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금자리
허필현
이 집에 이사 온 후 여덟 번째 맞이하는 봄이다. 환하게 열린 문으로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동그랗게 말린 꼬리가 빠질까 두렵다. 외로웠던지 눈물을 그렁그렁한 채로 애타게 쳐다본다. 장바구니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우리 집에 입양해 온 지 삼 년이 지났다. 이 녀석도 든든한 가족이다.
오랜 연예 끝에 결혼했다. 첫 보금자리를 송현동에 마련하였다. 남편이 총각 때 사용하던 자취방이다. 둘이 사는 살림이라 많은 게 필요 없다. 좁은 방이고 매캐한 연탄가스도 맡아야 한다. 사치품이라고는 피아노 한 대, 거기서 부부의 사랑을 싹틔웠다. 그 생활도 잠시다. 곧 이사하게 된다.
우리는 시외버스정류장 부근에 어렵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신접살림을 시작했던 좁은 곳에 비교하면 옮긴 집은 대궐 같다. 시누이, 시동생도 우리 식구가 되었다. 남매를 맡긴 시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컸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탄불을 갈고 석유풍로를 사용하여 음식이나 빨래 삶는 일 따위를 하였다. 곧 산모가 되어 부른 배를 내밀고 계단을 오르내린다. 직장과 가정 일을 같이하는 형편이라서 힘이 든다. 궁색한 살림에 먹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때까지 파인애플을 먹어본 적이 없다. 오천 원이라는 많은 돈을 주고 한 덩이를 샀다. ‘에고, 퉤퉤’ 덜 익은 것이었다. ‘시원한 수박 한 덩이 샀으면 네 식구가 실컷 먹을 텐데.’하고 후회해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곳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철 따라 이동하는 철새처럼 보금자리를 몇 번이나 더 옮겼다. 남편은 자전거로 직장에 출퇴근하고 나는 시외버스를 타고 다녔지만 젊었고 사랑하는 이유로 모든 고생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 좁은 곳에서 아이를 기르고 시동생, 시누이와 같이 사는 일은 어려웠다. 드디어 시누이는 직장을 찾아 떠났다. 함께 살던 정이 마음을 아리게 하지만, 내 짐을 든다 싶어 기쁘다.
그런 기분도 잠깐이었다. 더운 여름날 거실에 드러누운 네 남자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여보, 물.” “엄마, 밥.” “형수님, 제 안경 못 봤어요?” 요구 사항도 많았다. 모처럼 쉬는 날이면 네 남자의 치다꺼리로 분주했고 몸은 파김치가 되고 만다.
해가 갈수록 아들의 덩치도 커졌다. 사는 아파트가 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앞 베란다가 탁 트이고 지하철역이 가까운 넓은 곳으로 옮겼다.
“이쪽에 누우니 끝이 안 보이네”
이사하기 전날 새집 거실에 누워서 행복을 주고받으며 기뻐했다. 행복은 집의 평수와 관계없이 다른 집보다 참기름 한 숟갈 더 많을 것이라고 한다. 그 말도 내게는 예외였다. 처음 가져 본 넓은 집에서 어찌 행복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마치 이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은 기분이다. 드디어 시동생도 공무원이 되어 부모님 집으로 들어갔다.
현재의 보금자리로 옮겼다. 정말 대궐 같은 우리 집이다. 동네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직장까지의 통근 거리는 멀었지만, 마음은 예쁜 풍선을 타고 둥둥 떠다녔다. 캄캄한 밤에도 씩씩하게 잘 다녔다.
“엄마, 잔소리 심해서 못 살겠어요. 제 마누라 들어오면 이러시면 안 돼요.” 둘째 아들의 한마디에 웃음보가 터졌다.
“정말 웃겨, 몇 살 안 된 녀석이 벌써 제 마누라 걱정 하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여물어갔다.
신도 우리의 삶을 질투했는지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을 하늘나라로 데리고 갔다. 그가 없는 빈집에서 헛헛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채워질 것 같지 않았다. 아픈 시간은 너무 느리게 흘러간다.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우울증을 불러올 때쯤 새 가족이 생겼다.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했다. 앙증맞은 재롱을 보면서 조금씩 웃는 날이 많아졌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서일까 좋은 일이 연달아 생겼다. 새 며느리까지 들어 온 것이다. 아들 내외가 강아지를 쳐다보고 좋아한다. “네가 우리 집 꽃이다.” 깔깔거리는 소리가 집안에 가득 찼다. 강아지도 덩달아 꼬리를 흔들어댄다.
강아지와 함께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씁쓸한 내 심정을 누가 알겠는가? 어서 손주를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은 며느리도 데리고 와서 나의 보금자리를 더 포근하게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