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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5-20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5 “너희는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양의 옷차림을 하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게걸 든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거두어들이고,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거두어들이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모두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잘려 불에 던져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
신뢰 프로세스
요즘 묵상을 하면서 논어를 자주 인용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논어를 많이 인용하고 되새김질 하고 싶습니다. 60년이 넘는 어린 시절에 논어를 처음 대하고 공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오래 동안 논어를 대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살이에 힘들어서 논어를 공부할 새도 없었고, 또 제 전공과 많이 달라서 별로 관심을 두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부터 묵상을 시작하면서 신부님들의 권유도 있었고,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논어의 가르침이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 제 묵상에서 논어를 인용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논어를 이용해서 묵상하고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논어의 본문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기억력이 나빠졌는지 천자문도 다 잊어버렸으니 이제 정말 별 볼일 없는 노인이 되었나 봅니다. 묵상을 하면서 기억을 더듬어 문장을 찾고, 한 글자 한 글자 옮기면서 옛 기억을 더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말씀을 해석해 가는 과정에서 주님께서 왜 그런 가르치심을 주시고자 하셨는지 묵상하려고 애씁니다. 조금 생소하게 느끼실지 몰라도 저와 같이 논어도 공부하실 겸 논어 인용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논어의 자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왈 ; 주충신, 무우불여기자, 과즉물탄개’
(‘子曰 ; 主忠信, 毋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 하고, 자기만 못한 사람을 벗하지 말 것이며, 허물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고쳐라.”
요즘 신뢰프로세스 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남북관계에서 이 말이 가장 우선시 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신뢰프로세스는 모든 사람들이나 공동체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원전부품도 그렇고, 남북관계도 그렇고, 정치가들의 공약도 그렇고, 모든 계약과 거래뿐만 아니라 먹거리 등 신뢰프로세스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래 전 원전부품의 납품비리는 4천5백만 원을 착복하기 위해서 2조5천억 원의 손해를 발생시켰다고 하니 이런 신뢰프로세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좋겠습니까? 가짜가 판을 치고, 짝퉁이 세상을 현혹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위약금의 문제나 환불의 문제 등 우리 주변에는 신뢰프로세스의 문제로 피해를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신뢰프로세스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 신뢰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 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충성은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생활을 할 때 충성입니다. 그러면 신뢰의 과정은 저절로 형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를 위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이 되지 않기 때문에 부정부패와 불의가 세상에 판을 치는 것입니다. 신뢰가 생기지 않고 불신이 만연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는 자기만 못한 벗과는 사귀지 말라고 한 말은 충성과 신의를 위주로 하지 않는 벗과 사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 사귈 사람은 하나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살고 계시니 그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귀면 진실로 모든 사람과 벗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겸손한 사람만 된다면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짓 예언자들이며 상종할 수 없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양의 옷차림을 하고 게걸스런 늑대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고사성어에서 처럼 양 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으로, ①겉은 훌륭해 보이나 속은 그렇지 못한 것과 ② 겉과 속이 서로 다름과 ③ 말과 행동(行動)이 일치(一致)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신뢰프로세스는 허물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고쳐 나가는 과정을 잘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지난날의 과오를 알면서도 반복한다면 신뢰는 구축되지 않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그동안 잘못했던 사실을 반성하고 그 즉시 고쳐 나가면서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갔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질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새롭게 하느님 중심으로 충성스럽고 신의를 위주로 살았으며, 잘못된 것을 알고 그 즉시 고쳤더라면 가시나무에서 포도가 달리도록 접을 붙여 주셨을 것입니다. 아직도 양두구육으로 모든 사람들을 속이고, 거짓 예언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람들을 어찌 본받으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그 사실을 알면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올바르게 고쳐 나가야 합니다. 잘못된 습관과 버릇에서 벗어나 정도(正道)를 찾아 새롭게 시작하는 자세로 우리의 생활을 고쳐야 합니다. 내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의 프로세스를 만들기 위해서 배전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 남북관계에서 우리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공동성명을 발표하고 과연 그대로 지켜 나가면서 북한 백성들을 위해서 평화를 심어주고, 핵무장을 해제한다는 약속을 지킬 것이며, 인권을 회복시켜주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할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기대와 희망을 걸어도 될 것인지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그동안 우리와 모든 세계 사람들에게 신뢰를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전임 대통령들에게서 신뢰심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망한 것과 같이 우리도 다시 북한의 정치가들에게서 신뢰를 찾지 못하면 큰 상처를 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금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말씀을 백성에게 읽어 주고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2,8-13; 23,1-3
그 무렵 8 힐키야 대사제가 사판 서기관에게, “내가 주님의 성전에서 율법서를 발견하였소.” 하고 말하면서,
그 책을 사판에게 주었다. 그것을 읽고 나서,
9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나아갔다. 그는 임금에게 먼저 이렇게 보고하였다.
