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호 장흥위씨종보 종인광장
(冠蒼 위소환)
「내가 걸어온 이정표(里程標)」
여보게 친구!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별고 없는가? 무고한가? 궁금해서 안부를 묻네. 지금 나는 신문과 책을 읽다가 내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정표를 쓰고 있다네. 나는 잘 있다네.
11살에 모친을 잃고 49살에 부친마저 잃고 1965년 26세 때 아내 이권사를 만나 장가들어 아들만 삼형제를 얻었네.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군 입대하려고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하고 군대에 가서 보병7사단 통신참모부 장비계에서 33개월 19일간 의무복무를 했다네. 일반하사로 전역했지.
일도 해보지 않고 38년간 남의 밥을 잡수신 나의 선친께서는 지독하게 일만 시켰지. 군대 가기 전 낮에는 천관산에 올라가 나무를 했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오늘이나 공부를 할 것인가 하면 짚을 물에 축여 새끼 꼬라고 했다네. 그래야 밥을 편히 먹을 수 있었다네. 한마디로 말하면 단 한 시간도 공부할 시간을 주지 않았지.
나뭇짐을 지고 오면서 쉬는 짬을 활용해서 그날 외울 것은 외우고 이해할 것은 철저히 이해해 그야말로 7전8기의 정신으로 노력했다네. 그래서 18세 때 보통고시를 비롯해서 경찰직, 산림보호직, 검찰사무직, 법원사무직, 농촌지도직, 농업직 등을 응시 했다네. 1966년 전라남도 고시 제1회 공개채용시험에 합격하여 1967년 3월 15일자로 장흥 대덕면 사무소에 첫 발령을 받아 공직생활을 시작했지.
2년 후 수산직으로 전직되어 못된 사람들 때문에 장흥, 강진, 여천, 보성, 영광, 영암군 등 여러 군의 발령을 받아 공직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유혹도 많았지만 흐트러짐 없이 32년간 공직생활을 아무 사고 없이 정년퇴직할 수 있었다네. 강진군에 근무할 때는 칠령면 봉황리 지선 바지락 종패장에 경운객토사업을 새마을사업으로 추진했어. 당시 황토를 사용한 것은 수산학 박사도 꿈꾸지 못하는 대단한 쾌거였어. 또한 영광군에서는 수산자원 보호령 제5조 2항의 특정어구 사용승인에 대해 전임자의사무착오를 바로잡아 어민들의 부담을 경감시켰어. 허가제와 신고제는 비용뿐만 아니라 수산업 활성화에도 큰 영향을 주거든.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수산대학교를 다니는 등 무진장 노력했지 뭐야. 근무할 때는 전임자들의 업무답습이 아니라 업무를 창안하여 수행했지.
군수표창 4회, 도지사표창 2회, 청백리공무원 포상 및 근정포장을 수상했고 20세기 공훈인사편람(행정편)에 등재되는 영광을 안았다네.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았던 세월이었네. 아무 준비도 없이 장가드는 바람에 급할 대로 급해 아무 시험이나 합격하려고 주변 분들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네.
작은 집 사랑방, 당질 위성배 사랑방, 농안리 처형 집을 전전하면서 공부했지. 선친께서는 일하지 않고 공부한다고 책을 꺼내서 불태워 버렸지. 가끔 이 일을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어긋나지 않고 정도를 걸으려고 노력했다네. 남은 날이 얼마인 줄은 모르나 욕심 없이 살아가고프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 아닌가! 욕심 부려 뭐하겠는가! 나의 가장 귀한 재산은 아들 셋이라네. 똑똑하고 성실해서 억만금보다 귀하다네. 그러나 나에게도 자랑스러운 일이있다네.
정년 후 고향에 정착해서 문중일도 보고 일가친지와 노후를 따스하게 보내려고
했는데 그만 고향에 정착하지 못하고 화순 한계마을에 살게 되었다네. 벌써 20년이되었지. 2014년부터 화순 한계리 창조마을 추진위원장을 맡아 4년간 낙후된 마을을 생산적인 마을로 탈바꿈시켜 박병길 한천면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네. 봉사는 박사보다 높다고 하잖아! 개신교 장로로 현재 한계리 노인회장과 초등학교 한자훈장을 맡고 있지만 아쉽고 후회스런 일이 두 가지가 있다네.
첫째는 3일만 있으면 관산읍장 발령을 받았을 텐데,
둘째는 퇴직금을 연금으로 신청하지 않고 일시불로 수령한 것이라네. 누구의 탓도 아니고 바로 내 탓이라네. 여보게 친구! 너무 잔소리를 늘어놓은 것 같아 미안하네. 용서하게나. 또 연락하세.
관창 어르신께서는 우리 문중에 대해 유별난 애착을 가지고 계십니다. 미수를 바라보는 연세에도 밴드에 열중이십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