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 다시 보기] 문 닫고, 들어온나!
“문 닫고, 들어온나”
요즘은 아니지만, 내가 어릴 때는 참으로 자주 듣던 말이다. 추운 겨울날 바깥에서 놀다가 집안으로 들어와서 방문을 열려고 하면, 방에 계신 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으레 하시는 말씀이었다. 바람이 차고 추우니까 빨리 들어와서 문을 닫으라는 말씀이다. 따지고 보면 문을 닫고 어찌 들어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고, 들어와서 문을 꼭 닫아야 했다. 논리적으로는 틀린 말이지만,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강조되는 말이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성경에도 어순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본다. 요한 1장 18절을 예로 들어보겠다.
1) 희랍어 본문:
하느님을 아무도 아니 보았다 일찍이, 홀로 태어나신 하느님, 그분 그 아버지의 그 품으로 계신 저분이 알려주셨다.
2) 라틴어 번역:
하느님을 아무도 아니 보았다 일찍이, 홀로 태어난 아들, 그는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저분이 알려주셨다.
3) 영어 번역: (King James Version 1611/1769)
아무도 아니 일찍이 보았다 신을, 홀로 태어난 아들, 그는 아버지의 가슴에 가까이 있는 저분이 그분을 알려주셨다.
4) 독어 번역: (Einheitsuebersetzung 1980)
신을 아무도 아니 보았다 일찍이, 그 홀로 태어난 아들, 그는 그 아버지의 그 가슴에 기댄 자, 그분이 알려주셨다.
5) 가톨릭 새 번역: (2005)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주셨다.
6) 가톨릭 공동 번역: (1977)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런데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주셨다.
7) 개신교 관주 번역: (1961)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8) 개신교 새 변역: (2001)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여기서 우리는 간단한 질문을 하나 해 보자. 1) 하느님, 2) 아무도, 3) 일찍이, 세 가지 단어 중에 어느 것이 중요한가? 말할 것도 없이, “일찍이”보다, “아무도”보다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희랍어 본문이 그 의미를 잘 들어내고 있고, 라틴어 번역과 독어 번역이 희랍어 본문의 어순을 잘 따르고 있다고 하겠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선재(先在)하는 이, 위(爲)하는 이
인간은 모두 자기보다 앞서 존재해왔던 이를 통해 태어나고 그 이덕에 삶을 꾸려 나갑니다. 아기가 태어남에 앞서 부모가 있고, 아기가 자라남에 있어 부모의 돌봄이 있습니다. 이는 소위 사회생활이라 불리는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학교는 배움을 받아야 할 학생과 그 학생보다 먼저 있어 왔고, 그리고 그들을 가르침으로써 위함에 의의를 두는 선생으로 구성되는 작은 사회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직장에는 갓 자기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이와 먼저 자리를 잡아서 후임에게 길을 안내해 줄 수 있는 선임이 있습니다. 이렇듯, 단순하고 합리적인 선의를 통해 먼저 있어왔던 이는 늘 자기 뒤의 사람들을 위하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는 전자, 후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먼저 있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는 이들이 즐비합니다. 성경은 그 현실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담은 하느님 말씀을 어기는 죄를 저지르고서는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 그 죗값을 자기에게서 태어난 하와에게 떠넘깁니다(창세 3,12). 형 카인은 자기의 제물보다 동생 아벨의 제물을 선호하시는 하느님 때문에 동생을 살해하였고, 그 아벨의 피를 받아 마신 땅은 피에 대한 책임을 울부짖습니다(창세 4,10; 마태 23,35). 동생 야곱은 형 에사우보다 먼저 있기 위해 그의 장자권을 술수로 사들이고,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 형이 마땅히 누려야 할 축복을 가로챕니다(창세 27,35).
이러한 현실에 그 어떤 존재보다 선재하시는 하느님께서 내려오셨습니다.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이 구절은 삼위일체 신비 안에서 하느님으로서 그 누구보다 선재하시며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향하여’ 계시는 우리 주님에 대한 증언입니다. 그런데, 영원으로부터 아버지 하느님을 향해 있는 그분의 얼굴이 첫 아담의 저주와 아벨의 피를 뒤집어쓴 땅을 향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이로써 하느님께서는 ‘먼저 있음’의 근본 의의를 드러내십니다. 그분의 선재는 배타적인 신성을 세움이 아니라, 저주와 피를 뒤집어쓸지언정 우리와 함께하심을 지향합니다. 그 함께하심은 십자가 상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신비로서 땅에 스며든 저주와 피를 씻어냅니다(묵시 7,14). 주님께서는 ‘선재(pre-existentia)’하시는 분으로서 한 처음에 당신께서 보시기 좋다 하신 인간을 ‘위하시는 실존(pro-existentia)’을 반드시 이뤄내십니다. 실로 은총 위에 더 부어지는 은총이자 축복 그 자체라 하겠습니다(요한 1,16).
