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06
10월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연중 제2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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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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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dckuyTs7b0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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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총기 있을 때,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시기 바랍니다!>
10월 묵주기도 성월인 동시에, 오늘 10월 7일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다른 날보다 더 지극정성으로, 더 온 몸과 마음을 다해 묵주기도를 바쳐봐야겠습니다.
평소 묵주기도 바치면서 지향을 두고 바쳤는데, 오늘만큼은 묵주기도에 대한 응답의 유무를 떠나,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과 함께 또한 아들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는 마음으로, 기도 시간을 즐겨보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요즘 개인적으로 묵주 기도의 맛에 푹 빠져 살아갑니다. 세상 한적한 어촌 마을 피정 집, 묵주기도 바치기 얼마나 좋은 환경인지 모릅니다.
저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 좋아하는 장소에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해질 무렵에 피정 집 산책로를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그 맛이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모님,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내 인생에 아주 가까이 동행하고 계심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금보다 조금만 천천히 묵주기도를 바쳐보시라고 초대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일생을 천천히 묵상하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큰 은혜를 받으실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당부 드리자면, 이토록 은혜로운 묵주기도를 억지로 바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가장 괴로운 얼굴로 묵주 기도를 바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쁜 마음으로, 신나게 묵주 기도를 바쳐보시면 좋겠습니다.
의외로 많은 교우 분들이 바빠서 묵주기도 할 시간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입니다. 큰 착각입니다. 잘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묵주기도 한번 바치는데 걸리는 시간, 고작해야 10분 15분입니다. 하루 그 정도 시간, 우리 신앙의 모델이요 이정표이신 성모님 위해서,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서 시간을 낼 수 없단 말입니까?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지금은 너무 일이 많아서 나중에 은퇴하면, 좀 더 나이 들면 묵주기도 열심히 바치려고 합니다.” 여러분들 이거 다 거짓말이라는 것 아시죠? 지금 기도 안하시는 분, 나중에 절대로 못합니다.
나이 들면 기력이 쇠해지고 병 들면 기도하기도 힘들어집니다. 정신도 오락가락해지죠, 기도하는건지 자는 건지 분간도 못합니다. 환희의 신비 1단 했는데, 또 하고 또 하고...한살이라도 젊을 때,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총기 있을 때 묵주기도를 많이 바치시면 좋습니다.
묵주기도 바치기 참 좋은 절기입니다. 묵주를 손에 들고 과감히 산책을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면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아름다운 인생길을 묵상하면서 기쁨 충만한 얼굴로 묵주기도를 바쳐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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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y4BQxepqo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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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를 꾸준히 할 때 일어나는 일; 믿어진다>
오늘 복음은 어제 ‘주님의 기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내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임이 증명되고 자녀로서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을 받는 특권까지 누립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청원하는 내용에 집중해야지 그것을 통해 얻으려는 것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일단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녀도 원할 때 무언가 더 주고 싶어집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무언가 자신에게 꾸준히 청할 때 자녀가 자신을 신뢰한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무언가를 꾸준히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꾸준히 청하는 것은 약간 누군가를 괴롭히는 일이기에 꾸준히 청할 수 있으려면 상대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굉장해야 합니다. 따라서 꾸준히 청한다는 것은 이미 그만큼 하느님을 신뢰하고 있음을 증명하기에 하느님은 그런 자녀의 마음을 아프게 하실 수 없으십니다.
평생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조지 뮬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기도 노트에는 기도 제목들이 3천 페이지나 넘게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도 가장 많은 시간을 들여 기도했지만,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어렸을 때부터 같이 우정을 나누었던 5명의 친구들의 구원 문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다섯 명의 친구를 위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 한 사람씩 믿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믿는 친구가 두 사람 있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이 두 친구를 위해서 무려 52년간 기도했지만, 그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조지 뮬러는 노년이 되어서 자기 인생의 마지막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날 안 믿던 한 친구가 조지 뮬러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머지 한 친구는 믿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지 뮬러는 마지막 기도 제목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후 그때까지 안 믿고 있었던 한 친구가 뮬러의 죽음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뮬러가 자기를 위해서 52년간이나 기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죽은 바로 그해 그 소식을 들은 이 친구는 결국 신앙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고 나서 그 친구는 전 영국 땅을 순회하면서 “조지 뮬러 목사의 기도는 다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최후의 응답입니다. 당신의 모든 기도는 다 응답합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약 두 아이가 무언가 청하는데 한 아이는 그저 ‘찔러보는 식으로’ 이것 청했다가 저것 청했다고 하고, 또 한 아이는 하나가 이루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청한다고 할 때 누구의 청을 먼저 들어주시겠습니까? 자신께 신뢰심을 보이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청하면 그분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야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심은 기도의 ‘꾸준함’으로 증명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한 명, 한 명 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확고한 믿음이 있다면 한 번만 청해도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기가 두 발로 걷기 위해 수천 번 넘어지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꾸준히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변화를 느끼며 믿음이 함께 성장합니다. 아기들도 걸음마를 할 때 매번 똑같이 넘어지지 않습니다. 조금씩 발전합니다. 그렇게 믿음이 더해져 포기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얼굴에 인간미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격까지 괴팍하였습니다. 얼굴과 성격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생활도 아주 엉망이었습니다. 방탕 그 자체였습니다. 그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항상 문제만 일으켰습니다. 그는 누가 봐도 구제불능이었습니다. 그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 받은 부모의 학대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학창 시절에 당한 왕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원래가 이렇게 못돼먹은 존재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엉터리 같은 남자의 마음에 사랑의 온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게 된 아름답고 순결한 아가씨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온갖 사랑의 말로 고백했고 청혼도 했습니다. 용기를 내어 온갖 진심을 보여주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거절뿐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당신같이 험악하게 생긴 사람의 아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참 매몰찬 거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을 돌이키고자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무도회에서 흔히 사용하는 가면을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는 비싼 값을 치른 후 인자하게 생긴 얼굴의 가면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가면을 쓰고 다시 그녀에게 다가갔고, 청혼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여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달콤한 사랑의 말과 가면의 인자한 모습에 감동한 것입니다. 남자는 결국 결혼을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원래 선량함이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던 남자였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하던 여인을 신부로 얻게 되자 그는 달라졌습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신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열심히 일했습니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그 손님은 이 남자에게 좋지 않은 감정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자가 잠든 사이 그는 여자에게 진실을 말하였습니다. 가면 속에 감춰진 남편의 험악한 얼굴과 방탕한 과거의 추한 모습들을 낱낱이 폭로했습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진실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잠든 남편의 가면을 슬그머니 벗겨보았습니다. 순간 남편의 과거를 폭로했던 손님이 충격적인 표정을 지었습니다. 가면 속의 얼굴은 과거 그가 보았던 험악하고 비열한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살며시 미소 머금은 얼굴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그 표정은, 오히려 그가 쓴 가면의 얼굴보다 더 인자하고 푸근하게 변해있었습니다.
