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5번째 편지 - 왜 첫 번째 서양고전은 일리아스인가?
얼마 전 제가 속한 고전 공부 모임에서 저에게 약 15분짜리 인트로 강의를 부탁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할까 고민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행복도 이야기할 수 있고, 제가 하는 사업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고전 공부 모임인 만큼 고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제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이런 질문으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왜 서양 고전은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시작할까요?”
사랑 이야기도 있고, 창조 이야기도 있는데 하필이면 전쟁 이야기를 서양 사람들은 자신들이 읽어야 할 고전의 첫 번째로 꼽아 왔을까요?
저는 일리아스가 다루고 있는 주제 중에 <영웅>에 주목했습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입니다. 그의 어머니 테티스는 바다의 요정입니다. 펠레우스와 결혼하여 아들 아킬레우스를 낳습니다.
일리아스에는 아킬레우스가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셨소, 은빛 발을 가지신 여신 테티스께서, 나를/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망의 전령이 죽음의 끝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만일 이곳에 남아 머물면서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둘러싸고 싸우면/ 귀향의 길은 내게 사라지겠지만, 내 명성은 불멸할 것이라고./ 그러나 만일 내가 나의 사랑하는 조국의 땅으로, 나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고귀한 명성은 내게 사라지겠지만, 내 수명은 오랫동안 길고 길게/ 지속될 것이며, 죽음의 끝은 나를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어머니 테티스는 아들 아켈레우스에게 <영웅이 되어 불멸의 명성을 얻지만 일찍 죽는 삶>과 <평범하지만 오래도록 천수를 다하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삶> 중에 어느 삶을 살 것인지 묻습니다.
이 질문은 그리스 시대 이후 서양의 모든 10대 젊은이들이 받은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따라 누군가는 <불멸의 영웅이 되는 삶>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행복한 시민이 되는 삶>을 선택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핵심은 '영웅이 되려면 대신 너의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웅에게는 영웅적인 삶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웅적인 죽음만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물들도 죽어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링컨도 케네디도 그렇습니다. 한국 역사의 영웅인 이순신, 안중근도 다 일찍 죽어서 영웅이 되었습니다. 늙어 죽은 영웅은 없습니다.
저는 강의를 하다가 앞줄에 앉은 선배 기업인에게 물었습니다. “선배님은 일찍 죽는 영웅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래도록 사는 시민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일찍 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상식적으로 아킬레우스는 일찍 죽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은 아킬레우스의 선택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만든 호메로스가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요청한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가 지속 가능하려면 누군가가 공동체를 위해 희생해 주어야 합니다. 왕정이 아닌 공화정을 채택한 그리스는 모병제였을 것입니다. 모병제에서는 스스로 자진해서 죽음을 불사하는 전사가 있어야 합니다.
호메로스는 그 모델을 아킬레우스로 삼고 일리아스에서 그를 칭송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 이후 서양의 모든 젊은이들이 아킬레우스의 뒤를 따라 전쟁터로 자진해서 나가 장렬하게 전사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 때에도 서양의 귀족들은 자진해서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전사하였습니다. 서양 귀족 집안의 격을 따질 때 집안에 전쟁에 나가 죽은 남자가 몇 명이 되는지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전통은 영국 왕실에도 이어졌습니다. 윌리엄 4세(1765-1837)는 왕자 시절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였고, 미국 조지 워싱턴 장군은 그를 납치하는 계획도 세웠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1945년 도쿄만에서 일본 측 대표가 미주리함에 올라 항복문서에 서명할 때 그 현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미국 대학교에 가보면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학생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양은 영웅을 권장하고 숭배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웅 숭배론은 일본을 통해 한국에 유입되었고 현재까지도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는 중요한 프레임이 되고 있습니다.
영웅은 죽음을 전제로 할 때 그 위대성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근세에 접어들면서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 영웅의 명성만 가지려는 사이비들이 판을 치게 되자 토마스 칼라일은 <영웅숭배론>에서 다시금 영웅이 무엇인지 갈파합니다.
“영웅숭배가 오늘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다. 우리에게 영웅이 보내졌을 때 영웅은 북극성처럼 빛난다. 너무 많은 가짜들이 판을 치고 있다.” 호메로스의 착실한 제자 칼라일은 다시금 영웅숭배론에서 일리아스의 주제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에 우리 모두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크든 작든 우리는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영웅이 되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평범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족과의 행복 등을 포기하였습니다. 언젠가 영웅이 되면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상받으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몰랐습니다. 영웅이 되려면 그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호메로스가 도시국가 그리스를 위해 만든 영웅이라는 사고의 틀 속에 갇혀 평생을 보내고 자식에게까지 그 틀을 강요해 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습니다.
저는 지난 몇 년간 호메로스의 영웅 프레임에 입각한 서양 고전들을 공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영웅 프레임이 더 고착되지 않았을까 자문해 봅니다. 영웅이 되는 것만이 성공한 삶이라는 틀에 갇힌 것은 아닐까요?
그저 평범한 시민으로 사는 보통의 삶이 왜 초라하게 느껴져야 할까요? 영웅을 전쟁터로 보내고 그들을 숭배해 주는 대신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 시민들이야말로 세상의 진정한 주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라는 슬라이드를 강의 가장 마지막에 넣어두었습니다.
이번 한 주도 웃으며 시작하세요.
2023.5.30. 조근호 드림
<조근호의 월요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