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던 중 숙종이 총애하던 숙원 장‘씨가 왕자 균(均)을 낳았다.
숙종은 서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그 어미 장 숙원을 희빈으로 삼아 버렸다. 주지하는 대로 이를 결사반대하던 송시열은 제주도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아 죽고 남인 세상이 되었다. 서인 정객들은 줄줄이 벼슬에서 파직되는가 하면 귀양을 가게 되었다.
서인의 소론의 영수였던 남구만도 이 기사환국을 빗겨 갈 수 없어 강릉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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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환국에 연유되어 강릉으로 가던 약천은 도중 심일(沈逸) 마을에 이르러 자연 경관과 그곳에 자기의 호(號)와 같은 이름의 약천샘에 그만 매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심일서당(沈逸書堂) 을 짓고 후진을 교육시키며 1년 반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그 유명한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시조는 이렇게 생겨났다. 그해가 1689년 봄이었다.
그 마을에는 재 너머와 사래긴 밭이 ‘발락재와 장밭(長田) 표지석을 설치하여 놓았는데 지금은 담배 밭으로 쓰고 있는 모양이다.
-중부대 신웅순 교수 글에서동해안을 차로 달리다 보면 동해 망상 휴게소 한 모통이에 남구만의 시조비가 서 있으니 보거든 그냥 지나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공의 출생지며 치사(致仕)하고 말년을 머물면서 초당을 짓고 낚시와 집필로 평생을 보내던 홍성군 구항면 거북이 마을이 ‘동창이 밝았느냐’ 이 시조의 배경이라는 것이다.
충청일보 기사에 의하면 홍성군은 남구만 생가를 중심으로 도비(道費)와 군비(郡費) 10억을 들여 남산~보개산~구항면 거북이마을에 이르는 5.8km 구간에 '재 너머 숲길'(보개산 솔바람길)이란 이름의 둘레길을 조성해 놓은 모양이다. 진위야 어떻든 간에 지방자치 단체들이 우리 고장과 인연 있는 위인을 서로 모시려는 뜻은 갸륵하다 할 것이다.
약천 남구만 선생의 묘도 포은 정몽주 선생의 묘처럼 드넓은 묘역에다 잔디로 가꾼 비스듬히 오르는 구릉 위에 커다란 봉분에 모셔져 있다. 부인 동래정씨와 합장한 묘였다.
그 왼쪽에 그보다는 작은 묘가 있어 보니 26세에 요절한 약천 선생의 장남묘 부부의 묘로 열녀비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며느리가 지극정성 남편을 모신 열녀였던 모양이다.
*.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 이야기 용인(龍仁)을 왜 ‘용인(龍仁)’이라 하였을까?
용인은 고대에는 ‘거서현’이라 하던 것을 고려 때 ‘용구현’으로 개칭하였다.
조선 태종 13년 무렵 이 지역은 '용구현'과 '처인현'이었는데 이를 합칠 때 ‘龍(용)’과 ‘仁(인)’ 자를 각각 따서 ‘용인현(龍仁縣)'이라 한데서 '용인(龍仁)'이란 이름은 유래된다
얼마 전 그 용인시 기흥구에다 경기문화재단이 ‘백남준 미술관’을 지으려고 공사를 하다 보니 이 일대가 3~4 세기 백제인들의 공동묘지 터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발굴된 묘만도 25기나 되었다. 이를 보니 용인은 삼국시대부터 명당으로 소문난 곳이었던 모양이다.
현재 용인시에는 공동묘지가 26곳(77만9591㎡)이나 된다. 이는 용인시 면적(592.05㎢)의 7.6%인데 여기에 내가 용인을 다녀 오가며 본 용인공원묘, 용인 백암공원, 용인천주교묘, 용인수목장 등등을 합하면 용인은 묘(墓)의 시(市)요, 묘(墓)의 나라다.
이렇게 공동묘지가 많은 것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서 가장 길하다는 400m 내외의 나지막한 산과 산간계곡의 작은 하천이 발달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고장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 그런가 이 고장은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去龍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문헌을 찾아보면 이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 몇 가지가 전하여 오고 있다.
-전설1: 용인의 중남부에 위치한 이동면 묘봉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구전되어 온다.
