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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자체·교육청, 민주시민교육 부서·조례·예산 줄줄이 폐지·삭감
김동춘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민주’는 사치재?
나는 몇 년 전 충북에 교사 대상의 강연을 간 적이 있다.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이야기한 후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런데 질의 토론시간에 어떤 교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면서 “민주시민교육은 강남좌파 같아요”라고 자기 의견을 밝혔다.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강남좌파? 배부른 사람들의 진보 행세? “학교 현실과 교사들의 처지가 얼마나 고되고 짜증나는 일로 가득 차 있고, 수입 진도 나가는 것도 벅찬데 민주시민교육까지 하라니?”라고 내게 항변하는 것 같았다. 그가 말하려는 의도는 충분히 짐작할 만 했다.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이 30명 중 10명도 안되고, 학원 수업에 지쳐서 엎드려 자거나 아예 수업자체에 흥미를 가질 수 없어서 딴청을 피우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교실에서 민주시민교육은 사치가 아닐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민주’란 무엇일까? 박정희식 개발독재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거나 그 시대에는 경제개발 외에 다른 가치는 고려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의 60대 이상의 사람들, 특히 부유층은 민주주의는 사치재라고 생각할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 데모하는 학생들을 향해 “너희들은 모두 좋은 대학 다니고, 장차 취업이나 먹고사는 데 걱정거리가 없는 배부른 놈들 아니냐”라고 욕을 했던 당시 거리의 밑바닥 사람들의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나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기 대부분 청소년과 청년기를 보냈는데, 심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동급생이나 이웃 농민들의 삶을 지켜본 나는 그런 생각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가 한참 지난 오늘, 한국이 이제 선진국에 진입한 오늘에도 ‘민주’가 그냥 보통재, 필수재가 아니라 여전히 사치재일까? 전교조의 민주, 인간화 교육을 정권과 보수언론이 ‘좌경의식화 교육’이라고 공격했던 시점으로부터 34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민주가 좌경의식화와 같은 용어인가? 윤석열 교육부에서 민주시민교육과가 폐지되고, 보수 교육감이 들어선 전국의 모든 교육청에 민주시민교육과가 사라진 것을 보면 아직도 ‘민주’는 피해야 할 가치인 것 같다. 대구와 같은 보수적인 도시의 교육청에는 그 전에도 민주시민교육대신 인성교육만이 존재했지만, 진보 교육감이 있는 서울시같은 경우도 직제에서 민주시민교육과 대신 민주시민생활과로 이름을 걸었고, ‘민주시민교육’아니라 ‘세계시민교육’이라는 교육 목표를 설정한 것도 사실이다. 서울시 교육청은 그렇게 ‘민주시민’ 개념을 피하려 했지만, 국민의힘 의원이 다수가 된 서울시 의회는 최근 민주시민생활과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교육부를 필두로 해서 전국의 모든 지자체나 지방 교육청, 민주시민교육 조례가 통과된 시도에서도 담당 부서가 폐지되고, 예산은 거의 삭감되었다. 대전시 의회는 지난 2월 10일 제269회 임시회 1차 본회의를 갖고 제정된 지 1년 밖에 안 된 ‘대전광역시교육청 학교민주시민교육 활성화’ 조례를 폐지했다. 울산시도 지난 5월 1일 민주시민교육 조례를 폐지했고 그 여세를 몰아 울산시 교육위원회에서도 교육청 민주시민교육 활성화 조례 폐지에 대해 논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전시의 경우 대전 자유시민연대가 제시한 성명서를 그대로 인용해 “노조 강령 같은 ‘노동 연대 환경 평화 등의 가치’는 매우 좌편향적이고, 이를 조례에 담은 것은 우리 자녀 세대를 그런 편향적인 사상과 이념으로 키워내겠다는 것”이라고 폐지 이유를 설명했다. 기독교 극우단체는 급진적인 성평등 교육이 실시되면 온 학교가 동성애자로 넘쳐날 것이라고 하면서 학생인권조례 제정 반대집회를 전국을 돌면서 개최한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1주년인 10일 오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원들이 서울 용산구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교사 인원 확충및 실질적 임금 인상, 교사 교육권 확보 등을 촉구했다. 2023.5.10. 연합뉴스
여전히 복종하는 교사, 미래의 신민(臣民)을 원하는가?
2019년 이후 2년여 동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여러 진보, 보수 단체가 전국적인 순회 토론회 등을 거쳐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과 원칙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었고 사회적 합의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독일의 보이텔스바흐 협약의 ‘강제 또는 교화의 금지’, ‘논쟁성에 대한 요청’, ‘이해관계 인지’라는 세 원칙 정도에는 크게 못 미쳤지만 ‘민주시민교육의 필요성’과 ‘교육자는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합의를 했다. 애초부터 그 합의의 주체나 합의 내용이 과연 ‘사회적 합의’에 상당한가라는 회의론도 있었으나, 그마저도 윤석열 정부 들어 거의 휴지조각이 된 감이 있다.
