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주민들이 수십년간 사용해온 농로를 자신의 땅이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길을 막는 사례가 최근 잇따라 나타나면서 농촌사회의 새로운 갈등요인으로 떠오르고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이장동 인근에서 15년간 벼농사를 짓던 오모씨(69)는 2년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아침 일찍 논을 살펴보러 나갔는데 매일 오간 농로를 누군가 쇠사슬로 막아놓은 것. 게다가 길옆에는 오가는 사람을 감시할 작은 건물까지 짓고 있었다. 알고 보니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바로 옆 야산 농장주가 자신의 사유지임을 내세워 인근 논밭에 진입할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농로를 차단한 것이다.
오씨는 “2년간 야산 농장주와 수차례 만나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으나, 농장주는 ‘내 땅이니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며 “예전에는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5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었던 길을 이제는 30분 넘게 돌아가야 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주요 진입로가 사라지자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도 생겨났다. 6610㎡(2000평) 규모의 과수원에서 3년 전부터 배농사를 준비해오던 귀농인 이모씨(52)는 1년 넘게 일손을 놓고 있다. 길이 차단되자 퇴비를 나르거나 농기계를 운반할 엄두가 나질 않아서다.
이씨는 “은퇴를 앞두고 멋진 귀농생활을 하고 싶어 과수원 땅을 샀는데 그 꿈이 사라지게 생겼다”면서 “들어갈 통로가 사라진 땅을 살 사람도 없을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땅을 묵혀두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경기 의왕시 초평동에서도 휴경지 주인이 땅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농기계가 오가던 농로에 대형 말뚝을 박아 주민의 원성을 사고 있다. 휴경지 주인은 농로가 사유지임을 분명히 밝히려고 굴착기까지 동원해 높이 1m 정도의 말뚝을 길 한가운데 세워 놓았다.
이렇게 사유지에 속한 농로를 놓고 주민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지만, 지방자치단체 등에서는 이를 개인간 문제로 한정하고 개입 자체를 꺼리는 분위기다.
5년간 초평동 인근에서 논을 일궈온 박모씨(50)는 “그동안 시에 탄원서를 제출해봤지만, 사유지라는 이유로 당사자들간에 합의를 보거나 민사소송을 걸어보라는 원론적인 답변만 돌아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 법적 소송이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범농협 농업인 법률·세무 자문봉사단 소속의 소인영 변호사는 “사유지에 속한 농로라 하더라도 다수 농민이 오랜 기간 관행적으로 사용해왔다면 민법 219조를 근거로 민사소송을 통해 주위토지통행권 침해를 인정받아 승소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면서도 “다만 민사소송을 준비하는 기간이나 소송비 등을 고려했을 때 농민이 감당해야 할 고통이 큰 데다, 소송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주민간 반목은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농촌사회가 급변하고 있지만 행정·법률 서비스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윤수종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 농촌에서 중재역할을 했던 촌장과 같은 어른이 사라지고 농지가 부를 축적하는 재산으로 개념이 바뀌는 등 농촌사회가 빠르게 변하고 있다”면서 “이같은 사회변화를 살펴 지자체는 주민간 갈등을 해결할 분쟁조정기구 신설에 나서고, 당사자간 합의가 실패하면 기구의 조정안이 법적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