우리 모두는 늙어가기 때문에 자연스레 어떤 이들보다 ‘먼저 있는’ 존재가 되거나, 특별한 지향으로 ‘앞서 있는’ 존재가 되기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선재가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으로서 저주가 되고 타인의 피를 흘리게 만드는 일로 귀결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 누구보다 먼저 있음은, 주님의 선재를 닮아, 항시 타인을 위함에 이바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찍이 주님의 선재를 고백했고(요한 1,15) 세상의 죄를 없애심으로써 사람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의 뒤를 따라 사람들을 위한 세례를 베푼(요한 1,29-34) 세례자 요한의 삶은 하나의 좋은 모범이 되어줍니다. 선재하는 이, 위하는 이의 전형이신 주님을 뒤따를 수 있기를 희망하며 세례자 요한의 전구를 청해봅니다.
[성경, 다시 보기] 놀면 뭘 하나
이 제목은 어느 텔레비전 방송에서 방영하는 놀이 프로그램의 한 제목이다. 이 글을 쓰라고 부탁받은 후, 첫 번째 글인데, 제목을 꼭 붙여달라기에 어떤 제목을 붙일까 하고 겨우 생각해 낸 것이 이것이다.
은퇴 후, 아니 성사전담 신부가 된 지, 벌써 5년째 접어든다. 첫 번째 1년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쉬었다. 그러면서 생각해 낸 것이, 나에게 주어진 이 빈 시간을 어떻게 지루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그리고 재미있고 시간이 빨리 가고 또 보람되게 보낼 수 있을 건지를 생각해 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나에게 있어서는 “배운 도둑질”인 성서 공부다.
그 가운데서도 성경 번역이다. 이미 우리말로도 가톨릭에서도 개신교에서도 여러 번역들이 있는데, 또 뭘 새삼스럽게 변역을 하느냐고 누가 짜증스러운 핀잔의 말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이란 세대를 거치면서 그 뜻이 변하기에 그렇고, 또 완벽한 번역이 있을 수 없기에, 기회가 닿는 대로 자꾸 새롭게 더 나은 번역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옛날 어느 선배 신부님의 말이 생각난다. 번역은 반역이다. 이 말은 번역이 얼마나 그 원문의 뜻을 잘 반영할까 하는 의구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유학 시절에 있었던 일이다. 내가 살았던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의 Cansianum 신학교 기숙사에는 교구 신학생들이 사는 기숙사와는 달리,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신부, 신학생들이 많이 살았는데, 많을 때는 23개국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성탄절이 되면, 각국 나라 학생들에게 자기 나라의 성탄 노래를 불러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40여 년 전 그때 우리는 우리 고유의 성탄 노래가 없었고, 그들이 우리말을 모르기에, “고향의 봄” “오빠 생각”등을 불렀다. 그런데 한국 신부, 신학생들이 눈이 휘둥그레지고 놀란 일이 일어났다. 인도 신부, 신학생들이 그들의 성탄 노래를 부를 때였는데, 우리 귀에는 흡사 “염불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중국말로 불경을 번역할 때, 그 산스크리트 경전의 운율도 그대로 살려서 따온 것이 아닐까?
광주 대신학교 재학시절 도서관에서 읽었던 글이 생각났다. 불경을 “산스크리트” 인도말에서 중국말로 번역했을 때 일곱 단계를 거쳤다고 한다. 1) 초벌 번역: “번역은 반역이다”란 말을 늘 염두에 둔다. 2) 문법: 어느 쪽의 문법을 따를 것인가? 예: “나는 학교에 간다”라고 해야 할지, “나는 간다 학교에”라고 해야 할지. 3) 어순: 원문의 어순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지만, 관계문일 경우 우리 말은 관계문이 먼저 나오지만, 희랍말(그리스)이나 외국말은 관계문이 뒤에 나온다. 4) 가능하면 같은 단어 사용. 예: “아가페”를 “사랑”이라고 번역했으면 이 단어가 나올 때마다 “사랑”이라고 번역한다. 5) 가능하면 단어의 길이가 같게. 6) 운율: 산스크리트로 읽을 때와 중국말로 읽을 때 얼마나 비슷한가? 7) 되번역: 중국말 번역을 산스크리트어로 되번역했을 때, 얼마나 원문과 같을까?