“임금님의 신하들이 주님의 집에 있는 돈을 쏟아 내어, 주님의 집 공사 책임자들 손에 넘겨주었습니다.”
10 그러고 나서 사판 서기관은 임금에게, “그런데 힐키야 사제가 저에게 책을 한 권 주었습니다.” 하면서,
임금 앞에서 소리 내어 읽었다.
11 그 율법서의 말씀을 듣고 임금은 자기 옷을 찢었다.
12 임금은 힐키야 사제, 사판의 아들 아히캄, 미카야의 아들 악보르,
사판 서기관, 그리고 임금의 시종인 아사야에게 명령하였다.
13 “가서 이번에 발견된 이 책의 말씀을 두고,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주님께 문의하여 주시오.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않고, 우리에 관하여 거기에 쓰여 있는 그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를 거슬러 타오르는 주님의 진노가 크오.”
23,1 임금은 사람을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원로를 소집하였다.
2 임금은 모든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의 모든 주민, 사제들과 예언자들, 낮은 자에서 높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백성을 데리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 주님의 집에서 발견된 계약 책의 모든 말씀을 큰 소리로 읽어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3 그런 다음에 임금은 기둥 곁에 서서, 주님을 따라 걸으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그분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켜, 그 책에 쓰여 있는 계약의 말씀을 실천하기로 주님 앞에서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온 백성이 이 계약에 동의하였다.
축일6월 26일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Josemaria Escriva)
신분 : 설립자, 신부
활동 연도 : 1902-1975년
같은 이름 : 발라게르, 에스끄리바, 요셉마리아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는 1902년 1월 9일 에스파냐의 바르바스트로(Barbastro)에서 아버지 호세 에스크리바(Jose Escriva)와 어머니 마리아 돌로레스 알바스(Maria Dolores Albas)의 여섯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그 해 1월 13일에 세례성사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굳건한 신앙과 그리스도인다운 덕행, 잦은 고해성사와 영성체, 기도를 향한 굳은 의지, 동정 마리아께 대한 신심에 기초한 삶의 모범을 통해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활기차고 건강하며 정직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든지 마음을 열고 모든 근심걱정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호세마리아를 격려해 주었고, 항상 그의 질문에 애정을 갖고 다정하게 응답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는데, 1910년에서 1913년 사이에 그는 세 명의 누이동생이 사망하는 슬픔을 겪었고, 소규모 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에 따른 재정적인 문제로 1915년 그의 가족은 인근 마을인 로그로뇨(Logrono)로 이주하였다.
1917-1918년 겨울에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어떤 일을 경험했다. 그 해 성탄절에 로그로뇨에는 많은 눈이 내렸는데, 어느 날 그는 눈 위에 얼어붙은 발자국을 보았다. 그것은 맨발의 카르멜회 수도자들이 남긴 것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호세마리아는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에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으로, 그는 어렴풋이나마 가장 위대한 사랑을 갈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사제가 되려는 결심을 했고, 그러면 하느님의 뜻을 더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로그로뇨의 신학교에서 사제직을 위한 과정을 시작했고, 1920년 사라고사(Saragossa)에 있는 교황청립 신학대학에 들어가 사제품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했다. 동시에 그는 아버지의 제의와 장상의 허락으로 사라고사의 대학에서 시민법도 함께 전공하였다. 그의 관대하고 활기 있는 성품과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정직하고 침착한 성격은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의 경건한 생활은 동료들에게조차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학문적 열정 또한 동료 신학생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1922년, 20살의 나이에 사라고사의 대주교에 의해 신학교의 감독 또는 학사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시간을 성체 앞에서 기도하며 보냈고, 이는 그의 영성생활이 성체성사에 깊이 뿌리를 내리도록 만들었다. 또한 그는 매일같이 필라르(Pilar)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찾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성모님께 전구하였다.
