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마지막 애국자 박태준◎
♥️대한민국 마지막 애국자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 ♥️
1927년 경남 동래군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를 따라 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초중고교를 다녔고 와세다대 공대 2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중퇴·귀국했다.
육사 6기로 임관한 그는 6.25 전쟁 당시 경기 포천 지역 1연대 중대장이었다.
군에서 충무무공훈장·화랑무공훈장을 받았고 육군대학 수석 졸업 후
최연소 육사 교무처장, 1군 참모장 등을 지냈다.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부(富)의 중심
34세이던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을 맡은
그는 이후 50년 동안 요직(要職)을 맡았다.
육군 소장 예편→대한중석 사장(3년)→포항종합제철 사장·회장(25년)
·명예회장→민정당 대표·민자당 최고위원·자민련 총재·4선(選) 국회의원→국무총리 …
누가 봐도 한국 현대사에서 ‘권력과 부(富)의 중심에서
누릴 수 있는 걸 다 누린 인생’의 전형이다.
흔히 부패 인사, 독재자 같은 비난을 받기 십상이다.
그런데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을 지낸 좌파 진영
소설가인 조정래씨는 “박태준은 한국의 간디이다.
나는 그의 이름에 마하트마를 붙여
‘마하트마 박’으로 부르고 싶다”고 했다,
(2011년 12월 17일
서울 현충원 영결식장 )
한 사람의 일생이 ‘성(聖)스러운’이라는 뜻의 ‘마하트마(Mahatma)’로까지
칭송받는 것은 여간 일이 아니다. 박태준 회장(이하 청암으로
호칭)에게 어떤 남다른 측면이 있는 걸까?
통상대신(通商大臣) 시절 포항제철을 방문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일본 총리의 회고이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느낀 것은 종업원들이 너 나 없이
마음으로부터 박태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표현할수 없는 감명을 거기서 받았다.”
◇용광로 같은 애국심과 도덕성
이는 청암이 자신의 좌우명(座右銘), 즉 ‘짧은 인생을
영원(永遠)히 조국에’에 철저해 탁월한 업무 능력과
강력한 도덕성 없이는 나올 수 없는 평가이다.
그는 실제로 1964년 12월 국영기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을 맡은지
1년 만에 만년적자(萬年赤字) 회사를 흑자로 전환시켰다.
보통 4~5년 걸리는 종합제철소 건설 작업을 제철소 구경조차
한 적 없는 38명과 함께 착공 3년 3개월만에 완공하여 마쳤다.
조업 첫 해인 1973년 포항제철은 매출액 1억달러 ·순이익 1,200만 달러를 냈다
가동 후 50년 가까이 적자였던 일본 동종 업계와 비교하면 ‘기적’적인 일이다.
포항제철은 세계 철강사에서 제철소 가동 첫해부터 이익을 낸 유일한 기업이다.
청암은 제철소 공기(工期) 단축을 위해 하루 24시간 작업을
지시해 놓고 자신도 매일 3~4시간 잠 자며 현장을 챙겼다.
1968년 포항제철 출범부터 1992년 광양제철소 2기 완공까지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포항 효자동 사택과 회사에서 지내 ‘효자사 주지스님’으로 불렸다.
그는 ‘솔선수범’하는 경영자인 동시에 ‘무사욕(無私慾)’의 리더였다.
피와 땀을 쏟아 창업하고 성장시킨 포스코에서 25년 만에 물러날 때,
그는 한 주의 공로주(功勞株)는커녕 퇴직금 1원도 거부했다.
1988년 포항제철 임직원 1만 9,419명에게 전체 발행 주식의 10%를
우리 사주(社株)로 배정했을 때도 같았다.
명예회장으로 복귀한 뒤 “노후를 생각해 조금이라도 스톡옵션을 받으시라”는
주변의 권유에 그는 “포항제철은 선조(先祖)의 피로 세운 회사이다.
공적인 일을 할때 사욕(私慾)을 갖지 말라!”고 일갈했다.
◇주식·퇴직금 ‘0원’... 73세에 전세살이
“청암의 도덕성은 무서울 정도였다.
그분의 리더십 근간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이었다”
(황경로·포스코 2대 회장)는 증언 그대로이다.
인사 청탁과 금품 주고받기가 난무하던 1956년 11월,
그는 세칭 ‘노른자위’ 자리인 국방부 인사과장이 됐다.
그러나 청암은 유혹 및 압력과 싸우다가 10여개월 만에
25사단 참모장 근무를 자원해 갔다.