끈질기게 기도하면 좋은 점이 무엇이냐면 그러면서 “믿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좋으신 분임이 믿어지고 그래서 내가 청하는 것을 꼭 들어주실 것이 믿어집니다. 그렇게 나 자신도 더욱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변합니다.
저는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1997년 신학교 입학하는 해 1월 1일부터 계속 바쳐오고 있습니다. 연옥에 가지 않고 순교자의 지위에 올려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처음에 이 기도를 바칠 때 마음 한구석에서는 ‘설마!’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가고 10년이 지나면 ‘정말 그럴 수도 있겠는데?’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이 기도를 바치며 자신이 조금씩 변화됨을 스스로 체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완전한 믿음을 지니지 못합니다. 그랬다면 지금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더라도 자꾸 바치다 보면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조금씩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어지게 되고 믿어지면 못 할 게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청하는 것은 다 들어주실 것을 확고하게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기도 내용을 깊이 묵상하며 꾸준하게 바쳐야 하는 이유입니다. 젖을 줄 때까지 계속 ‘엄마!’를 외치지 않는 아기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칠 때마다 젖을 주는 엄마를 보면 아이는 그 대상이 엄마임을 더욱 확실히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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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1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5-13 :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한밤중에 온 식구와 잠자리에 든 벗을 깨워 자기가 필요한 것을 얻어낸 사람이 있다. 잠자리에 든 친구는 친구의 끈질긴 요구를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주무시지도 않고 우리를 깨워 기도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는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 그분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벗(요한 15,13 참조)이시기 때문이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9절) 하늘 나라는 게으르고 한눈파는 자들이 아니라, 그것을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이들에게 주어지고 발견되고 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의 문은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만 열리는 문이다. 기도와 올바른 삶 그리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노력해야 한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12절)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태 7,9)라고도 하신다. 여기서 생선은 믿음을 상징한다. 생선은 물세례를 연상할 수 있고 이 세상 파도에 상처를 입지 않는다. 반대로 뱀은 사람을 속여 하느님을 믿지 않게 만든다.
달걀은 희망을 상징한다. 앞으로 병아리가 생겨나듯 곧 눈에 보이리라고 희망하기 때문이다. 전갈은 희망의 반대이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필리 3,13) 나아가며, 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는 전갈을 경계해야 한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로마 8,24)
빵은 사랑을 상징한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1코린 13,13)이라 하였고, 음식물 가운데서는 빵이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돌은 그 반대이다. 돌처럼 단단하게 굳은 마음은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니까! 이것들이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당신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줄 아시는 그분이 우리에게 청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13절) 우리의 마음이 악에 휩쓸리기 쉽고 만유의 하느님과 달리 선에만 이끌리는 존재가 아니지만, 우리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듯이 그분께서는 성령을 주신다고 하신다.
