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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27장 34절 은혜와 진리의 가치8-하나님의 동역자
여러분이 일생 일대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시다. 그때 누가 여러분의 옆에 있을 때 든든하겠습니까? 친구입니까? 형제입니까? 아니면 남편이나 아내입니까? 아니면 부모나 자식입니까? 아니면 회사의 오너입니까? 누가 여러분의 든든한 후원자입니까? 어떤 사람은 친구인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은 남편이나 아내인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부모나 형제나 자식인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회사의 사주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들이 든든한 이유는 여러분들만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그들이 함께 있음으로 인하여 인생의 어려운 문제도 어느 정도는 쉽게 해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들과의 관계도 잘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머무르면 안됩니다.
사무엘상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하러 갔는데 강한 군대인 블레셋 사람들과 맞닥트리자 그들과 싸워 이길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여러 가지로 논의한 결과 법궤만 전쟁터로 가지고 오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엘리제사장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를 시켜서 법궤를 메고 오라고 시켰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로 법궤를 메고 갔습니다. 법궤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기가 엄청나게 올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함성을 들은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사로잡힌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서로를 독려하면서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아! 힘써 대장부가 되어 싸우자!” 그 날 전쟁의 결과는 블레셋의 대승이었고, 반대로 이스라엘은 대패하였습니다. 그릭호 법궤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지는 못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었던 법궤로 인해 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들은 믿음의 대상을 법궤로 보지 말고 법궤를 만들라고 하신 하나님께 두었어야 했지만 하나님이 아닌 법궤를 믿음의 대상으로 둔 것입니다. 그 결과 전쟁은 패하고 법궤는 빼앗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법궤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겼을까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와 함께 요단강을 건널 때 요단강 물이 넘침에도 불구하고 먼저 들어갔는데 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위에서 내려오던 물들은 거꾸로 흘러 먼 곳에 가서 쌓였고, 아래로 흘러내려가던 물은 그대로 아래로 들러갔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여리고로부터 시작해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항상 법궤가 전쟁터에 함께 있었고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하였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신 것인데 그들은 오해를 하여 법궤를 믿음의 대상으로 놓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법궤는 법궤대로 빼앗기고 전쟁에 크게 패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잡혀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강한 사람, 있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을 의지합니다. 다윗의 아들 가운데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그 당시 힘있는 군사 지도자였던 인 요압과 종교지도자인 아비아달을 포섭했습니다. 그리고 세력을 점점 키우다가 왕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높였습니다. 요압과 아바아달의 지지면 모든 백성들이 자신을 따라 오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도니야가 아닌 아직도 나이가 어린 솔로몬의 왕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에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통해 그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로인해 요압은 솔로몬의 신복이며 왕명을 받은 브나야에게 처형을 당했고,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직위를 빼앗긴 채 고향으로 낙향하게 되었으며, 아도니야 자신도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강한 사람을 통해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던 사람의 최후입니다. 이 세상은 이런 종류의 줄을 서기 위해 뇌물을 줘가면서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리의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누구를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심사숙고 해보아야 합니다. 누구를 의지해서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삼위의 하나님은 여러분들과 동행하시면서 한 뜻을 가지고 여러분들과 동행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만한 동역자가 이 세상에 없을 뿐 아니라 여러분 역시도 하나님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9절에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의 밭과 집인 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동역자들은 동일하게 고백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일하고 있고, 하나님 역시 여러분들의 동역자로 일하신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조금의 부족함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족할 때가 전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종종 부족해서 채워야 할 일들이 여러분들에게는 많이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돈이 모자라서 돈을 채워야 합니다. 어떤 때는 지식이 모자라서 지식을 채워야 합니다. 어떤 때는 권세가 모자라서 권세를 채워야 합니다. 어떤 때는 인력이 모자라서 인력을 채워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수없이 모자라서 채워야 하는 순간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그때마다 여러분은 가장 믿을만한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서 그것을 구해야 합니다. 한 두 번 구하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어주시거나, 아니면 다른 기도로 바꾸라고 하실 때까지 계속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들을 통해서 누군가를 위한 일을 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을 굉장히 답답하게 생각해서 한 마디씩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믿음이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에게 다가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에게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답은 현명한 것 같으나 오답이 많고,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말씀은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나 정답입니다. 