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6. 때가 찼을 때의 기도 ① (「가톨릭교회 교리서」 2598~2606항)
내 뜻을 품고 주님 뜻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기도
기도는 방향이 있습니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에 다가가듯 거룩하신 주 예수님께 가까이 가는 것”(2598)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듯이 하느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니 기도는 하늘로 오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땅만 돌아다니면 기도하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 생활 안에서 기도의 올바른 방향도 알려주셨습니다.
살레시오회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는 수도회에 들어와서 종신서원을 앞두고 공황장애까지 올 정도로 몸이 심하게 안 좋아졌습니다. 수도회 장상은 집에 돌아가서 건강이 좋아지면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울부짖으며 빨리 건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3년이 되는 때에는 병이 나을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건강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화가 너무 나서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이제 다 내려놓겠습니다. 저를 죽이든 살리든,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사제가 되든 안 되든 수도자가 되든 안 되든 상관없습니다. 더 이상 바라지 않겠습니다. 당신 손에 모든 것을 맡기겠습니다.”
그러자 한 달 만에 기적처럼 몸이 좋아지기 시작하였고 두 달 만에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어 수도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물론 청하는 것입니다.(2604 참조) 하지만 이 청함은 주님의 뜻 안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내 뜻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내 뜻을 품고 주님 뜻 안으로 뛰어드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루카 22,42)라고 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자기 증여는 동일합니다.”(2605) 자기 증여란 내 뜻을 주님 뜻 안에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도는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지니신 충만한 사랑의 마음으로 성부의 ‘심오한 뜻’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의로 집약됩니다.”(2603)
그렇다면 내 뜻을 어떻게 주님 뜻에 봉헌할 수 있을까요? ‘감정’이 중요합니다. 자녀들은 부모가 장난감이나 과자를 사주지 않아도 결코 이러한 감정을 잃지는 않습니다. 바로 ‘감사’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이 감정은 더욱 커집니다. 감사하고 있다면 그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때가 차 드리신 기도의 새로움”은 바로 “자녀다운 기도”(2599)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라자로를 살리실 때도 언제나 감사와 찬미가 그 바탕을 이룹니다.(2603-2604 참조) 먼저 당신을 아들로 삼아주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려야 그분을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먼저 인정해드릴 때 인정받습니다. 내 뜻대로 그분을 움직이는 것이 아닌 내가 그분의 자녀로 인정받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 바탕 없이는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청하고 싶은 것을 안고 그분 품에 뛰어듭시다. 내가 품은 청원을 나 자신을 봉헌함으로써 그분 뜻 안에서 거룩하게 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기도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강생하심으로써 인류를 완전히 떠맡으셨기 때문에, 기도에서도 사람들을 떠맡고 계시며, 당신 자신을 성부께 바치심으로써 그들을 또한 성부께 봉헌하신다.”(2602)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7. 때가 찼을 때의 기도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607~2616항)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
옛날에 한 수사가 올리브기름이 필요하여 올리브 묘목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이 연약한 뿌리가 자랄 수 있는 비가 필요하니, 단비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주께서는 단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그 수도자는 이어서 “주여, 이제 태양이 필요합니다. 주께 기도드리오니 해를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검은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오! 주님, 이 나무를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서리가 필요하겠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그 작은 나무에는 서리가 앉아 번쩍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웬걸요, 저녁에는 죽어버렸습니다. 작은 묘목에 그렇게 잦은 일기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 수사는 동료 수사의 방을 찾아가서 그의 이상한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동료 수사는 “나도 역시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심어 키우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그런데 보십시오! 나는 나무를 하느님께 맡깁니다. 그랬더니 잘 자랍니다. 그분은 나 같은 사람보다 그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 수사의 기도 문제점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심을 믿지 못한 것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일일이 청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자기 올리브나무를 죽게 내버려 둘 분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반면 두 번째 수사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니 분명히 올리브나무가 잘 자라게 해주실 거야!’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첫 번째 수사처럼 기도했다면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 수사처럼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 안에서 기도하는 것”(2609)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믿음은 (중략) 자녀로서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260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받을 수 있다고 믿으셨고, 우리에게도 그러한 “자녀다운 대담성”(2610)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자녀에게 아끼는 부모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기도하려면 하느님 자녀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도록 예수님께서 기도 안에서 하시는 세 역할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님은 “우리의 사제”가 되어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이어주시고, “우리의 머리”로서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우리의 하느님”으로서 우리가 하느님 본성을 갖게 하십니다.