포항제철 사장 시절 아버지가
“문중 사람들을 좀 써주면 안 되겠냐”고 하자,
청암은 그대로 방을 나와 회사로 돌아갔다.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준 하사금을 합쳐
서울 북아현동에 집을 마련하기까지 그는 8년 새 15번 전셋집을 전전했다.
38년간 살던 집을 2000년에 팔아 생긴 돈 14억 5,000만원 중
10억원을 아름다운 재단에 기부하고 73세에
다시 전세살이를 했다.
그가 사후에 남긴 재산은 전무(全無)했고, 말년에 생활비와
병원비는 자녀 5명(4녀 1남)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청암을 다룬 평전 <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의 저자인
이대환 작가는 이렇게 평가한다.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였던 포항제철 25년 동안
박태준은 한 푼의 비자금도 만들지 않았다.
이는 누구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20세기 후반 한국사에 길이 기록될 업적이다.
이거야말로 박태준의 이름을 포철 용광로만큼이나 칭송(稱頌)해야 할 일이다.”
◇“천하는 개인 것이 아니다”...‘멸사봉공’
‘천하위공(天下爲公)·천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公]의 것.
이 한 마디는 청암의 생애를 관통하는 또 다른 정신적 기둥이다.
1970년 포항제철에 사상 처음 6,000만 원의 보험회사 리베이트 자금이 생겼을 때이다.
청암이 이 돈을 청와대로 들고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포항제철의 예산에서
빼낸 것이 아니고 공돈이니 통치 자금에 보태 쓰시라”고 건네자,
박 대통령은 “임자 마음대로 써라”며 돌려주었다.
청암은 그러나 이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거기에다 회삿돈을 더 보태 임직원 자녀들을 위한 제철장학회를 세웠다.
이렇게 세운 학교만 포항과 광양에 모두 27개이다.
한국 기업 최초로 임직원 자녀 대상 전액 대학 장학금 제도와
한국 최초의 연구 중심대학(포항공대)은 이렇게 탄생했다.
국영기업 최고경영자(CEO)로 30여년 재임하는 동안,
청암에게는 고가(高價)의 설비 구매나 원료 도입 결정을 둘러싼
정치 자금 협조와 인사 청탁, 리베이트 요청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불법 뇌물인 정치 자금을 한 푼도 내지 않고 ‘정치 무풍지대’를 고수했다.
이는 최고 권력자인 박정희 대통령의 무한 신뢰에다가 청암의
‘천하위공’ 정신이 어우러진 덕분이다.
청암이 현실과 적당히 타협했다면, 포항제철은 부실 회사로 추락하거나
적자를 걱정하는 2~3류 기업이 됐을 것이다.
1965년 한일(韓日) 국교 정상화를 하면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 일부로 세운 ‘국민 기업’이라는 칭호도 퇴색했을 게 분명하다,
장교 시절 당번병을 쓰지 않았던 청암은 통행금지를 지키다가 첫 아이를 잃었다.
그는 멸사봉공(滅私奉公)과 선공후사(先公後私)를 입으로만 외치지 않고
국제 가격보다 20~40% 저렴하게 양질의 철강 제품을 국내
기업들에 공급하면서 흑자 행진을 이어가는
‘제철보국(製鐵報國) 경영’에 목숨 걸었다.
그는 회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는 “우리가 실패하면 조상에게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 모두 우향우(右向右)서 영일만 바다에 투신하자”고 외쳤다.
불굴의 정신력으로 그때마다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갔다.
1979년 박정희 서거 후 청암은 “포항제철을 정치 외풍에서 지키기 위해” 정치권에 발을 들여놨다.
1990년 3당 합당 후 민정계의 수장(首長·최고위원)이 된 그는 김영삼 대통령 후보와의 불화로
1992년 말 민자당 최고위원·포항제철 회장·국회의원직에서 모두 물러났다.
소설가 조정래씨는 다른 추도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너나 없이 돈에 홀려 정신 잃은 세상에서 박태준의 길을 따라가기란
너무 어렵고, 어쩌면 그 분은 이 시대에 마지막 애국자인지 모른다. (중략)
정직·청렴한 그 분을 바로 아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바르게 세우는 길이다.”
◇성숙한 일본관...지일과 용일`극일(知日과 用日·克日)
청암의 남다른 세 번째 측면은 성숙한 대일(對日) 자세이다.
일제강점기에 ...
- 옮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