지금 진행되는 민주시민교육 조례 폐지나 노동, 환경, 평화 교육이 좌편향 정치교육이라는 공격은 1989년 당시 전교조 교사들의 제창한 민주, 민족, 인간화 교육에 대한 비판과 궤도를 같이 한다. 결국 민주시민교육은 의식화교육이라는 수십 년 전의 공리가 다 죽어가다가 벌떡 일어나 “노동, 환경, 평화, 성평등 교육이 좌편향 교육”이라고 외치면서 부활한 것 같다.
물론 당시 일부 젊은 교사들이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충분한 교육적 고려 없이 학생들에게 전달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교사를 학교장의 명령이나 교육당국의 정책에 복종해야 하는 존재로 설정하고, 학교를 정치적 진공지대로 두자는 방침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정치 편향이라는 것은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이미 충분히 드러났다. 민주시민교육을 좌경의식화 교육이라 공격하면서 혐오와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지위가 흔들릴 것을 두려워하는 한국 기득권 세력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일본처럼 보수 자민당이 70년 독재를 해온 나라에서나 ‘새역모’(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이 주동해서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왔지, 유럽의 독일, 프랑스 등 국가에서는 시민권 행사의 기본 가치, 공화국의 정신과 그 실천을 위한 시민의 자세, 과거 잘못된 역사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가르치는 것은 이미 오래 전에 교육의 기본 상식이 되었다. 영국에서도 정권에 따라 강조점이 이동하기는 하지만, 한국처럼 ‘민주’를 좌익과 동일시하는 구시대적 냉전논리를 들이대면서 학교를 복종과 수동적 학습의 터전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경제는 선진국인데 정치는 후진국이라는 일본의 모습이나, 경제는 선진국의 문턱에 진입했으나 복지나 행복지수는 OECD 최후진국인 오늘 한국의 모습은 모두 학교에서 ‘시민교육’을 거세한 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선거연령이 고3학생들까지 내려왔는데도 학교에서 시민권 교육도 제대로 시행할 수 없는 나라가 한국이다. 정치에는 인물정치, 정당정치만 있고, 다양한 정책을 둘러싼 이익정치, 정책정치가 그 밑바탕에 깔려있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 미래의 현명한 시민이 길러질 수 없고, 무엇이 자신의 이익이고 그 이익을 어떻게 결집해서 표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파편화된 신민(臣民)들의 세상은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정당, 정치권에 대한 낮은 신뢰가 50년,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그대로 지속되어도, 주류 언론이나 학교는 왜 그런 일이 지속되는 지는 묻지 않은 채, 정치는 오직 정치인들의 것이라는 귀족사회의 논리로 학생과 시민들을 정치적 무뇌아로 만들고 있다.
‘민주’가 빠지면 공교육 자체가 무너진다
사실 민주시민교육이 ‘강남좌파 같다’는 한 교사의 항변은 일리가 있다. 학교생활이 입시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고등학교 입학 후 자퇴하는 학생이 들어나고 있으며, 코로나19 이후 계층별 학습 격차가 더욱 벌어져서 아예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지금의 학교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민주’를 없애면 학교와 교육이 살아날까? 오히려 학교가 입시 전쟁터가 되어 아예 교실이나 공교육 자체가 더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을까? 사실 ‘민주’를 학교교육에서 없애자는 사람들이야말로 학교가 없어져도 학원이 입시를 대신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아닌가?
민주주의는 평범한 사람들이 발언권을 갖는 것이고. 보통사람들이 대화와 소통과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확대되는 것이다. 학교 교과과정이 대입 준비를 고려하여 편제되어 있기 때문에 학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학교에서 이탈하려는 학생들이야말로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민주’를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학원보다는 학교에서 교양적 지식, 국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 알바를 하다가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자기 권리주장을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학생들,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능력을 길러야 하는 보통의 학생들에게 민주시민교육은 삶을 위한 필수재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 출중하여, 당연히 높은 사회경제적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자만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이야말로 ‘민주주의’ 정신을 학습하지 않으면, 약자에게 군림하는 이기적 엘리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민주시민교육은 한국의 헌법적 가치와도 부합한다. 즉 민주공화국의 실현 주체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주시민교육은 헌법적 이념들을 실현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다. ‘민주적 정신’, ‘공화주의 가치’가 스며들어가 있지 않은 학교의 사회, 역사, 국어 교과서와 수업들, 더불어 사는 지구를 지켜나가자는 정신이 스며들어가 있지 않은 물리, 화학, 생물 교과서와 수업들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21세기 지금 시점에도 70년대에 그랬듯이 ‘민주’가 사치재가 되고 강남좌파처럼 간주되어야 하겠는가? 이런 시대착오적인 정권과 교육부의 방침 하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어떻게 21세기 인류 문명의 주역이 될 수 있을까?
출처 : ‘민주’를 두려워하는 윤석열 교육 < 민들레 광장 < 기사본문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mindl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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