(2616 참조) 이런 마음으로 기도한 사람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물 위는 하느님만이 걸으실 수 있는데, 베드로는 하느님 자녀의 대담성을 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내 몸의 머리로 믿고 기도하게 된 것이 신약의 새로움입니다. “새로운 기도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입니다.”(2614) 예수님은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다는 말은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놀라고 기뻐하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지체이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는 온전히 한 인간입니다”(795)라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아드님의 기도를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자녀로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실 것을 믿읍시다. 그러면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마르 11,24 참조)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조부모와 노인의 날, 우리 모두를 위한 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던 2021년 ‘조부모와 노인의 날’(World Day for Grandparents and the Elderly)을 제정하셨습니다. 올해로 3번째 맞이하는 이 기도의 날은 교회의 소중한 희망이자 표징인 젊은이와 노인이 서로를 위한 만남과 기도를 통해 인류 가족의 유대를 증진하고, 모든 세대를 아우르며 연결하고자 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날입니다. 특히, 올여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릴 세계 청년대회를 앞두고, 교황님은 젊은이들에게 조부모와 혼자 사는 노인을 찾아뵈라고 힘주어 권고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늙어서도 열매를 맺으리라”(시편 92[91],15).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 미칩니다”(루카 1,50). 이 성경 구절들은 올해까지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 담화문의 제목입니다. 얼핏 보기에, 이 성구와 담화문들은 모두 조부모와 노인만을 대상으로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부모와 노인’이라는 대상을 ‘젊은이’ ‘장애인’ ‘가난한 이’ 같이 다른 대상으로 바꾸어도 의미는 똑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노인을, 그리고 젊은이, 장애인, 가난한 이를 유기하거나 그들을 삶의 끝자락으로 내몰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조부모와 노인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전철역마다 교통약자를 위해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빗대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는 교통약자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여러 이유로 그것을 이용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약자를 위한 배려는 그들만을 위한 혜택으로 그치지 않고, 결국 우리 사회의 모든 이에게 돌아오게 됩니다. 무질서한 착취로 인류 가족과 우리 공동의 집이 위협을 받는 오늘날, 특별히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아 주님의 자비가 내려 우리 모두 “온유함의 혁명”(제2차 조부모와 노인의 날 교황 담화문)을 이뤄내는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톨릭 신학21] 그리로부터 오시리라 믿나이다 : 파루시아 (1)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이 희망은 부활 신앙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룹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곧’ 오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그 ‘시간’은 지체되었고, 예수님의 이 ‘오심’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말로 ‘다시 오심’, ‘재림’이라고 표현하는 이 ‘사건’은 종말, 그리고 심판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킵니다. 신경에서도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실 그리스도를 마주할 생각에 설레고 기뻐하기보다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더 크게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재림에 대해 좀 더 이해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 하면 재림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시는 설레는 사건일 테니까요.
‘재림’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Ɵα)입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사도 1,11에서 사용한 단어 ‘에르코마이(ερχομαι)’는 ‘다시’라는 수식어 없이 단순하게 ‘온다’를 의미합니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24회 등장하는데 대부분 서간문에서 사용됩니다. ‘여기 있다’, ‘현존하다’, ‘오다’라는 뜻의 동사 ‘파레이미(πƜρειμι)’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의 현존, 지금 여기에 있음, 혹은 ‘머물기 위해 옴’을 의미합니다. 파루시아는 ‘귀환’, ‘다시 오심’이라기보다는 ‘현존하심’, ‘오심’인 것이지요. 물론 지금 사용하는 ‘재림’이라는 단어가 이미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재림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마치 예수님이 부활 후에 ‘안 계시다가’ 언젠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서, 파루시아에 담긴 깊은 뜻을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은 루카 12,35-48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어떤 ‘시간’에 오실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또 루카복음 17장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파루시아는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어떤 ‘때’에, 혹은 시간의 마지막 ‘끝’에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 ‘때’를 단순히 앉아서 기다린다기보다는 혹은 수동적으로 ‘그때를 당한다.’기 보다는 파루시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이 ‘때’를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기 위해서는 파루시아의 의미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톨릭 신학22] 그리로부터 오시리라 믿나이다 : 파루시아 (2)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주님께서 어떤 ‘때’에 오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우리는 그 ‘때’를 향해 나아가야 할 텐데, 어떻게 해야 파루시아를 ‘향한’ 삶이 될까요?