여기서 성령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 들어감을 뜻하며 또한 성령의 은사를 가리킨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좋은 것이다. 그것을 얻는 사람은 가장 복되고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이다. 기도로 하느님께로부터 가장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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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의 자세’를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바랄 때, 줄곧 졸라 대는 지속적인 태도, 곧 ‘청하고, 찾고, 두드리는’ 간절한 마음을 지니라는 가르침을 전해 주십니다. 그러면 필요한 것을 얻고, 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도 함께 말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이러한 자세로 기도할 때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던가요? 하느님께서 응답해 주신 적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으신 적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두드리며’ 하느님께 기도를 드려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한 체험들은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기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하느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온전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는 하느님만이 모든 일을 온전히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무엇이든 가장 좋은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혹시 ‘뱀’이나 ‘전갈’은 아닌지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 눈에 좋게 보이는 것이 하느님의 눈에는 뱀과 전갈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늘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심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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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8)
이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루카 18,7-8ㄴ) 인간 세상에서는 친한 벗이라고 해도 줄곧 졸라 대야만 청을 들어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결코 ‘미적거리시지 않고 지체 없이’ 인간의 청을 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가르침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간청을 곧바로 들어 주신다면, 그냥 한 번만 기도해도 되겠다.” 인간들은,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 주신다면 오랫동안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아도 되겠다.”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들어 주시니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하여라.”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 우리는 ‘지체 없이’ 라는 말을, ‘곧바로, 지금 즉시’로 생각하는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지체 없이’라는 말은, ‘가장 좋은 때’ 라는 뜻입니다. 그 ‘때’는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때’와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가 다르다는 것인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그 ‘때’를 모릅니다. (기도하자마자 곧바로 응답을 얻는 경우도 있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기도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까, 포기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너희에게 주셨으니, 청하고 찾아서 얻어라. 또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열고 들어가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간절하게 청해야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또 우리가 애타게 두드려야만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이미 주셨고, 우리가 들어가기를 바라는 그 문을 이미 열어 놓으셨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고 계신다.’라는 말은,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기도’는 안 주시는 하느님께 달라고 졸라 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주신 그것을 잘 받는 방법이고, 문을 안 열어 주시는 하느님께 열어 달라고 졸라 대는 일이 아니라, 이미 열려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것은 이미 주신 것을 안 받는 것과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필리 4,6-7)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 안에서 기도한다면, 기도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를 얻게 됩니다. 그 평화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은총입니다. (어떤 절박한 상황에서, 기도를 시작할 때에는 울면서 기도했지만, 기도를 마칠 때에는 평화를 얻고 웃음을 되찾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그 평화는 기도에 대한 응답과 같습니다. 기도하면서 얻은 평화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우리는 그 힘과 용기로 절박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주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그런 체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이미 주셨다는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공감하기는커녕 반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얻기를 원하는 그것이 완전히 나의 것이 되기 전에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이미 주셨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고 있는 ‘가장 좋은 때’와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과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것’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음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1-13)
우리가 “하느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원하는 대로) 되지 않고, 완전히 다른 결과가 생겼을 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사랑이란, 달라고 졸라 대는 그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필요한 것을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은 ‘영적인 은총과 선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은총은, 또 기도의 응답들 가운데에서 최고의 응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 내가 원하는 그것만을, 원하는 때에 주셔야만 한다고 고집부리는 것은 철없는 아이가 생떼를 부리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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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뉴욕 양키스와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야구경기를 보았습니다.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선발투수는 한국의 유현진 선수였습니다. 유현진 선수가 잘 던졌고, 경기 결과는 토론토 불루제이스의 승리였습니다. 특정한 팀을 응원하지는 않았지만 한국 선수가 선발로 나오는 팀이 이기기를 바랐는데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관중은 뉴욕 양키스의 팬이었습니다. 안타깝게 그날은 뉴욕 양키스가 패하였지만 관중들은 경기의 결과보다는 경기를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하고, 두발로 걷고, 언어를 사용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사람과 동물의 차이를 또 하나 말한다면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측과 생각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결실을 얻으리라는 예측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것은 미래를 주관하는 분이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1571년 10월 7일 그리스도교 연합군은 그리스의 레판토 항구 앞바다에서 벌인 ‘레판토 해전’에서 이슬람 제국을 무찔렀습니다. 이 전투의 대승은 묵주 기도를 통한 성모님의 간구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신 덕분이라 여기고, 이를 기억하고자 비오 5세 교황은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훗날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저도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제안으로 2002년부터 빛의 신비가 묵주기도에 포함되었습니다. 이로서 묵주기는 예수님의 전 생애를 묵상할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환의의 신비는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에 대한 묵상입니다. 빛의 신비는 예수님의 공생활에 대한 묵상입니다. 고통의 신비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영광의 신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 또한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살기를 희망하는 묵상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낼 때입니다. 매일 저녁 7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혼자 할 때도 있지만 함께 할 때도 많았습니다. 본당 신학생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함께 하기도 하고, 교구 모임과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신학교에는 묵주를 들고, 기도를 하는 신학생들의 기도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그 기도는 신학생들을 지켜주는 힘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예방 주사를 맞는 것처럼 묵주기도는 신학생들을 악의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었습니다. 저도 묵주기도에 대한 작은 체험이 있습니다. 차를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하려고 차를 잠시 세웠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간에 큰 차가 제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차를 멈추지 않았으면 큰 사고가 날 뻔했습니다. 묵주기도를 시작한 것도 아니고, 막 하려고 했는데도 하느님께서는 제게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묵주기도의 매 단이 좋지만 저는 환희의 신비 2단 ‘마리아 엘리사벳을 찾아가심을 묵상합시다.’를 좋아합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가졌고, 엘리사벳은 아이를 가질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나이에 아이를 가졌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놀라운 표징이 일어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내비게이션도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면 우리를 목적지까지 안내해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청한다면,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청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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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성태 마태오 신부님]