이번에 새롭게 번역을 시도하는 것은 이 일곱 단계를 늘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3), 4) 그리고 7)이다. 가끔 이런 생각도 든다. 옛말에 “노니 장독 깬다”는 말이 있다. 가만있으면 편한 것을, 요란스럽게 일을 내어, 귀한 장독이나 깨뜨리지나 않나 하는 염려에서 하는 말이다.
[성경, 하느님의 말씀] 성경, 세상과 인간을 비추고 이끄시는 하느님의 말씀
태초에 하느님께서 온 세상과 피조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큰 뱀들, 소위 고대 신화 속의 용 또는 레비아탄에 비길 수 있는 존재들 또한 있었습니다(창세 1,21). 그들을 두고 하느님께서는 분명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십니다(창세 1,25). 그런데 하느님의 이 말씀은 성경의 또 다른 이야기에서 일련의 모순을 마주하게 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서 및 지혜 전통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그 큰 뱀들을 적대하시고 패퇴시키시는 하느님을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사 27,1; 51,9; 에제 29,3; 32,2; 욥 7,12; 시편 74,13). 사실, 이보다 더 큰 모순이 성경 내에 있습니다. 바로 사람의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뒤 ‘참으로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과 함께 하늘과 땅의 질서를 세우십니다(창세 2,1). 이어서 거룩한 시간을 세우시며 당신의 창조를 완성하십니다(창세 2,2-4ㄱ). 이렇듯, 아무 죄 없이, 은총 속에 태어난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게 됩니다. 뱀이라는 유혹자의 손에 이끌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창세 3장).
왜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대적할 존재를 창조하시고 보시기 좋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왜 인간은 은총을 누리면서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까? 어찌하여 지고선至高善이신 분께서 악의 실존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느님과 세상-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눔으로써 명약관화하게 해결되는 의문입니까? 아니면 설마 몇몇 무신론자들의 푸념처럼 하느님께서 악을 상대로 무력하시기라도 한 것입니까? 이 모순점들에 대해 단 하나의 ‘정답’을 제시할 수 있는 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 먹은이라 하겠습니다.
허나 굳이 그 열매를 따 먹지 않은 이에게도 자명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이 모순점들을 전하는 성경의 설화적 현실이 우리의 현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섭리하신다고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지금 이 시대,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 적대시되는 일들(예: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사람들이 윤리-도덕적인 삶을 살아가기는커녕 부모 자식 간에 반목하고, 간음을 저지르고, 남의 소유를 도둑질하며, 넓은 의미에서든 좁은 의미에서든 살인을 저지르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 모두는 타인을 상대로 창세기의 아담-하와이면서 동시에 뱀일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의 이야기는 우리네 현실에 대한 상징이 되어줍니다.
따라서 성경은 그저 모든 것이 하느님 뜻에 따라 잘 될 것이라는 추상적인 낙관주의에서 비롯된 하느님 사랑의 일원론(一元論)을 비루하게 늘어놓지 않습니다. 말씀 그 자체이신 분께서 이루시는 강생의 신비에 따라 성경은 그분께서 실제 살로 취하신 인간의 얼굴과 그 가운데 천막을 세우신 세상(요한 1,14)에 대한 대조 그림을 내놓음으로써 자기 본분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그 대조 그림과 우리 현실 사이의 ‘연속성 가운데 비연속성’을 이루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앞으로 1년간, 1달에 한 번 쓰일 이 칼럼은 하느님 말씀으로서 성경이 조명하는 인간 군상의 민낯과 그 민낯을 마주 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풀이할 것입니다. 그로써 인간은 창조주 하느님에게서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늘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immanent), 우리와 다르신(transcendent) 하느님을 지향하기를 요청받는 존재로 조명될 것입니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즈카르야서
즈카르야서는 14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예언서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분명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각각이 이야기하는 바와 주목하고 있는 내용이 다른 것을 미루어 볼 때 한 명에 의해서 작성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먼저 1-8장은 제1 즈카르야서로 이또의 손자이며 베레크야의 아들인 즈카르야가 다리우스 제이 년 여덟째 달, 즉 BC 520년 10-11월경부터 BC 518년 11월경까지 2년간 활동하면서 예언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9-14장은 제2 즈카르야서로 제1 즈카르야서와 달리 성전건축에 대한 태도가 회의적이며, 당시 주요 인물이었던 즈루빠벨이나 예수아에 대한 언급이 없고, 마지막 때에 대한 종말론적 전망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묵시묵학이 이스라엘에 자리한 즈음인 BC 3세기경에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제1 즈카르야에서 살펴본 즈카르야의 활동 시기는 하까이 예언자의 활동 시기와 겹칩니다. 따라서 당시에 가장 중요했던 과제는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서 하느님의 집을 마련하고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즈카르야는 8개의 환시를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환시에 앞서 먼저 1장 2-6절에서 즈카르야는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지난 시간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죄와 악에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던 일들을 상기시키신 뒤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시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올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장 7절-6장 15절은 8개의 환시를 전해줍니다.