아마 바오로 사도께서 코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하신 말씀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형제 여러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오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때”라는 단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리적 시간, 혹은 연대기적 시간을 가리키는 ‘크로노스(ΧρƼνοƲ)’가 아니라 ‘카이로스(ΚαιρƼƲ)’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카이로스는 질적 시간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9시부터 10시까지 강의를 듣는다면 크로노스의 시간은 1시간이지만, 강의의 내용이나 질에 따라 내가 체험한 시간은 5시간의, 혹은 무한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시간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본래 성경에서 사용한 그리스어는 ‘쉬스텔로(συστƝλλω)’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접는다’는 뜻으로, ‘짧아진다’는 파생적 의미가 있습니다. 깃발을 접어서 작게 만드는 것을 상상하시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파루시아가 일어나면, 곧 주님께서 오시면 내가 그때까지 짜던 나의 인생이라는 직물이 ‘접혀’ 주님 앞에 놓일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나의 삶 전체가 더 이상 물리적 시간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 안에 놓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 앞에 의미 있는 시간은 영원 안에서 높이 들어 올려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시간은 영원히 버려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루시아는 그냥 우두커니 기다려야 하는 사건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나의 삶의 모든 순간, 모든 상황에서 향해야 하는 사건입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매 순간, 오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분께 봉헌함으로써 나의 이 물리적 시간이 의미 있는 시간 곧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는 이렇게 매 순간이 파루시아를 향한 긴장 속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파루시아는 다가올 시간, 크로노스에 일어날 일, 그래서 교회가 그것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사건인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삶의 매 순간에서 바라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 안에서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도록 요청하는
사건입니다.
파루시아는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처럼 ‘주님의 현존’, ‘주님의 오심’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2천 년 전에 오셨던 것처럼 오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온 우주의 주인이심이, 그분의 권능, 선과 정의,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온 우주 안에 충만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오심은 ‘영광중에 오심’이고, 하느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이며, 구원의 궁극적이며 최종적인 완성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에게 파루시아는 기쁨이고 설렘이며 희망입니다.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226. 복음과 사회교리(「간추린 사회교리」 546항)
성숙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려면
라파엘: 회합을 하기 전에 같이 묵주기도를 바치면 어떨까요?
미카엘: 우와, 라파엘이 견진성사 받더니 다른 사람이 됐네! 기도를 하자고?
마리아: 좋아요. 신부님께서도 기도를 통해 지혜와 힘을 얻는다고 하셨잖아요.
스텔라: 바쁘지만 기도를 하면 마음과 생각이 맑아지는 것 같아요.
루치아: 기도를 하면서 우리가 성숙해진다고 생각해요. 같이 기도해요!