동물들의 달리기 대회가 열렸는데 뜻밖의 경기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승자는 사자나 치타 표범도 아니었고 작은 개미였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이변을 취재하기 위해 많은 기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연습을 했기에 이런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개미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미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아무도 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답답해진 기자들은 고성능 최첨단 장비를 마련하여 개미의 대답을 듣기로 했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개미씨, 오늘 우승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과연, 개미가 뭐라고 말했을까요? 스피커를 타고 크게 들려온 개미의 대답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유머이긴하지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간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라, 그러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할 부분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수능이나 취업을 위해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좋은 결과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고, 운동 선수들은 좋은 기록과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정치인들은 모든 국민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정책을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한 가정의 가장은 가족들의 생계부양을 위해, 주부들은 가족의 건강과 편리한 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가만히 둘러보면 각자의 삶에서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이유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특별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에 삶의 목표를 두고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먼 길에 지친 한 여행자가 기후 특성상 한낮의 더위를 피해 한밤중에 친구 집에 도착했는데 문제는 피곤과 굶주림에 지친 여행자를 대접할 빵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던 팔레스티나 지방에서는 손님 대접을 하는 것을 마치 하느님의 천사를 대하듯이 하였습니다. 그래서 후하게 음식을 차려 대접을 하는 것을 그들의 신성한 의무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분의 빵이 하나도 없었던 주인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 밤중이었지만 염치불구하고 친구에게 빵을 빌리려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찾아간 친구 집은 벌써 문이 닫혀있었고 빵을 꾸어달라는 말에 안에서 들려오는 대답은 "귀찮게 굴지말게. 벌써 문들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는 거절하는 대답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의 문을 계속 두드리며 빵을 꾸어달라고 하면 마침내는 귀찮아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청을 들어줄 것이며 원하던 빵을 얻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빵을 구하러간 친구가 건성으로 자기 일이 아닌 것처럼 했다면 "귀찮게 굴지 말게.........." 하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심지어는 배신감까지 느낄 수 있는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길에 지치고 배고픈 친구를 진정으로 위할 줄 아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빵을 얻을 때까지 문을 두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나 이웃을 위해서나 기도할 때의 자세가 어떠해야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올바른 기도의 자세는 간절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라도 해봐야지' 하는 얄팍한 기대 심리로는 온전한 기도를 바칠 수 없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마음이며 성령은 우리가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지켜주십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까? 어떤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그 간절한 마음이 하느님 안에서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또한 나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친구는 없는지 부족하지만 나의 작은 손길을 아쉬워하는 이웃은 없는지 생각하고 살펴보는 아름다운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하시어 이 세상이 태초의 모습처럼 아름답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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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 깊은 곳의 갈망>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면 하느님을 만난다. 부제서품을 앞두고 나는 호주 사막 한가운데서 8일 피정을 했다. 멜버른에서 사막까지는 기차로 꼬박 29시간이 걸렸다.
아침 여명이 밝아오면서 드러나는 벌건 사막엔 살아 있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이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사막이 주는 위압감에 눌렸고 몸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원주민들이 나를 바라보는 모습도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피정을 지도해 주실 수녀님께 멜버른을 떠나 이 사막에 오기까지의 여정과 내 마음의 움직임을 이야기하였더니 수녀님은 간단히 “두려움이군요. 피정 동안 이 사막의 환경에 자신을 열어보는 연습을 하세요”라고 하셨다.
피정 첫날, 나는 피곤해서 낮잠을 잤다. 한참을 자고 있는데 어디선가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를 찾아가듯 나는 소리나는 곳을 찾아갔다. 그 소리가 나는 곳은 마을회관이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이 혹시 나를 거부하면 어쩌나 싶어 망설이다 내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내 이야기를 들은 수녀님은 나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수녀님은 위축되어 있는 나에게 “마음 깊은 곳의 갈망을 좇아가세요. 그러면 하느님을 만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해주셨다.
내가 그 회관에 편안히 들어가는데는 약 4일이 걸렸다. 첫째 날은 문에서 1미터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다음날은 주변 의자에 앉아서 10여 분을 있었다.
그 다음날 갔더니 어린아이들이 먼저 와서 내게 말을 걸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놀았다. 경계의 대상이었던 원주민들에게 환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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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당신 자신을 주시는 하느님>
기도 중의 기도요, 가장 완벽한 기도이며, 모든 기도의 모범이 될 주님의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께서 오늘은 일용할 양식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청할 것을 허락하신다. 아니, 청할 것을 서둘러 권고하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청원기도에 대한 두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주신다.
첫째는 청원기도를 드리는 태도에 관한 것으로서 기도의 항구함과 인내와 끈기이다.(5-10절) 둘째는 청원기도의 내용에 관한 것으로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 지를 가르치고 있다.(11-13절)
우선 루카복음이 독자적으로 보도하는 예화가 바로 기도에 인내와 끈기가 있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예화는 한밤중에 한 친구의 방문을 받은 다른 친구가 내놓을 빵이 없어서 또 다른 친구를 찾아가 빵을 청하는 다소 극단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예화의 결론은 친구 간의 우정만으로는 빵을 얻지 못하지만, 귀찮을 정도로 끊임없이 졸라대면 결국 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청원기도에는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가 있어야 한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그 청을 거절하지 않고 꼭 들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니 청원이 이루어질 때까지 항구함과 끈기와 인내로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청원기도에서 무엇을 청해야 하는지를 알아보자. 예수께서는 일단 자기 자녀들에게 그들이 청하는 것을 다 들어줄 줄 아는 이 악한 세대의 아버지들과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주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를 비교하는 대비논법(對比論法)을 통하여, 세상의 아버지들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이심을 암시하신다.
나아가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이던,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뜻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이며, 결국에는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령이란 바로 하느님을 자신을 가리킨다.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이 생선을 청하면 생선을 주고, 달걀을 청하면 달걀을 주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보다 더 좋은 ‘하느님 당신’을 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감사와 찬양으로만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비운 두 손을 믿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올림으로써 그분을 경배할 수도 있다. 나에게 없는 것을, 필요한 것을 하느님께 겸손하게 청하는 것도 하느님을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 청하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느님께 하느님 당신을 달라고 청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청한 바로 그것을 하느님께서 주시지 않는 다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 모든 위험과 어려움으로부터 제가 보호를 받기보다는 제가 두려움 없이 그들을 이겨내게 하소서. 주님, 저의 아픔을 삭혀주시기보다는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마음을 주소서. 주님, 다들 힘들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저의 아쉬움을 남에게 불평하기보다는 홀로 설 수 있는 강한 힘을 주소서.