① 1장 7-17절은 첫 번째 환시로서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말을 탄 기사가 세상을 둘러본 뒤 세상의 평온함을 하느님께 전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는 하느님께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에게 진노를 이제 거두고 자비를 베풀어주실 것을 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의 천사에게 당신이 예루살렘과 시온에 대한 열정과 동정심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아직도 태평스럽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 민족들에게는 분노하고 계심을 알려준 뒤 당신의 성읍들을 향한 축복을 약속해주십니다.
② 2장 1-4절은 두 번째 환시로서 네 개의 뿔과 대장장이 네 명이 등장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대장장이를 통해서 네 개의 뿔들을 없애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시고자 사용하셨던 이스라엘 민족의 적들을 하느님께서 이제 물리치시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백성으로 축복 속에서 살아가게끔 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③ 2장 5-9절은 세 번째 환시로서 측량줄을 쥔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게 됩니다. 이때 주님의 천사는 예루살렘에 사람들과 짐승들이 가득하게 되어 예루살렘은 성벽 없이 넓게 자리 잡게 될 것이며, 대신 하느님께서 친히 예루살렘의 불 벽이 되어주시고 그 안에 머무시면서 영광이 되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세 번째 환시 이후 2장 10-17절에서는 사방에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시온으로 모으시며 당신이 함께 머무르심으로써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온전한 회복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이 선포됩니다.
④ 3장 1-10절은 네 번째 환시로서 예수아 대사제에 대한 환시가 전해집니다. 사탄은 예수아 대사제를 고발하려고 하지만 주님의 천사가 나와 예수아 대사제를 변론합니다. 그리고 그에게서 허물을 치운 다음 깨끗한 터번과 예복을 입힌 뒤 대사제로서의 예수아의 권위를 들어 높여 줍니다.
⑤ 4장 1-14절은 다섯 번째 환시로서 등잔대와 등잔대 곁에 있는 두 올리브 나무에 대한 환시가 등장합니다. 등잔대는 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곱 개의 등잔 부리가 있는 등잔대 머리에는 기름 그릇이 있는데 그 그릇에는 일곱 개의 등잔이 있습니다. 등잔대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며, 일곱 개의 등잔 부리는 완전성을 상징하는 7이라는 표정을 통해 온 세상을 온전하게 돌보시는 하느님의 통치를 드러냅니다. 등잔대 옆 두 올리브 나무에 대한 물음에 천사는 올리브 나무는 등잔에 기름을 제공하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 갈 성별된 두 사람을 뜻한다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말하는 성별된 두 사람이란 현재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있는 정치적인 지도자 즈루빠벨과 종교적 지도자인 예수아를 뜻합니다. 즈카르야 예언자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하까이 예언자 역시 즈루빠벨과 예수아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전하지만 즈루빠벨에 대한 신탁으로 예언서를 끝맺음으로써 즈루빠벨의 다윗 가문에 더 주목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예수아를 즈루빠벨과 동일한 위치로 이야기함으로써 이제 단일 왕정국가의 형태가 아닌 종교적 공동체로 살아가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대사제의 역할이 커지게 된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있습니다.