1924년 11월 27일 그는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을 접했고, 그해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3월 28일 사라고사의 성 카롤루스 신학교 성당에서 디아스 고마라(Diaz Gomara)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았다. 이틀 후 그는 필라르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의 경당에서 첫 번째 장엄미사를 집전하였고, 3월 31일에는 보좌신부로 발령받은 교구의 작은 시골마을인 페르디게라(Perdiguera)로 이동하였다. 1927년 4월 그의 대주교의 승인을 받고 시민법 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마드리드(Madrid)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이 학위는 에스파냐 수도에 있는 중앙 대학에 의해서만 주어졌었다. 마드리드에서 그의 사도적 열정은 그를 다양한 계층의 학생, 예술가, 노동자, 학자, 사제들과의 만남에로 인도했고, 많은 시간을 어린이들과 도시 외곽의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보내게 했다. 동시에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법률을 가르치며 여러 어려움을 헤쳐 나가기도 했다.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일상적이거나 비범한 분야 모두에서 풍부한 은총을 주셨다. 그는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봉사를 통해 많은 열매를 거두었다. 1928년 10월 2일 마드리드에서 피정을 하던 호세마리아 신부는 지난 몇 해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내적인 움직임을 기록했고, 그러면서 어렴풋이 알던 자신의 소명을 보다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오푸스 데이’(Opus Dei, 하느님의 사업이란 뜻)라는 재속 수도회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교회 안에서 새로운 소명의 길을 열어주셨고, 그것은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의 노동을 성화함으로써 사도직의 거룩함과 실천에 응답하도록 전파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몇 달 후인 1930년 2월 14일 하느님께서는 또한 오푸스 데이가 여성들 안에서도 전파될 수 있도록 그를 일깨워주셨다.
그 순간 이후 호세마리아는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남녀들이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도록 양육하는데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을 혁신가나 개혁가로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압도되고 교회에 지속적인 활력을 주시는 성령에 의해 쇄신되어 이웃을 사랑하고 일상생활 안에서 거룩함을 찾도록 도와주는 것이 오푸스 데이의 존재 이유라고 보았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그의 뜻을 따르기 시작했는데, 특별히 대학교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그러했다. 그는 그들의 마음 안에 모든 이에게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결심을 굳히도록 도와주었다. 이 세상의 지식과 문화가 사회 전체를 복음화하기 위한 열쇠가 됨을 깨달은 그는 1933년 대학 안에 ‘DYA 아카데미’라는 센터를 열고 이듬해 사회 복음화를 위해 ‘영성적 고려’라는 책을 처음 발간했으며, 그 이후 372권의 책을 더 출판하였다.
이렇게 오푸스 데이가 그 첫 걸음을 내디디는 동안 1936년에 에스파냐 내전이 발발했다. 마드리드에서도 심각한 종교 박해가 일어났지만 호세마리아는 기도와 인내 그리고 사도적 열정으로 이에 맞서 나갔다. 이 시기는 교회에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영성과 사도직이 성장하고 희망이 빛을 발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1939년 내전이 끝나자 그는 에스파냐 반도 전역에서 사도직 활동에 대한 새로운 활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그는 많은 대학생들과 함께 사회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를 모셔다주며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얼마나 위대한 지를 깨닫도록 해주었다. 특히 내전으로 인해 야기된 에스파냐 사회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용서와 사랑, 평화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많은 주교들이 교구의 성직자와 평신도들 위해 그의 강의를 청했고, 수도회 장상들 역시 그러했다. 그는 1941년 에스파냐 동북부 레리다(Lerida)에서 사제들을 위한 피정 강의를 하던 도중 오푸스 데이의 사도직 안에서 그에게 큰 도움을 주었던 어머니의 선종 소식을 듣기도 했다.