견진성사의 추억
견진성사를 받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필자도 그 감격을 기억합니다. 견진성사를 신앙적으로 성숙해지고, 그래서 어른이 되는 성사라 표현하지요. 비록 우리 노력이 미미해도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한 신비입니다. ‘정말 내가 어른이 됐나?’ 싶기도 하지만, 성사를 받고 나면 은총의 선물은 우리 안에 뿌리내립니다. 중요한 것은 그 선물을 통해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열매를 어떻게 맺을까요? 저는 여기서 어떤 영화의 한 대목을 떠올립니다. “만일 누군가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뿅’ 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영화 ‘에반 올마이티’)
성숙한 사람이 돼야
저는 ‘그냥 사랑만 주시면 안 되나?’ 하고 상상한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계절의 변화 속에서 과일과 곡식이 영글 듯 성장은 결과와 과정 모두가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사랑하고 인내하며 두려움에 맞서 용기를 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과정을 통해 성장합니다. 또한 아이가 자라며 어른스러워지고 철이 드는 것도 성장이겠으나, 완고한 내 자신이 깨어지고 변화를 겪는 것도 성장입니다.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고민하고 소중한 것을 깨달을 때 그 삶은 한 단계 성장한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올바른 선행을 촉구하는 「간추린 사회교리」도 인격적 성숙을 강조합니다. 성숙함은 양심과 깊이 연관되고(139항), 자녀 교육의 핵심이며(243항), 미성숙을 조장하는 것들을 식별해야 하고(360항), 개인과 공동체에 필수적입니다.(391항) 무엇보다 성숙함은 사랑과 신앙의 결실입니다.(581항)
기도는 그 자체로 목적
2000년 전 바오로 사도께서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라고 말씀하셨는데(필리 2,15) 세상과 사회는 항상 복잡합니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고 더욱이 각종 소셜 매체와 뉴스, 동영상이 많아진 현대사회는 올바름을 식별하기도 어렵습니다. 요즘은 AI를 통해 위조된 가짜 영상도 돌아다닙니다. 그럴수록 신앙의 가르침, 기도, 영성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기도는 간절한 바람을 위한 좋은 도구이기도 하나, 그 자체로 거룩한 목적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성숙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나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지혜를 얻을 것입니다.
“신앙과 삶을 결합시키려면 그리스도교 생활의 특징적 요소들이 일러주는 현명한 길을 따라야 한다. 그 길은 곧 준거인 하느님 말씀, 전례를 통한 그리스도교 신비의 거행, 개인기도, 영성 지도자 식별을 위한 특수 교육으로 심화되는 진정한 교회 경험, 사회적 미덕의 실천, 그리고 문화 교육과 직업 교육에 대한 지속적 노력 등이다.”(「간추린 사회교리」 546항)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농민 주일
오늘은 제28회 농민 주일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이날을 통해 농촌을 향한 관심과 기도 그리고 우리 모두의 생태적 회개를 촉구합니다.
1993년 우리 농촌은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타결과 쌀 시장 개방으로 커다란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에 같은 해 12월,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은 농업과 나라를 위한 기도회와 함께 고통받는 농민들을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한국 주교단은 이듬해 1994년 춘계 주교회의에서 “농민들의 어려운 처지에 공감해 우리 농민과 농토 및 농업을 살리는 일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결정함으로써, 교회 차원의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996년부터는 매년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정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 사회는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최중심에 두고 살아왔고, 그 결과 경제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농촌의 희생이 있습니다. 농촌은 만성적인 고령화와 저소득의 늪에 시달려 왔으며, 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때마다 개방 분야가 되어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국내 곡물자급률은 해가 갈수록 떨어져 이제는 20% 선이 붕괴한 것으로 추정되고, 이는 OECD 국가 중 최하위 수준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은 어느덧 30년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농민회 회원들은 세상의 논리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산업화와 화학화를 거슬러 친환경 유기농·무농약 농법을 지켜온 것입니다. 도시 본당의 소비자들도 우리농 매장을 통한 직거래로 농민들과 교류하고 연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농촌살리기는 농촌과 도시가 함께 생명을 보전하는 공동체 운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전 지구를 덮쳐오는 기후재앙 속에서 가톨릭농민회의 친환경 농법은 그 자체로 기후 위기에 대응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산업화한 농업은 화학비료 사용으로 탄소를 배출하고, 제초제와 살충제는 토양을 오염시킵니다. 반면, 친환경 농법은 무엇보다 생물 다양성을 보존하고 온실가스를 포집해 땅으로 되돌리는 효과를 냅니다. 소비자 측면에서도 우리 땅에서 나온 농산물을 직거래하는 것은 푸드마일리지(먹을거리가 생산자의 손을 떠나 소비자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이동 거리)를 줄여 탄소를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니 우리농촌살리기 운동은 도농 간의 생명연대와 창조질서 보전에 이바지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날 세상의 많은 부분이 경제성과 효율의 논리에 따라 폐기되고 버려집니다. 그러나 농업의 가치는 경제성과 효율로만 따질 수 없습니다. 묵묵히 가치를 지켜나가는 농촌에 우리 모두의 응원과 기도가 더해지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