⑥ 5장 14절은 여섯 번째 환시로서 온 세상에 내릴 하느님의 저주가 담긴 날아다니는 두루마리가 등장합니다. 주님의 천사는 도둑질 하는 자와 거짓으로 맹세하는 자, 즉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⑦ 5장 5-11절은 일곱 번째 환시로서 뒤주 위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는 온 땅에 퍼져 있는 죄악으로서, 주님의 천사는 여자를 뒤주 속으로 밀어 넣고 봉인합니다. 그리고 날개가 달린 두 여자가 나타나 뒤주를 신아르로 옮깁니다. 신아르는 창세기 10장 10절, 이사야 11장 11절, 다니엘서 1장 2절에서 이야기하였던 것처럼 하느님을 거슬러 권력을 탐하는 대제국을 나타냅니다.
⑧ 6장 1-8절은 여덟 번째 환시인데 네 병거에 대한 환시로서 각각의 병거들은 각기 다른 색을 지닌 건장한 말들이 이끌고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뵙고 난 후 길을 떠나는 하늘의 네 바람을 상징합니다. 천사는 북쪽 땅으로 떠난 말들이 하느님의 영을 북쪽 땅에 편안하게 자리 잡게 했다고 전하는데, 여기서 북쪽 땅은 바빌론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는 6장 9-15절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유배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데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예수아에게 왕관을 씌어주면서 주님의 성전을 마련하는 새싹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대사제에게 왕직이 수여되었고, 이로써 사제직과 왕직을 두루 갖춘 지도자가 이스라엘을 이끌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제1 즈카르야서의 마지막인 7-8장은 단식에 대한 참된 의미와 메시아 시대가 주는 행복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이 전해집니다. 자신들만을 위한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을 마음에 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회개의 열매로써 공정과 정의를 베풀고 자애와 동정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살피라고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시온을 향한 열정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메시아 시대에 모든 백성이 함께 모여 기쁨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제2 즈카르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먼저 9-11장은 메시아의 도래에 대한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9장에서는 이방 민족들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신탁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선언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며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메시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0장에서는 거짓 예언자들과 목자들로 인하여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통치자를 세워주시어 적들과 맞서 싸우게끔 하시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11장에서는 양 떼를 착취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고발하시고 저주를 내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양 떼를 돌보라는 소명을 받은 예언자는 나쁜 목자들을 대신해서 ‘호의’와 ‘일치’라고 새겨진 지팡이를 들고 양들을 돌보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용한 목자들이 불성실하게 임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그만두게 한 뒤 ‘호의’라고 적혀 있는 지팡이를 부러뜨립니다. 그리고 더이상 양들을 돌보지 않기로 하고 양 장사꾼들로부터 그간의 일에 대한 삼십 세켈의 품삯을 받습니다. 삼십 세켈은 헐값이었기에 이를 성전 금고에 넣고 ‘일치’라고 적힌 지팡이도 부러뜨립니다. 이어서 ‘호의’라는 지팡이를 부러뜨린 것은 하느님께서 민족들과 맺으신 계약이 깨어짐을 의미하며, ‘일치’라는 지팡이가 부러진 것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관계가 깨어진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제2 즈카르야의 전반부는 하느님의 고발과 저주라는 어두운 전망으로 끝이 납니다.
12-14장으로 이루어진 제2 즈카르야서는 예루살렘의 종말론적인 재건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12-13장에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구원이 선포되면서 ‘찔려 죽은 이’를 위한 애도가 울려퍼집니다. 찔려 죽은 이는 다윗 집안 사람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찔려 죽은 이와 동일시 하십니다. 찔려 죽은 이를 바라보며 사람들은 죄를 뉘우치고 슬피 울게 되며, 이로써 다윗 집안과 예루살렘의 모든 죄와 부정이 사라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모든 거짓 예언자와 더러운 영을 치우실 것이며 남은 자들을 당신 백성으로 정화하십니다. 이처럼 찔려 죽은 이는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제2 즈카르야서 마지막인 14장은 주님의 날을 전해줍니다. 주님만이 아시는 주님의 날이 다가오면 주님께서 친히 앞장서 당신을 반대하는 민족들과 싸우실 것이고, 예루살렘에서 마르지 않는 생수가 솟아오를 것이며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온 세상의 임금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사람들은 모두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여 초막절, 즉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내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셨던 하느님의 영광과 다스리심의 축제를 거행할 것입니다.