주님, 인생의 항로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을 돌려달라기보다는 이와 맞서 인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주님, 저로 하여금 오직 성공을 위해서만 당신의 은총을 구하는 비겁한 자가 되지 않게 하시며, 실패의 고배를 마시면서도 그 속에 묻어있는 당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주님, 당신께서 가난하셨는데 제가 어찌 부자 되기를 바라겠나이까? 거짓 예언자를 높이고 참 예언자를 돌로 쳐 죽인 자들의 후손들이 당신을 거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제가 어찌 사람들 눈에 유명하고 권세 있는 자 되기를 애써 바라겠나이까?
이 세상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겠다는 희망을, 그 희망이 결국은 절망을 가져다 줄 뿐인데, 제가 어찌 그런 희망을 가슴속에 품어 기르겠나이까?
성령 하느님이시여, 제 안에 당신의 불을 놓으시어 제 마음이 오직 당신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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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사랑하십시오>
오늘은 묵주 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바치는 묵주 기도는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묵주알 한 알 한 알에는 엄청난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성모님의 아기 예수님의 잉태에서부터 성모님께서 천상 모후의 관을 받으시는 여정은 또한 우리 삶의 여정이요 우리 삶의 신비이기도 합니다. 성모님과 함께 오늘도 예수님의 생애의 한가운데에서 우리 각자의 삶의 신비를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저는 2017년 가을에 아일랜드에서 수도승 종교 간 대화 유럽위원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모임이 끝나고 3일간의 시간이 있어 아일랜드에서 가장 큰 수도원인 글랜스탈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습니다. 피정 둘째 날은 바로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묵주기도의 동정 마리아 축일이었는데, 강론 때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로사리오 기도는 예수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삶과 수난과 부활 모두는 신비였습니다. 그리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면서 우리의 삶 역시 신비의 삶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탄생과 삶과 죽음은 모두 예수님의 신비에 참여하여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아일랜드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우리의 영적인 여정 안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들, 우리가 겪게 되는 모든 시련과 기쁨들은 예수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들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탄생하게 하셨고,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순종이 우리를 눈에 보이는 삶을 넘어 하느님과 함께 하는 하늘의 삶을 열어 주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자신을 버리고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과 나눌 때 매일의 일상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신비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 누구보다도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신비 안으로 가장 먼저 가장 깊이 들어가셨기에 우리는 성모님께 도움을 청하며 나약한 우리가 그분의 신비의 표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의 신비를 세상에 증거하는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오늘 독서의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처럼 “우리가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환희의 신비에서 성모님께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주님의 종이 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순종한 성모님처럼 온전히 주님의 것이 되어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였듯이 우리도 주님께 우리를 봉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신비를 세상에 증거하는 표징이 되기 위해서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며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공생활의 예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치유해 주시고 가르치셨듯이 우리도 마주 오는 이들에게 주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삶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말씀의 신비 속에 사는 이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들의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께 온전한 믿음”을 두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더 큰 선으로 인도해 주심을 온전히 믿고 지금의 고통을 인내로이 견디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신비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우리의 일상에 마주 오는 고통과 어려움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예수님의 신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넷째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부활시키셨듯이 우리도 자신에게서 죽고 주님을 위해 살아갈 때 부활의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고 성모님처럼 하늘로 올라 주님과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은 겸손과 순종, 사랑과 자비로 드러나게 됩니다. 너의 영광이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은 진정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그분의 영광이 나의 기쁨이 되고, 이러한 우리의 사랑은 예수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모님처럼 우리도 당신 영광에 참여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을 지금 여기에서 사는 것, 이것보다 더 큰 신비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예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너를 사랑하십시오.”
너 안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할 때 우리 삶의 신비는 완성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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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께 기도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벗에 대한 비유’와 ‘세상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를 통해 아버지께서는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가르쳐주십니다.
<첫 번째> 비유는 잠을 자던 사람도 벗의 끈질긴 간청에는 마지못해 들어주거늘, 하물며 주무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잠든 우리를 깨워 간청하게 하시는 아버지께서야 얼마나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두 번째> 비유는 세상의 아버지들도 제 자식들에게는 세상의 좋은 것을 주거늘, 하물며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께서야 어련히 하늘의 좋은 것들을 주시지 않겠는지를 들려줍니다. 그러니, 이토록 넉넉히 주시는 아버지께 청하라 하십니다.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10)
먼저, ‘청하라’는 것은 입으로, 곧 말로 간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자신이 아닌 아버지께 두고 겸손하게 청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우리가 그것을 청하기를 바라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기와 욕심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무엇을 찾느냐?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요한 1,58) 하고 묻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청해야 할 것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또한, ‘찾아라’는 것은 몸으로 수고로움을 바쳐 찾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을 아버지께 두라는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 하고, 먼저 우리를 찾아 나서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찾아 나서기만 하면, 아버지께서는 “네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사 65,24;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18)이시고, 비록 우리가 불신과 의혹에 빠져도 결코 우리에게서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충실하시고 신실하시고 항구하신 분이시니, 주님의 믿음에 의탁하여 찾아나서야 할 일입니다.