우리 같이 한 목소리로 따라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제시하는 답은 현명한 것 같으나 오답이 많고,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말씀은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나 정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우선 사도행전 27장 34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지금 사람들은 유라굴로라고 부르는 광풍이 불어서 엄청난 바람과 파도속에서 살 소망이 끊어진 배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살기를 원하고는 있지만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인간의 한계점에 도달했습니다. 이제는 조금만 더 바람이 불면 다 죽을 판입니다. 14일 동안 계속해서 불어닥쳤가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탈진 상태입니다. 이 때 죄수로써 쇠사슬에 매여있던 사도 바울이 그 배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모든 사람이 절망인 상태에서 어떻게 사도 바울 만큼은 확실한 소망을 붙잡고, 평안할 수 있으며, 얼굴에는 기쁨이 넘치고, 입에서는 확신있는 말이 선포될까요?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폭풍우치는 바다 위에 풍전등화같은 상태에 놓은 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모든 사람들이 절망적인데 사도 바울은 희망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과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고 하나님이 사람의 동역자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복입니다. 그것은 누구와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동역하는 사람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베푸십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이 행동을 일으키는 근원입니다. 진리는 그 은혜를 말로써 표현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은혜는 대가성의 행동이 아닙니다. 은혜는 넘치는 사랑의 발로입니다. 그래서 은혜는 받는 사람의 조건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것을 진리로 선포하시고 그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리인 것입니다.
이 은혜와 진리는 사도 바울로 인해 사도 바울이 탄 배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위해서입니다.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무신론자도 있고, 우상숭배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다양한 죄를 지은 죄인들이 있었고, 쇠사슬을 차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죄인이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배에 탄 모든 사람들, 이제는 죽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믿는 모든 사람들을 폭풍으로부터 구원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세월호가 기울어져 물이 배에 들어오기 시작할 때 선장과 많은 선원들이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탄 배도 역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배에 탄 학생들에게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으라고 방송을 해놓고는 다시 방송도 하지 않고 자기들만 살기 위하여 배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없으면 배 안에는 배를 아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조정해야 하는 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과 배 안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탄 배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뱃 사람들은 어차피 함께 있으면 모두 죽을 수 밖에 없고 타고 모두를 다 실릴 수가 없으니까 우리라도 살고보자 하면서 배에서 탈출을 하려고 시도한 것입니다. 그때 그들이 도망치려 하는 것을 하나님께 말씀을 들어서 미리 알았던 사도 바울이 자기와 다른 죄수들을 로마로 데리고 가는 로마의 백부장에게 말했습니다. 31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그 말을 듣자 군인들은 거룻줄을 끊어서 내리고 있는 소형선인 보트를 바다에 빠뜨려 떠내려가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꼼짝없이 배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월호는 학생들과 교사들을 남겨둔채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구출한 해경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한 것입니다. 어쩌면 해경들이 선장과 선원들이 도망칠 때 “당신들이 저 학생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데리고 나오지 않는다면 이 배에 태우지 않겠다”고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들은 자기들이 살기 위해서라고 장비를 가지고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 학생들을 구출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해경은 도망치는 그들만이라고 살리려고 손을 썼고 배 안에 아이들은 그대로 다 죽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세월호 안에도, 그리고 해경들 안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 사람 누구도 그 배안에 하나님의 동역자가 없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어쩌면 세월호처럼 엄청난 위기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여당이든 야당이든지 간에 국민들의 생존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국민들의 생존보다 당론을 더 중요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아닙니다. 이 나라를 살릴 대안을 가진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필요합니다. 한 사람도 좋고 두 사람도 좋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나타나서 이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나라가 살 길입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들이 해야할 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은혜와 진리로 오늘날 세우시는 하나님의 동역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게 하시고 이 나라를 살리는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동역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 사람은 지금의 사태를 미리 예언했고 또한 앞으로 일어날 이 나라가 당할 어려움을 정확하게 예언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배가 출항하기 전에 분명히 백부장과 선장에게 경고했습니다. 사도행전 27장 9-10절입니다.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바울이 이 경고를 할 때 이미 바람은 불기 시작했고 항해 하기가 위태한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항해 전문가인 선장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항해였습니다. 