제1 즈카르야서가 성전 재건과 관련한 구체적인 하느님의 환시를 전해주고 있다면, 제2 즈카르야서에는 성전 재건보다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중심에 자리합니다. 그리고 즈루빠벨이나 예수아와 같은 지도자가 아니라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시는 분’(9,9), ‘착한 목자’(11,4-7), ‘찔려 죽은 이’(12,9-14)와 같이 배척당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신비로운 인물이 중심에 등장합니다. 제2 즈카르야가 전하는 신비로운 인물은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고 있는 전통적인 메시아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수난과 죽음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씻고 구원으로 이끄는 메시아의 모습은 신약에서 만나게 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리길재 기자의 성경에 빠지다] (79)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믿음으로 구원받고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여라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이하 갈라티아서)은 초대 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도적 권위와 저자 문제에 관해 논란이 된 적이 없는 서간입니다.
기원전 3세기께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남부 지방,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골 지역에 살던 켈트족들이 안키라(오늘날 튀르키예 수도 앙카라)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지중해, 내륙으로는 카파도키아, 북으로는 흑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이주해 살았습니다. 훗날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이 지역을 갈리아인들이 사는 곳이라 해서 헬라어로 ‘Γαλατια’(갈라티아)라 불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제1차 선교 여행 때 로마의 속주인 갈라티아 남쪽 피시디아·리카오니아·프리기아 등 여러 지역에 복음을 선포합니다.(사도 13,14-14,25) 그는 또 제2차 선교 여행 때 병에 걸려 갈라티아 지방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갈라티아 북부 지역 곧 카파도키아와 흑해 사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도 세우게 됩니다.(사도 16,6)
아울러 바오로 사도는 제3차 선교 여행(53~58년)을 시작하면서 갈라티아 지방과 프리기아를 차례로 거치며 모든 제자에게 힘을 북돋아 줬습니다.(사도 18,23) 이를 근거로 어떤 이들은 갈라티아서가 49~53년 사이에 쓰였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대부분 성경학자들은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에서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을 작성(57~58년)하기 몇 개월 전(56~57년께)에 갈라티아서를 썼을 것으로 봅니다. 학자들은 그 근거로 구원론과 의화론 같은 두 서간의 핵심 내용이 믿음·복음·구원·의화 등 비슷한 어투와 용어로 설명되고 있음을 제시합니다.
당시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에서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유랑(떠돌이)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강요해 마치 코린토 교회처럼 큰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3,2-3; 4,21; 5,4) 아울러 코린토 사람들처럼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도 자유를 남용하면서 도덕적으로 방종한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세례받기 이전 행했던 정령(精靈)들을 섬기는 미신 행위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4,3.9)
이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로 복음에 충실할 것을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권고하기 위해 갈라티아서를 씁니다. 헬라어 신약 성경은 ‘Προs Γαλαταε’(프로스 갈라테), 라틴어 대중 성경 「불가타」는 ‘Ad Galatas’,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펴낸 우리말 「성경」은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으로 표기합니다.
갈라티아서는 6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인사말’(1,1-10)과 ‘바오로의 사도직’(1,11-2,10), ‘바오로의 복음’(2,11-21), ‘구원 역사에서 믿음과 율법’(3,1-4,7), ‘종살이로 되돌아가지 말라는 권고’(4,8-5,12), ‘참자유에 대한 가르침’(5,13-6,10), ‘마지막 권고와 축복’(6,11-18)으로 구분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 인사말을 통해 갈라티아 지방의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사도직 활동의 원천이며 자기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라고 상기시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이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구원은 모든 이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며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들이 할례의 의무를 질 필요가 없다고 분명히합니다. 이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공식 인정한 복음의 진리라고 일깨워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 역사에서 드러나는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먼저,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됐는데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축복이 그리스도에게 전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전해지기 때문에 약속된 구원의 축복과 성령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게 되고,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다만 감시자 노릇만 했다고 합니다.(3,15-25)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 역사는 사람들이 세상의 종살이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참자유로 성령을 통해 건너가게 해 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덧붙여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마르 12,31; 레위 19,18 참조)고 하신 주님의 계명으로 요약된다면서 육의 욕정과 욕망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남의 짐을 져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과 선행을 실천해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참자유라고 가르칩니다.
끝으로 바오로 사도는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으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됐다며 이 새 창조에서 인간은 성령을 따라 살아가기에 율법에서 해방된다고 강조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