또한, “두르려라”는 것은 가슴으로, 곧 사랑으로 “두드려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께서 사랑으로 마음을 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주님께서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라고 먼저 사랑의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과 몸(행동)과 가슴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께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려야 할 일입니다. 주님이 아니시면, 그 누구도 우리를 구할 자도, 열 자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불신과 분리를 조장하는 교활한 뱀이 아니라, 거센 파도에도 상하지 않고 온 몸을 맡기는 일치와 믿음의 생선을 주실 것입니다. 뒤꼬리에 독침을 품고 있어 뒤를 경계하게 하는 전갈이 아니라, 병아리를 탄생시킬 앞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의 달걀을 주실 것입니다. 단단하여 도저히 삼킬 수 없는 돌이 아니라, 생명을 살찌울 사랑의 부드러운 빵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한 것보다도 “좋은 것”(마태 7,11), “성령”(루카 11,13)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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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주님!
희망할 줄을 알게 하소서! 그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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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9)
오늘은 성 비오 5세 교황께서 이슬람제국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레판토 해전 기념일'(1571년 10월 7일)을 맞아 제정된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리스도인 군사들은 그 당시 자신들이 거둔 승리가 묵주기도를 바침으로써 받은 천주의 거룩한 모친이신 성모님의 도움 때문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지금 '묵주기도의 성월'을 보내고 있고, 신자들에게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구원의 신비, 전체, 곧 예수님의 육화와 땀과 수난과 부활의 신비 전체를 성모님과 함께 묵상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 그 어떤 기도보다도 큰 기도입니다.
저도 매일 아침 바닷가 산책을 할 때나 오후에 적석산을 산책 할 때 그리고 사제관에서 성당으로 걸어서 오고갈 때 항상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는 예수님 삶 전체를 믿게 하는 '믿음의 기도'이며, 성모님의 손을 잡고 바치는 '전구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간청하라'고 이르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그런데 이에 앞서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신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믿음 안에서 청하기만 할 뿐입니다.
'받고 얻고 열리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기에, 청하는 것을 지금 주시든 다음에 주시든 상관하지 않고, 단지 굳게 믿으면서 청할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시는 분께 대한 믿음(신뢰) 없이 청하기만 하거나, 그리고 청하는 것이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청하기만 한다면 쉽게 낙담하거나 넘어지게 되고, 결국 떠나가게 될 겁니다.
먼저, 주시는 분을 굳게 믿고, 그리고 끊임없이 간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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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위하여>
루카 11,5-13 (끊임없이 간청하여라.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벗이 있는데, 한밤중에 그 벗을 찾아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하자.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 그러면 그 사람이 안에서,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위하여>
주기
위하여
청하고
나누기
위하여
찾고
품기
위하여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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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수영을 처음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특히 주요 영법 중에서 ‘배영’을 배울 때 참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몸의 힘을 빼고 물 위에 가볍게 누우라고 강사는 말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물 위에 누우면 가라앉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수영 초보였던 저는 계속해서 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라앉지 않기 위해 제 근처에 아무도 오지 못할 정도로 힘차게 발차기를 해도 점점 물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강사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고개 들지 마요. 이 물에 빠져도 안 죽어요.”
물에 빠질까 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그러다 보니 몸이 계속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힘을 뺀다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지 않고 오히려 머리가 잠기도록 해야 저절로 물 위에 뜰 수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두려워할 것도 아닙니다. 물에 빠지면 전문 강사가 도움을 줄 것이고, 그리 깊지 않은 수영장이니 빠져 죽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힘 빼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저것 신경을 쓰면서 힘 꽉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주님께 맡기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1세기의 손님 환대법에 따르면 한밤중에 찾아온 손님을 대접할 때 공동체가 모두 돕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과 같이 친구에게 가서 빵 세 개만 꾸어 달라고 청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귀찮음으로 손님 환대법을 지키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지만 이런 사람도 줄곧 졸라 대면 부탁을 들어준다고 하십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어떻겠냐는 질문이었지요.
사람에게 하는 정성의 반만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의 선물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즉, 기도로 청하고, 바른 삶으로 찾고, 한결같은 신앙으로 두드려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는 사람은 어떤 순간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힘을 쫙 빼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게 됩니다. 하느님과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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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
어느 책에서 인상 깊은 내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을 어리석음이라고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는 것을 나태함이라고 합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평온함이라고 합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는 것을 용기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서 어느 형제님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기억났습니다. 이 형제님은 어렸을 때 가족과 함께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모두는 너무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아버지는 젊었을 때의 실수로 오랜 시간 교도소에 계셨습니다. 이 형제님이 아버지와의 혈연관계를 끊으려고 한다면,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니 ‘어리석음’입니다.
아버지의 상황을 이해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지 않으니 ‘나태함’입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를 받아들인다면, 바꾸기 힘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니 ‘평온함’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용서한다면,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려는 것이니 ‘용기’입니다. 우리는 용기 있는 삶을 살고 있나요?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구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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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나 원하는 사람이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꿈은 이루어집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이 얻지 못하는 까닭은 하느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2-3)
그러므로 구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신다고 믿고, 하느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9-1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신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사실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청하면 그분께서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지 그분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그분께 청한 것을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1요한 5,14-15)
오늘 복음은 바로 우리의 기도를 꼭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해도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시편 66장18절을 보면 “만일 내 마음 속에 죄악이 들어있었다면 주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셨으리라” 라고 적고 있습니다.
