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추관 형조에는 기존에 없던 여러 관서를 새로 설치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신문고를 관장하는 로고원(路鼓院), 먼 변방에 해당하는 삼면 바다의 섬에 사는 백성과 북쪽의 4군 6진을 따로 관장하는 수원사(綏遠司), 향리(鄕吏)와 저리(邸吏)를 관장하는 장서원(掌胥院), 율(律)·도(度)·량(量)·형(衡)의 통일을 관장하는 양형사(量衡司), 오늘날 등기소와 공증인을 겸한 듯한 권계사(券契司) 등이다. 기왕의 공권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백성의 고충은 공권력이 바르게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따라 나타나는 문제도 또 준비해야 한다. 도량형의 통일과 권계사의 설립은 그 자체로 많은 분쟁을 줄일 수 있다.
로고원과 수원사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백성을 위한 관서라면, 장서원·양형사·권계사는 점점 늘어나는 교역량을 투명하게 하자는 것이 주다. 이러한 관사들을 형조 관할로 둔다는 것이 의아하지만, 형벌과 행정벌이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를 형조에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장서원이 교역량과 관련이 있는 것은 향리뿐 아니라 저리도 관장하기 때문이다. 邸吏는 점점 貢人으로 변해가는데, 공인은 지방에서 바쳐야 할 공물을 대신 납품하는 사람들이다. 지방에서는 이들에게 공물대신 돈을 주고, 경저리·영저리는 그 돈으로 지방에서 바쳐야 할 물건을 감영이나 서울 현지에서 사서 관에 납품하는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제도가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권세가와 저리, 수령, 향리가 결탁해서 농간을 부리니, 밑바닥 백성의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선생이 본 그 시대의 무능과 부정부패, 그에 비례하는 백성들의 고통, 그것을 구제하고자 하는 선생의 커고도 디테일한 밑그림은 지금 봐도 생생하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만큼 ‘이대로 두고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나서야 그만둘 것이다’고 몇 번이나 외쳤던 선생의 그 말씀도 느낌이 올 것 같다. 지금 현실을 대하면 더욱.
[]은 선생의 원주이며, *는 역주임.
추관 형조
노고원(路鼓院)[경국대전에는 금부의 당직관이 신문고를 관장하도록 한다] 에 제조(提調)로 중대부(中大夫) 1인, 판관으로 중사(中士) 2인, 봉사(奉事)로 하사(下士) 2인을 둔다. 〇서리(書吏) 2인, 조예(皁隷) 4인을 둔다.
노고원이란 당ㆍ송 때의 등문고원(登聞鼓院)입니다.
〇신이 삼가 살피건대, (중략)
우리나라도 태종(太宗) 4년(1404)에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해서 아랫사람의 원통한 사정이 통하도록 했습니다. 다만 고원(鼓院 *북을 설치하고 담당하는 곳)이 없고 또 북이 대궐 안에 있어서 출입제한이 지극히 엄했으므로 오직 서울 진신(搢紳) 집안의 사람만이 (필요하면) 조복을 입고 들어가서 치게 됩니다. 먼 지방 천한 백성들이야 그 북을 한 번 만져볼 길도 없는데, 하물며 감히 치는 것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으로는, 단봉문(丹鳳門)이 편전(便殿)에서 가장 가까우니, 단봉문 밖에다 집 하나를 사고 높은 다락을 세워서 노고원(路鼓院)을 만들고, 무릇 원통한 일이 있는 자는 서장(書狀)을 품고 원에 와서 다락에 올라 북을 치면서 서장을 원랑(院郞)에게 주면 원랑은 비록 죄인과 악인의 패려하고 망령된 말이라도 각하시키는 일이 없이 그 서장을 바삐 정원(政院)에 보내서 조정의 조치를 듣도록 하면, 참으로 바꾸지 못할 좋은 법이 될 것으로 여겨집니다.
(생략)
수원사(綏遠司)에 제조로 중대부 1인, 도정(都正)으로 하대부 1인, 안찰(按察)로 중사 6인, 주사(主事) 중사 2인을 둔다. 〇서리 4인, 조례 8인을 둔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먼 지역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것은, 어진 왕의 큰 정사입니다. 우리나라는 지역이 편소하여 북쪽은 2천여 리에 불과하고 남쪽은 1천 리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북쪽은 모두 대륙과 연속된 지역이어서, 폐사군(廢四郡) 너머에는 왕의 덕화(德化)가 일찍이 이르지 못했습니다. 오직 서남쪽 바다 여러 섬이, 그중 큰 것은 둘레가 100리나 되고, 작은 것도 40~50리로, 별이나 바둑알처럼 펼쳐져 있고, 작고 큰 것이 서로 끼여서, 수효가 무려 1천여 개이니, 이것이 나라의 바깥 울타리입니다. 그런데 개벽 이래 조정에서 일찍이 신하를 보내 이 땅을 다스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해 고을끼리 각자 자력으로 서로 부리고 붙여서 강한 자는 많이 차지하고 약한 자는 적게 얻었습니다.