이 마을에 마음 착한 젊은이가 산등성이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산꼭대기로부터 굴러 내려온 수천 근의 바위에 깔려 그만 즉사하고 말았다.
이 청년이 저승의 염라대왕에게 갔더니 아직 천수(天壽)가 남았다고 이승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혼령은 이승으로 되돌아 왔으나 시신이 바위에 깔려 있어서 접신(接身)할 수 없어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다 충북 진천의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부잣집 외아들의 몸으로 혼령이 들어 가 접신하게 되었다.
그 후용인 묘봉리와 진천의 두 아내와 함께 살며 각각 세 아들씩을 두고 천수를 다하여 죽게 되었다.
그러자 용인과 진천의 두 집 아들 사이에 서로 제사를 자기들이 지내겠다는 혼백다툼으로 송사를 하게 되었다.
원님은 “그가 살아서는 진천에 있었으니 진천에서 살다가 죽어서는 용인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려 결국 용인의 아들이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학대백과사전
-전설2: 옛날 진천 땅에 추천석이란 사람이 살았다.
하루는 곤히 잠들었다가 애절한 통곡 소리에 잠을 갰더니 자기의 아내와 자식들이 우는 소리였다.
하두 이상해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물어 보아도 목 놓아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일어나 자세히 보니 죽어 누워 있는 자기 몸이 있지 않은가.
얼마 후 저승사자들을 따라 명부전(冥府殿) 앞에 엎드렸더니 어시서 온 누구냐고 염라대왕이 묻는다.
“예, 소인은 진천에서 온 추천석입니다.”
염라대왕은 대경실색하였다. 용인의 추천석을 불러들여야 했는데, 저승사자들의 실수로 진천의 추천석을 데려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름과 생년월일이 똑같았던 것이다.
진천의 추천석은 걸음아 살려라 하고 단숨에 이승의 자기 집으로 내려왔더니 아,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벌써 자기의 육신은 땅에 묻히고 집에는 상청만 덩그러니 자리하고 있었다.
접신(接身)을 할 수 없는 추천석은 육신을 가지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게 영혼만 떠도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생각난 것이 염라대왕에게 불려 갔을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혼이 떠난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은 다행히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어 나 몰라라 하고 그 몸에 접신을 하였다.
용인 땅 추천석의 가족들은 몸을 뒤틀며 일어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고 기뻐 날뛰었다.
마음 착한 진천의 추천석은 용인 땅 추천석의 몸을 빌려 환생한 것을 실토하였으나 모두들 죽음에서 깨어나서 하는 헛소리로만 여겼다.
진천 고향집으로 단걸음에 달려온 추천석은 상복을 입은 아내에게 “여보, 나요 내가 돌아왔소.” 반갑게 반갑게 눈물로 말하였으나
“뉘신지요? 여보라니요?”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매질까지 당하다가 결국은 관가로 끌려오고 말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진천 원님은 그의 한 맺힌 사연을 쭉- 듣고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진천 땅의 추천석은 저승사자의 잘못으로 저승에 갔다가 다시 살아 왔으나, 자기의 육신이 이미 매장되었으므로 할 수 없이 용인 땅에 살던 추천석이 버리고 간 육신을 빌린 것을 인정하노라.
진천 땅 추천석이 그의 조상의 내력과 그 가족의 생년월일은 물론 논밭 등의 재산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저 추천석은 진천에서 살던 추천석의 혼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생거진천(生居鎭川)하였으니 사거용인(死居龍仁)할 것을 판결하노니 양가의 가족도 그대로 실행토록 하라. ”
그래서 진천 땅 추천석의 혼이 들어간 그 사내는 생전에는 자기의 주장대로 진천 땅에서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천수(天壽)를 누리고 살다가, 세상을 뜨자 그 육신은 본래 용인의 추천석의 것이므로 그곳 가족의 제사 봉양을 받으며 지내게 되었다.
-전설3: 용인에 사는 형과 충북 진천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형제가 있었다. 형제는 둘 다 어찌나 효성스러웠던지 서로가 어머니를 모시려고 다투다가 결국 송사를 걸게 되었다. 그러자 진천 원님에게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받았다.
"부모를 모시는 것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살아생전 모시는 것과 돌아가신 후 제사로 모시는 것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