잠언에도 “나는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또, 나를 애써 찾겠지만 만나지 못할 것이다. 주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섬길 줄 모르고 지식을 멀리한 탓이다. 내 충고를 따르지 않고 온갖 훈계를 업신여긴 탓이다.”(11,27-30) 하였습니다. 완고한 자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합니다. “귀를 막고 하느님의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마저 역겨워 하리라.”(잠언28,9) 그리고 “구해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야고4,3) 더더욱 악행을 저지른 자의 기도는 외면하십니다.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 보아라. 빌고 또 빌어 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이사1,15-16)
기도를 했는데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첫째는 마음 없이 청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청해야 합니다. 또한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디안들이 가뭄에 기도하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도를 한답니다. 한편 내가 겸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기도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를! 또 다른 이유는 들어주면 오히려 피해를 주기 때문입니다. 과일을 까고 있는데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졸라대며 칭얼거린다고 칼을 줄 수는 없는 법입니다. 허락하면 교만해 지고 피해가 간다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청하되 합당한 마음으로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믿음으로 소원을 하느님께 말씀 드리기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이 원하시는 때에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좋은 것을 이루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때와 방법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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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탄력靈的彈力>
-항구恒久하고 간절懇切한 기도-
어제에 이어 루카복음의 주제 역시 ‘기도’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제가 아주 예전부터 즐겨 자주 사용했던 ‘영적탄력靈的彈力’입니다.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를 통해 날로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나아갈 때 영적탄력 좋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비록 육신의 탄력은 노화와 더불어 떨어지더라도 영혼의 탄력, 영적탄력은 날로 좋아졌으면 좋겠습니다.
10월 교황님의 기도지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든 신자들이 선교하는 제자들이 되게 하소서’입니다. 선교하는 제자들이 되기 위해서도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는 필수전제조건입니다. 오늘 10월7일은 ‘묵주 기도의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오늘 기념일의 유래가 참 중요하여 길이 기억할 만합니다.
1571년 10월7일은 10월 첫 주일이었고 전 유럽의 명운命運이 달린 날이었습니다. 1453년 콘스탄니폴을 함락시킨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시리아, 이집트, 북아프리카에 이어 발칸반도와 동유럽을 점령하면서 서서히 유럽을 향해 서진하다, 유럽의 11개국의 신성동맹 연합군과 격돌하니 바로 레판토 해전이요,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이래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여깁니다. 후에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를 썼던 당시 스페인의 보병 연대장 세르반테스는 이 전투에서 싸우던 중 한쪽 팔을 잃었습니다.
바로 10월은 첫 주일 오늘, 유럽의 연합군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군과의 격전은 오전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에 끝났으며, 교황 비오 5세는 기독교 연합 함대의 승리를 위해 유럽 전역에 묵주기도를 바칠 것을 호소했고 교황 친히 베드로 광장에서 묵주기도 대열에 동참했습니다. 결과는 신성동맹의 대승으로 끝났고 오스만 군은 궤멸적 피해를 입어 더 이상의 서진은 좌절되었고 기독교의 영원한 적으로 간주되던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만약 레판토 해전에서 유럽 연합군이 졌더라면 로마를 비롯한 남유럽 많은 나라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황 비오 5세는 승리의 성모님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승리의 성모 축일을 제정하였고, 1716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로마 보편 전례력에 삽입하여 10월 첫 주일을 축일로 지내다가, 1913년 교황 비오 10세는 다시 축일 날짜를 10월7일로 되돌렸고, 1960년 교황 성 요한 23세는 축일의 명칭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새삼 묵주기도의 위력과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10월 묵주기도 성월에 맞이하는 오늘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묵주는 천국에 가는 패스 포드라합니다. 감각이 있는 한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기도가 묵주기도입니다. 어떤 형태든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도 기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요즘 ‘죽어서 만난다’는 신비로운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노자 강의중 ‘상우尙友’라는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현재 마땅한 친구가 없으면 옛 성인들을 친구로 삼으라는 뜻이라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멘토는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보나벤투라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도 안에서 만나는 경우가 이러하겠구나, 죽어서 만난다는 것이 이런 뜻이겠구나’ 깨닫습니다.
얼마전 선종한 황인국 마태오 신부님의 회고록을 읽으면서, 또 치열한 암투병생활중 선종 전 50일간 오로지 기도로 살았던 연데레사 수녀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살았을 때 보다 더 잘 알게 되니 ‘죽어서 만난다’는 진리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황 인국 몬시뇰 신부의 회고록 맨 끝에 2001년 김수환 추기경께서 손수 번역하신 ‘어느 독일 노인의 시’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일은 무엇일까?
기쁜 마음으로 나이를 먹고
일하고 싶지만 쉬고
말하고 싶지만 침묵하고
실망스러워질 때 희망을 지니며
공손히 마음 편히 내 십자가를 지자.
젊은이가 힘차게 하느님의 길을 가는 것을 보아도 시기하지 않고
남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겸손되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쇠약하여 이제 남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어도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늙음의 무거운 짐은 하느님의 선물
오랜 세월 때 묻은 마음을 이로써 마지막으로 닦는다.
참된 고향으로 가기 위해
자기를 이승에 잡아 두는 끈을 하나씩 풀어 가는 것
참으로 훌륭한 일이다.
이리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
그것을 겸손되이 받아들이자.
하느님은 마지막으로 제일 좋은 일을 남겨 두신다.
그것은 기도이다.