한 무더기 푸른 산이 분명히 이 고을 앞에 있는데 그 소속된 고을을 물으면 수백 리 밖의 아주 먼 고을에서 관할한다고 합니다. 또 명목은 고을에 예속되었으나 실상은 다른 곳에 매여서, 혹 궁방(宮房)이 절수(折受) 받았고, 혹은 군문(軍門)에 획급(劃給) 되었으며, 혹은 고을 토호(土豪)에게 공물을 실어가고, 혹은 관리와 계(契)를 만들기도 합니다. 진ㆍ보(鎭堡)가 있는 곳은 수영(水營)에 매였고, 별장(別將)이 있는 곳은 경영(京營)에 예속되었는데, 간사한 짓이 사방에서 나와 제멋대로 백성들의 골수를 뽑고 피부를 벗겨갈 것만 생각합니다. 비록 고을에 가서 호소하고자 해도 풍파가 험해서 가자면 열흘이나 걸리고, 또는 아전들이 막아서 지척이건만 통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모든 해도(海島) 백성들은 비록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억울함을 참으며 관청 출입은 맹세코 하지 않습니다. 모든 어장이나 염전이 한 번 세안(稅案)에 들면 비록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몇 번 지나가도 면할 수 없고, 작은 배라도 한 번 세안(稅案)에 들었다 하면, 비록 주인이 몇 번 바뀌어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무릇 싸우다가 사람을 죽였더라도 예사로 사적으로 합의해 버리며, 타국의 배도 태반이나 숨기고 있다가 흉년이 들면 처자를 이끌고 일본에 들어가, 표류한 사람이라고 거짓으로 일컬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도둑이 이르면 병기와 양식을 가지고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해서 제멋대로 병진(兵陳)을 만들어 조정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합니다. 이는 대개 신라·고려 때부터 니, 그 유래가 오래되었습니다.
신이 오랫동안 바닷가에 살아서 그 실정을 익히 알게 되자,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나라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섬을 관장하고, 그 명칭을 수원사(綏遠司)라 하여, 그 호적(戶籍)과 전적(田籍)을 맡고 부세를 고르게 하며, 백성들에 대한 침탈을 금하고, 질고(疾苦)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법을 세우는 초기에는 감찰어사를 나누어 파견하되 규정을 만들어주고, 여러 섬을 순행하면서 강계(彊界)를 바르게 고치고 호구를 기록하며 폐막(弊瘼)을 물은 다음, 돌아와 모여서 법제를 편저(編著)하여 여러 섬에 반포하고, 그 법을 삼가 따르도록 합니다. 또 3~4년마다 본사 낭관(本司郞官)을 보내 여러 섬을 암행하면서 교활한 짓을 살피며, 또 섬 백성 중에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있는 자는 직접 본사에 호소하도록 하여, 여러 섬 백성에게 의지할 곳이 있도록 하면, 참으로 먼 곳 백성을 편하게 하는 큰 정사가 될 것입니다.
〇어떤 사람은 “나라의 재력이 빈약한데 무엇으로 관직을 증설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섬은 우리나라의 깊은 수풀림과 같으니, 진실로 경영만 잘하면 장차 이름도 없는 물건이, 물이 솟아나듯, 산이 일어나듯 하여, 수원사는 장차 호조와 같게 될 참인데, 어찌 낭관 두어 사람이 다 먹을 수 있는 정도이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나주 관할 섬에 사는 백성을 만나서 그 고통스러운 일을 물은즉, 열두 섬(島)에서 해마다 읍 주인에게 증여하는 곡식이 6천여 섬이고, 돈·솜·생선·건어물 따위 여러 가지 물건이 또 이와 맞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나주 한 곳 소교(小校)가 먹는 것입니다. 지금 8도 수령의 1년 봉급이 비록 큰 읍이라도 1천 석이 못되는데, 여러 읍의 소교(小校)들이 먹는 것이 이와 같다면, 어찌 나라에 법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 6천 섬만을 수원사에다 붙이더라도 풍족한 관청이 되기에 족할 것입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수원사를 세워지면, 제주와 폐사군(廢四郡) 및 두만강 아래 6진(六鎭)의 일도 관장함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직장편(職掌篇)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〇또 생각건대 제조(提調) 한 자리는 형조 참판이 예겸(例兼)하고, 도정(都正) 한 자리는 부제학이 예겸해서 그 권세를 힘있게 해야 합니다. 안찰랑(按察郞) 여섯 자리는 경기·사천(沙川)·완남(完南)·무남(武南)·황서(潢西)·영남(嶺南)의 감찰들에게 예겸하도록 하며, 오직 주부(主簿) 두 자리만 신규로 증설하는 것입니다.
