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너머
- 나희덕
나는 누군가의 창문을 찍을 뿐이다
그리 대단한 성과는 아니다, 그는 말했다*
그의 사진 속에는
흰 눈을 맞고 서 있는 우체부가 있고
빨간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여자가 있고
신호등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눈처럼 녹기 쉽고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사진 속에서
피사체는 왜 어둡고 흐릿한지
눈 내리는 거리는 얼마나 자욱한지
빗방울이 맺힌 유리창은 어떻게 어룽거리는지
들릴 듯 안 들릴 듯하고
보일 듯 안 보일 듯하고
표면과 심연을 구별하기 어렵고
명료한 것이 갑자기 흐려지거나 불투명해지기도 하는
렌즈 또는 유리창 너머의 세계
그의 사진 속에서 유리는
때로 액체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리라는 물질 덕분에
그는 세계를 낯설게 보는 법을 배웠다
피사체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법을
그러니 남의 집 창문이나 찍으며 한 생애를 보낸다 해도
후회하거나 주눅 들 필요는 없다
평생 뉴욕 이스트 10번가 작은 아파트에 살았던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존경했다
또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살아가는 즐거움을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은 유리창 너머에서 일어나고 지나갔을 뿐
누군가의 왼쪽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게
사진의 목적이라는 그의 말처럼
* 사울 레이터, 《영원히 사울 레이터》, 이지민 옮김, 월북, 2022, 165쪽.
―격월간 《현대시학》(2024,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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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합니다
그래서 사진과 언론 기사를 그대로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세상사는 실재로는 엄청난 배경이 스며있는 것인데도 그걸 간과합니다
어제 수도 서울 도심에 10만 인파가 모여 시위를 벌였답니다
벌써 다섯번 째 대규모 시위이지만 해석은 구구해서 옳고 그름이 헷갈립니다
어쩌면 유리창 너머에서 일어나는 일로 치부하는 버릇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저 평범ㅎ게 일상을 누리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마저도 낯선 풍경일 뿐일수도 있으니까요
대놓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해서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하늘에 종주먹질 한다고 해서 용감한 것도 아니더라구요
사진의 목적이 누군가의 왼쪽 귀를 살살 갖지럽히기 위함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 눈길이 오래 머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