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합장만은 끝까지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 위해 하느님이 은총을 베푸시도록 빌기 위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임종의 머리맡에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오너라, 나의 벗아. 나 너를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엄혹한 70년대 김추기경님은 불면증으로 밤시간 내내 침실안에서 서성였다 합니다. 아마도 노년의 추기경님의 소망이 고스란히 담긴 시같습니다. 더불어 23년전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마인라도 수사님을 생각하여 썼던 ‘노수사님’이란 시와 ‘죽음’이란 기도와 같은 시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낙엽쓰는 노수사님
묵묵히 삶의 뒤안길에서
낙엽과 함께 집착의 쓰레기들
말끔히 쓸어내는 마인라도 노수사님
그대로 무념無念, 무욕無慾, 무심無心의
가을이었다, 자연이었다”-1998.11.9.
-“땅위를 덮고 있는 고운 단풍잎들
두려워하지 마라.
죽음은 해후다, 귀환이다, 화해다, 구원이다.
‘수고하였다, 내 안에서 편히 쉬어라.’
들려오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음성”-1998.11.10.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삶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삶자체가 기도입니다. 기도는 항구하고 간절해야 합니다.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를 늘 깨어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백절불굴, 칠전팔기,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영적탄력 좋은 삶을 살게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은 항구히, 간절히 지칠줄 모르는 기도와 삶을 권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받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최상, 최고의 참 좋은 선물인 성령을 주십니다. 기도하지 않을 때 무지와 허무의 포로가 되고, 원망과 절망, 실망도 안개처럼 피어나 시야를 가립니다. 다음 제1독서 말라키 예언서에 나오는 것 바와 같이 하느님께 심히 무례한 말을 뇌까립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만군의 주님의 명령을 지킨다고, 그분 앞에서 슬프게 걷는 다고 무슨 이득이 있느냐? 오히려 이제 우리는 거만한 자들이 번성하고, 하느님을 시험하고도 화를 입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은 “주님이 주의를 기울여 들었다. 당신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이 주님 앞에서 비망록에 쓰였다.” 고백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고 신뢰하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가들을 섬기는 자식을 아끼듯, 나도 그들을 아끼리라. 보라, 화덕처럼 불붙는 날이 온다.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은 모두 검불이 되리라. 그러나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리라.”
참으로 항구히, 간절히 기도할수록 영적탄력 좋은 삶이요,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과 신뢰심도 나날이 깊어집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날마다의 미사은총이 참으로 우리 모두 영적탄력 좋은 삶을 살게 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시편40,5ㄱㄴ. 시편1,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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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 이야기입니다.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 8)
예수님께서 기도를 두 벗 사이의 관계로 비유하십니다. 인간적인 친분만으로는 선뜻 들어 주기 어려운 일도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졸라 대면 결국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하시지요.
"청하여라. ... 찾아라. ... 문을 두드려라."(루카 11,9)
하늘의 아버지와 우리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를 신뢰하면서 지치지 않고 청할 때 아버지는 들어주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단, 우리가 청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우리 갈망 안에 심어 주신 바로 그것일 때 그렇지요. 그분은 주시려는 것을 우리 편에서 먼저 바라게 하시고, 언젠가 때가 되면 채워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기도를 드린다는 건 이미 아버지와의 관계 안에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스스럼없이 무언가 청하기도 하고 두려움없이 속내를 드러내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증여하는 관계 안에서 사랑으로 오가는 모든 것이 기도입니다.
아버지와 우리가 그런 관계라면 그분은 우리가 무엇을 찾고 청하는지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주시지요.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드님 사이의 사랑의 유대입니다. 주님과 우리를 친밀하게 이어주고 하나가 되게 해 주시는 영이 곧 성령이시지요. 성령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 당신 아드님을 주신 아버지께서,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실 가장 귀한 선물이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과 진실되이 엮인 이들의 복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말라 3,14)
현세적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서는 솔직히 악인들이 득세하고 재물을 누리며 번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님의 길을 헛되다 조롱하는 무도하고 거만한 이들이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보이지요.
"주님을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하는 이들 ... 그들은 나의 것이 되리라."(말라 3,16-17)
하지만 주님은 그것이 신기루임을 우리가 깨닫길 원하십니다. 주님을 근원으로 하는 모든 피조물의 행복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파생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누구보다 주님과 긴밀히 연결되어있고, 그래서 그는 늘 기도합니다. 머무름이건 침묵이선 청원이건 눈물이건 선행이건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곧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이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성령을 충만히 받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의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움의 태양이 날개에 치유를 싣고 떠오르리라."(말라 3,20)
의로움의 태양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경외하는 이에게 회복과 재생, 즉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십니다. 주님을 경외함은 성삼위 하느님과의 뜨겁고 진실한 일치입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화답송)
이 축복의 노래가 단순히 현세적 재물이나 번성의 의미가 아님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무시하고 짓밟고 쓰러뜨려야 쌓는 맘몬의 바벨탑과 주님 날개 밑에서 누리는 행복 사이의 간극은 무척 크니까요.
주님과 늘 긴밀히 연결된 이, 그분을 경외하는 이의 기도는 성령의 은총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더 행복해지고, 더 행복해서 더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 깊이 심어주신 갈망을 찾아내어 그분께 그것을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반드시 들어 주실 것이니, 성령을 소유한 여러분은 복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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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kGnyCpjS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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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루카 11, 9)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
기도야말로
우리의 본분이며
우리의 중심입니다.
기도의 힘을
믿습니다.
기도보다 끈질긴
믿음은 없습니다.
자녀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거듭되는
간구와 간청의
시간입니다.
기도로 아버지의 은총에
도달하게 됩니다.
청하는 기도로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기도로 공유되는
아버지의 은총입니다.
간절한 기도로
다시 돌아 가야 할
우리들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가장 필요한 믿음을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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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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