장서원(掌胥院)에는 제조로 경(卿) 1인, 도정으로 하대부 1인, 첨정(僉正)으로 상사 1인, 안찰(按察)로 중사 2인을 둔다. 〇서리 2인, 조례 10인을 둔다.
(중략)
조종조(祖宗朝)에서 백성을 위해 깊이, 멀리 염려한 것이 이와 같건만 지금은 가로막혀 시행되지 못하니, 아! 어찌하겠습니까? 신이 오래도록 민간에 있으면서 향리들의 일을 익히 보았습니다. 그 나라를 병들게 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짓이 끝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향리론(鄕吏論)》 열 편을 지어서 그 폐단을 갖추어 말했거니와, 진실로 이때라도 바로잡지 않으면 앞으로 닥쳐올 화란(禍難)은 반드시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에 이를 것입니다. 나라가 다 망하고, 백성이 다 죽은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니, 신이 감히 실정을 과장한 말이 아닙니다. 별도로 한 관청을 세워서 전적으로 전국의 향리를 관장하도록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정원을 정하고, 그 조례를 반포하며, 그 한계를 엄하게 해서, 한 가지라도 위반하는 것이 있으면 곧 본원(本院)에서 거론하여 따지게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거의 그 처음 발하는 불꽃을 없애고, 그 흘러가는 물살을 돌이킬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신이 또 살피건대, 저리(邸吏)의 폐단이 향리보다 심합니다. 신이 어릴 때 보니, 이른바 경주인(京主人)·영주인(營主人)이라는 것은 모두 천한 종 하급 졸개들로서 허리를 굽히고 달리면서 사역(使役)을 받드는데, 대개 그때는 늠료(廩料)가 빈약하고 권력이 성하지 못했으므로 비천한 자가 맡았던 것입니다. 수십 년 이래로 세상 물정이 크게 변하고 조정 기강이 날로 무너져서 경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이 혹 8천 냥이나 되며, 영주인 자리를 매매하는 값은 혹 1만 냥에 이르기도 합니다. 대개 그 역가(役價)가 날로 증가되어 남는 이익이 매우 많으므로 값이 전보다 100배나 되었습니다. 값이 100배인즉 이익이 100배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이익이 100배인즉 백성을 벗겨낸 물건이 100배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경저(京邸)와 영저(營邸)에는 모두 포악하고 간사한 자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재물이 매우 풍부하고 권력이 더욱 강해지니 백성을 벗겨내는 것도 더욱 심한바, 백성의 큰 병통으로는 이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까닭이 넷인데, 첫째, 조정의 높은 신하들이 저리를 사기 때문이고, 둘째, 수령이 뇌물을 받기 때문이며, 셋째, 감사가 법을 어기는 일이 많기 때문이고, 넷째, 수령이 염문(廉問)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이래 문무 관료들이 남몰래 저리 자리를 사들여 하인에게 시키고, 자신은 앉아서 그 이익을 거두어들입니다.
이리하여 진짜 저리는 당(堂) 위에 앉았는데 가짜 저리가 뜰 아래 엎드려있으니, 무릇 저리가 고소하는 일이 있으면 위에서 극진하게 따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경주인의 권세가 날로 더하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입니다. 또 모든 저리는 수령의 집에 뇌물을 보내고 역가를 증액하도록 요청하는데, 뇌물이 다섯이면 역가도 다섯이 보태어지고, 뇌물이 열이면 역가도 열이 보태어집니다. 수령은 한때 뇌물을 먹는 것뿐이지만 저리는 무궁한 이익를 누리니, 이것이 경주인의 이익이 날로 보태어지고 달로 성해지는 까닭입니다.
