어림잡을 수 없는 말들이 수없이 나온다.
아침에 배달되어 온 신문 기사의 한 토막을 소개한다.
“지난달 17일 공개된 ‘오징어 게임’은 23일부터 넷플릭스 ‘전 세계 오늘의 톱10’ 차트에서 줄곧 1위를 지키고 있다. OTT 순위 집계 사이트 플릭스패트롤에 따르면, 29일 현재 집계 대상 국가 83곳 중 80개국에서 1위다. 랭킹 포인트도 최근 1주일 동안 770→788→811→820→822→824→826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오징어 게임’이 역대 가장 인기가 높은 프로그램이 될 수 있는 기회”라는 넷플릭스 공동 CEO 테드 서랜도스의 전망이 들어맞을 가능성이 크다.
(※이 인터뷰에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외래어 투성이다. 뭐가 뭔지 뜻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몇 줄 뒤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어릴 때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즐겨 했던 ‘오징어게임’이 세계인이 열광하는 핫 키워드로 급부상할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이 구절을 읽고 난 나는, 내가 오징어게임 세대가 아니라서 그걸 모르느구나 하는 생각이 퍼떡 떠올랐다. 우리가 자랄 때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같은 게임만 있었지 ‘오징어게임’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릴 때 배운 것이라야 평생을 간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가는 것은 세상의 이치다.
우리도 어릴 때 손에 익히고 대하던 문명의 도구가 있었다. 바로 주산이다. 어릴 때 손에 들고 익혔던 주산은 전자 기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요즘 사람들은 컴퓨터, 스마트 폰이란 최신 기기를 손에 들고 산다. 나이 많은 구세대는 주산식 사고를 하고, 젊은이들은 전자기식 사고를 한다. 구세대가 따라갈래야 따라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라는 이는 지식 2배 증가 곡선(Knowledge Doubling Curve)이란 이론을 정립한 사람이다. 지식의 총량이 2배 증가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곡선으로 표시한 이론이다. 인류의 지식 총량이 얼마의 기간을 두고 증가하는지를 가시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류의 지식 총량이 2배 증가하는데, 종래에는 100년의 시간이 소요되다가 1990년대부터 25년, 현재는 1년, 2030년이 지나면 3일이 걸린다고 한다. 과거에는 한 개인이 인류의 지식 증가량에 참여하다가 생을 마감했으나, 앞으로는 지식 증가량을 따라잡지도 못할 형편이 된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2박 3일 여행 다녀오면 지식이 2배나 늘어나 있어서, 그것을 따라잡으려고 꼬박 며칠을 지새워도, 다시 또 지식량이 늘어나 있기 때문에, 지식 증가량의 속도에 습득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지식증가 속도에 습득 속도가 따라갈 수 없게 된다.
여태까지는 외국어를 외래어로 바꾸는 데 시간이 넉넉하였다. 그 몇 예를 보자.
‘복사(輻射)’라는 말은 영어 radiation을 번역한 말이다. 영어 radiation이 ‘수레바퀴 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radius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수레바퀴살 복(輻)’자를 한문 고전에서 찾아 복사(輻射)란 말을 지어낸 것이다. 새로운 지식에 맞는 말을 찾기 위하여 오랜 시간과 많은 공을 들인 것이다.
공화(共和)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공화’는 두 사람 이상이 화합하여 공동으로 정무를 펼쳐 나간다는 뜻이다. 왕정(王政)과 대립되는 말이다. 공화의 정체를 가진 나라를 공화국(共和國)이라 하는데, 공화국이란 말은 영어의 Republic을 번역한 말이다. 동양에서는 이러한 공화국의 정체가 없었다. 그때까지 동양은 대체로 왕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말은 라틴어 Res publicus에서 온 말인데, ‘공공(公共)의’ ‘공중(公衆)의’ ‘국민의 것(people’s thing)’이란 뜻이다.
동양에서 이 단어가 공화로 번역된 때는 네덜란드와 교역을 하고 있던 일본 에도시대였다. 당시 학자들은 네덜란드 서적을 번역하면서 Repubilc이란 단어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를 고민하였다. 왕이 다스리지 않는 정체(政體)라는 것을 어떤 단어로 번역해야 할지 몰랐다. 동양 역사에는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 고전을 샅샅이 뒤졌는데, 오스키 반케이(大槻磐溪)라는 학자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주 본기(周本紀)에서 공화라는 말을 찾아냈다. 바로 주나라 10대 임금인 여왕(勵王)이 폭정을 일삼다가 백성에게 쫓겨났을 때, 나라를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두 재상이 다스렸는데, 바로 그 두 사람이 함께[共] 합심해[和] 다스렸다고 해 공화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복사나 공화처럼 그렇게 오랜 시간을 가지고 말을 만들어 낼 여유가 없다. 새로운 지식이 빠르게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의 외래어 만들기에 오랜 숙고를 거칠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어떤 이는 말한다. 지금의 국어 연구원은 뭐하고 있느냐고 한다. 국어원에서도 외국어를 꾸준히 국어로 순화하고 있다. 그러나 증가 속도가 너무나 많고 빨라서 그 속도를 따라갈 수가 없다. 최근의 순화 자료를 보면 코로나 펜데믹을 비롯한 수많은 말이 올려져 있으나 플렛폼 같은 말은 없다. 그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다.