1943년 그는 미사를 집전하면서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교구사제들의 삶에 육화시키기 위한 성 십자가의 사제회(Priestly Society of the Holy Cross)를 오푸스 데이 안에 설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1944년 6월 25일 세 명의 기술자가 사제로 서품되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인 알바로 델 포르틸로(Alvaro del Portillo)는 설립자를 계승하여 오푸스 데이의 대표가 되었다. 성 십자가의 사제회는 교구사제와 사제직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한 영성적 형성과 활동에 있어서 지역교회의 사목자들과 조화를 이루었고, 교구사제로 머물며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실천하는 성 십자가의 사제회에 참여하는 교구사제들은 더욱 많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호세마리아는 오푸스 데이의 정신을 보편교회 전역에 전파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의 사도직 활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46년 그는 오푸스 데이에 대한 교황청의 승인을 얻기 위해 로마로 본부를 옮겼고, 1947년 2월 24일 교황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데크레툼 라우디스’(decretum laudis, 특별법)에 의거해 가승인을 받았으며, 3년 후인 1950년 6월 16일 교회의 최종 승인을 받아 교황청 직속 재속 수도회가 되었다. 이로써 자신의 노동과 자선 그리고 기도로써 오푸스 데이의 사도적 활동에 동참할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 비가톨릭 신자와 심지어 비그리스도인까지도 오푸스 데이의 협력자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호세마리아 신부는 오푸스 데이 본부를 로마에 안착시킨 후 교회가 원하는 곳에서 봉사하며 사도좌와 교계제도에 더욱 일치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건강상의 어려움에 직면해서도 전 세계로 사도직 활동을 확장했고, 이로 인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의 증인으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행하는 것이 참된 덕목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위대할수록 세상은 작아지기 마련이다. 세상 모든 곳에서 주교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의 사도직 안에서 복음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고,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이 흘러넘치도록 하려는 그의 소망은 더욱 커졌다. 그래서 매우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시행되었다. 전문적인 교육을 제공하는 대학, 농업 종사자를 위한 학교, 대학교, 초등학교와 중등학교, 병원과 의료센터 등 그의 활동은 종종 끝도 없는 바다와도 비교되었다.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소집을 발표했을 때 호세마리아는 이 공의회가 만족스런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의 심의 결과로서 교회의 교도권은 거룩함에로의 보편적 부르심, 거룩함과 사도직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전문적인 일, 현세의 노동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가치와 합당한 제한, 내적 생활의 중심이자 기초로서의 거룩한 미사 등 오푸스 데이 정신의 기초적인 측면들을 확인했다. 호세마리아는 공의회의 자문위원으로서 수많은 교부와 전문가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위한 공의회에서 선구자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오푸스 데이의 활동을 통해 공의회의 가르침과 일치하여 공의회의 정신을 촉진하도록 부지런히 일했다. 하지만 그는 조직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내적인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일상생활을 통해 성성(聖性)을 얻을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필요한 것은 기도하기 위해서 그리고 더 깊은 내면의 생활을 위해 투쟁하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때 모든 것은 기도가 되고 또한 모든 것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때문이다. 즉 모든 종류의 일이 기도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기도가 되고 사도직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호세마리아가 생각한 사도직의 기초는 세상 한가운데서 얻은 그의 내적인 체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기도와 성사로써 자라나고 성체성사를 위한 강렬한 사랑으로서 표현되었다.
그는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많은 일정을 수행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단순하고 친밀한 목소리로 하느님과 성사, 그리스도인의 헌신, 노동의 신성함, 그리고 교회와 교황에 대한 사랑을 강조했다. 1975년 6월 26일 정오 호세마리아는 작업실에서 심장 발작으로 선종했다. 그 당시 오푸스 데이는 이미 모든 대륙에 전파되었고, 80개 나라에서 6만여 명이 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선종 이후 많은 사람들이 교황에게 그의 시복시성을 청했고, 1981년 심사가 시작되었다. 1992년 5월 17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수많은 순례자들 앞에서 그의 시복식을 거행했고, 2002년 10월 6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그를 성인품에 올렸다. 교황은 30만 명이 운집한 시성식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상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새 성인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데 발라게르 이 알바스(Josemaria Escriva de Balaguer y Albas)로도 불린다.
오늘 축일을 맞은 호세마리아 에스크리바 (Josemaria Escriva)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