그런데 항해를 하다보니 선장의 말은 틀렸고 죄수의 신분으로 사로잡혀 가는 사도 바울의 말은 옳은 것이 판명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바다 위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을 받는 사람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 기도하고 예언하는 일뿐만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를 앞에 둔 순간에도 홀로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솨고랑을 찬 채 죄수들 속에 섞여서도 다른 죄수들이 하지 않고 있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역시 혼자 골방이나 감옥에서, 아니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채 바로 그 자리에서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 지에 대하여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는 지를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시며, 또한 하나님이 세우신 동역자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기도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 사람이 꼭 대통령이나 정치가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우리 나라에 임하며, 또한 온 세계 가운데 우리 나라가 해야할 사명에 대하여 하나님에게 기도하면서 말씀을 받은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받아서 시대적인 사명을 감당하게 될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과 함께 계시며, 사도 바울과 함께 계셔서 죽음의 위기, 그리고 멸망의 위기 가운데 소망을 말씀하신 것처럼 그사람과 함께 계셔서 이 민족이 살 수 있는 길과 거기에 순종했을 때 이 민족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해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처음 출항할 때 지금 출발하면 안된다는 사도 바울의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배 안의 최고의 권력을 가졌던 백부장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줄을 끊고 그 배를 바다에 빠뜨려 버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비록 죽을 고생은 했지만 사도 바울이 세세하게 이르는 말대로 행하여 결국 단 한 사람의 생명도 잃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전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그들이 지었던 허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면서 안심을 시키십니다. 21-22절입니다.“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23-26절입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사도 바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고, 그에게서 구원에 대한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황제에게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배 안에 있는 276명의 사람들을 백부장이 아닌 사도 바울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동역자를 위해서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구원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보장하신 약속의 말씀을 전하고 나서 사도 바울은 다시 말씀을 전합니다. 33-37절까지를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
사도 바울의 지시를 받아서 14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바다에 던지고 비바람과 게센 파도와 맞닥트리면서 싸웠던, 그리고 그 고난의 소용돌이 한 기운데에 있었던 그 모든 배 안에 있던 276명의 사람들이 단 한 사람의 목숨도 잃지 않고 다 살았습니다. 단 한 사람 바로 사도 바울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난의 바다, 고난의 배에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던 것처럼, 이 시대의 대한민국 역시 그의 말을 들을 때 죽을 고생은 하겠지만 지도자의 결단력이 하나님의 사람이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이 대한민국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쓰시는 동역자들이 대한민국의 정치권에만 영향을 주는 사람들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이 로마의 황제 앞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할 사명을 가지고 갈 때 쓰신 사람은 사도 바울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사도들이 있었고, 곳곳에 복음을 전함으로 영혼들을 살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명과 사도 바울의 사명이 달랐을 뿐이지 그들을 다르게 쓰신 분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지금 이 세상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만을 쓰시지 않으십니다. 엄청나게 많은 일꾼들을 세우시고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정치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해줄 하나님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쇠고랑을 찬채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그런 하나님의 동역자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을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바로에게 요셉이 있었듯이, 느브갓네살에게 다니엘이 있었듯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을 받을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자기의 이익을 전혀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드릴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설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거나 사형을 당해도 진리를 진리로 외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 그 사람을 세워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각 분야에 그런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많이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것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은혜와 진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을 찾아 세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와 진리의 놀라운 가치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를 구별하시고 부르시고 세우셔서 하나님이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 명하시는 일을 하게 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여러분들이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동역자들을 세우셔서 자신의 뜻을 밝히 드러내시며 구원의 놀라운 영광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역자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 축복이 이 나라에 있으며 이 나라에 세워질 하나님의 동역자들이 많이 세워달라고 계속해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