2,500년 전쯤 그리스의 시인 아이스퀄로스 (Aischylos, 기원전 525~456)가 타이탄족의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아궁이에서 불을 훔쳐다 인간에게 건네주었다고 하였다. 그 후 2,000년쯤 지나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F. Bacon, 1561~1626)이 이 말을 듣고 감격했다. 그래서 그는 ‘고대인의 지혜’에서 프로메테우스가 인류를 창조했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다. 현대는 지식 정보화 사회이기 때문이다.
LGBT라는 말을 찾아보았더니, 레즈비언(lesbian)과 게이(gay), 바이섹슈얼(Bisexual),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성소수자(性少數者, sexual minority)를 찾아보았더니, 트랜스젠더, 양성애자, 동성애자, 무성애자, 범성애자, 젠더퀴어, 간성, 제3의 성 등을 포함하며 성 정체성, 성별, 신체상 성적 특징 또는 성적 지향 등과 같이 성적인 부분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는 이를 말한다고 되어 있다.
하나의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 말을 찾아보았더니 점점 더 많은 말을 알아야 했다. 나팔 주둥이처럼 점점 더 크게 범위가 넓어졌다. 나이 많은 사람이 이 많은 정보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한번 정해 놓은 외래어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용어로 바뀌기도 한다.
기호학에서 사용하는 프랑스어 ‘시니피앙(sygnifiant)’과 ‘시니피에(sygnifié)’를 예로 보자. 이 한 쌍의 말은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지난 1980년대까지 ‘능기(能記), 소기(所記)’로 번역되었으나, 1990년대 이후 ‘기표(記標), 기의(記意)’로 번역되었다.
virus의 경우 옛날에는 의학 용어로 독일어가 많이 사용되어 비루스라고 했지만, 지금은 일관되게 영어식 바이러스가 되었다. 링거는 예전에는 링게르라고 많이 불렀지만, 지금은 다 영어로 링거라고 한다. Midas의 경우, 영어식으로는 마이더스라고 발음하지만, Mida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므로 그리스식으로 읽어서 미다스라고 한다.
또 많은 단어들이 그러하듯이 외래어도 그 뜻이 변한다.
플렛폼은 우리가 알기에는 역에서 기차를 타고 내리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특정 장치나 시스템 등에서 이를 구성하는 기초가 되는 틀’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아마존 등의 기업들이 강력한 플렛폼 비즈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스팸(SPAM)은 원래 육가공 통조림의 상표였으나 지금은 스팸메일로 사용되고 있고, 월페이퍼(wallpaper)는 원래 벽지를 의미했으나 지금은 컴퓨터 바탕화면을 가리킨다. 또 게이트(gate)는 원래 성문, 관문, 갑문 등을 의미하는 영어이나,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권력이 개입된 각종 부정, 비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왜건(wagon)은 4륜마차를 가리켰으나 지금은 적재 공간이 있는 해치백 모양의 차를 가리킨다.
나이 많은 세대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우리 앞 세대 어머니들은 문맹이 많았다. 그분들은 글을 몰라도 살아가는 데 별 지장이 없었다. 외래 정보가 필요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도의 정보화 시대다. 정보를 놓치고는 살아갈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정보로 이루어진 사회 구조 속에서 생활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좋든 싫든 우리는 고도의 정보화 사회라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폭주하는 외래어의 흐름 속에서 살 수밖에 없는 시대가 왔다. 구세대가 헤쳐가기에는 어려운 세태임에는 분명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공이산(愚公移山)처럼 꾸벅꾸벅 삽질을 하면서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어느 노인은 휴대 전화기를 전화하는 데만 사용한다고 하였다. 외래어 때문에 신문을 끊는 노인도 있다. 희한한 문명의 이기도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무익한 존재가 되었다. 이처럼 우리는 지금 크나큰 문명의 충돌 속에 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마지막 장면을 한번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노인은 고기를 잡지 못하다가 85일째 되는 날 거대한 청새치를 잡았지만, 상어에게 다 뜯어 먹히고 뼈만 뱃전에 달고 돌아온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작가 헤밍웨이는 그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The old man was dreaming about the lions).
헤밍웨이가 선택한 마지막 단어, ‘사자’(the lions)는 포효하는 기상과 땅을 박차는 힘을 상징한다. 그 사자 꿈을 꾸는 한, 노인은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다.
첫댓글 張博士님!
전공이 "국어국문학"? 아님 언어학?...
시원스럽게 우리들 長老帶 (80세) 의
휴대폰(Smart Phone) 과의 共存共榮시대 살아가자니 ㅡ격세지감을 많이 느낀다는 표현이 맞을것 같습니다. 요사이
젊은층들이 만들어내는 "단순낱말들"
같은 한글어에도 어리둥절할 때도 많은 데 하물며 "외래어 ㅡ영어"에 까지 덧칠 해서 사용하므로 우리네 노인世代님들
신문도 읽지 않으시겠다는 분들도 늘어난다 굽쇼~~그럴 수 록 한글과는 멀어지면 않되죠. 까짓 신용어 (영어합성어) 고것들 이해 못 하면 ㅡ 상대 안 하면 돠고 ㅡ 우리들 世代人들은 우리끼리 놀면 (?) 되잖아요?? 특히 우리 카페회원님들은 이 방을 자주 활용해서 읽고 쓰고 ㅡ댓글도 달아보고 이러노라면 찿아 올
腦技能低下症에도 염려하지 않을 까 싶습니다. 오늘 올려놓은 記事엔 실감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선생님 늘 관심을 갖고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승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