(중략)
신의 생각에는 서울과 지방 저리도 또한 장서원에서 주관하여 그 법제를 바로잡고, 그 횡포를 금단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양형사(量衡司)에는 제조로 공(公) 1인과 경 2인, 도정으로 하대부 1인, 첨정으로 상사 2인, 안찰랑(按察郞) 12인, 주사(主事)로 중사 2인을 둔다. 〇서리 2인, 조례 12인인을 둔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율(律, *년월일을 정하는 책력)·도(度, *길이를 재는 자)·양(量, *되, 말 등)·형(衡, *저울)을 한결같게 하는 것은 왕의 대법(大法)입니다. (중략)
그런데 도·양·형의 무법(無法)이 우리나라보다 심한 데가 없습니다. 한 성(城) 안이라도 저자마다 같지 않고, 한 고을 안에도 마을마다 같지 않으며, 한 마을 안에도 집집마다 같지 않고, 한 집안에서도 거두고 내는 것이 같지 않아서,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전들은 이것으로 간사한 짓을 부리고, 장사치는 의심하고 현혹되어 서로 통하지 못합니다. 묘당(廟堂)에 있는 신하는 시가(時價)를 들어도 그것으로 사방의 실정을 알 수가 없고, 담당 신하는 수입을 요량해서 지출할 수가 없으며, 감수(監守)하는 신하는 문부(文簿)를 상고해서 실수(實數)를 책임지울 기준이 없습니다. 신이 일찍이 보니, 솜(棉絮) 1푸대가 동쪽 집 저울로는 4근이었고 서쪽 집의 저울로는 12근이 되더니, 저자에 팔려고 한즉 32근이나 되었으며, 관청에 들어가니 무려 48근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조하는 집에 주니 도로 10근이라 하는바, 천하에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일이었습니다.
신이 생각에는 온전한 한 관청을 세워 이 일을 관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무릇 서울의 전 관서와 전국의 도량형이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있거나 저울눈에 어김이 있게 하는 자는 극률(極律)을 써서, 그 사람은 죽이고 그 재물은 몰수하며, 그 관원을 처벌하고 그 법령을 선포하여 온 나라 백성에게 모두 이보다 더 엄중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런 다음이라야 법제를 논할 수가 있으며 일상의 쓰임을 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본 관청에서 해마다 저울과 자 1천 200개씩을 만들어서 12성에다 반포하면, 12성에서는 해마다 저울과 자 1만 개를 만들어서 본사에 실어오고, 또 해마다 저울과 자 수만 개를 만들어서 민간에 주는데 모두 그 값을 받습니다.
(생략)
권계사(券契司)에 제조로 중대부 1인, 주부로 중사 2인을 둔다. 〇서리 2인, 조례 8인을 둔다
생각건대, 《주례》에, 질제(質劑 *매매 또는 교역)와 권계(券契)를 모두 유사(有司)가 관장했는바, 그 속임수를 금하고 쟁송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중국법은 무릇 매매하는 일이 있으면 홍계(紅契 *법적으로 승인된 집문서 등)를 요구하는데, 홍계란 인권(印券)입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궁실·전원(田園)·노비에 대해서 모두 개인 스스로 문서와 말을 만들 뿐, 일찍이 법사(法司)의 인증받은 문서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사기가 탄로나고 쟁송이 일어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법사(法司)에 통하는데, 법사인들 무엇으로 그 사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지금 마땅히 철(鐵)로 작은 판을 만들어 오직 연월일(年月日) 두어 글자 및 권계사 제준(券契司題準) 등의 글자를 쓰고, 매매하는 사람의 성명 및 물건의 명목 등을 써넣을 공간을 남겨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아래에는 용(龍)의 머리 구름(雲) 따위를 머리털같이 가늘게 새겨서 위조하지 못하도록 한 다음 단단한 종이에다 박아내어, 매양 매매하는 일이 있거나 혹 자녀에게 분급(分給)할 일이 있으면 모두 본사에 와서 문권(文券)을 청구하며, 관에서는 글자를 써넣고 도장을 찍어서 발급하는 한편, 별도 문권에다 기록해서 본사에 비치할 것이며 그 대가로 그 물건값의 100분의 1을 관에다 바치도록 할 것이고, 해마다 문권 수만 장을 여러 성에 나눠주어서 서울과 지방이 모두 같게 하였다가 무릇 송사하는 자가 있으면 먼저 그 권계를 상고하고, 만약 관에서 발급한 문권이 아니면 곧 접수[聽理]하지 않고 그 재물은 관에서 몰수합니다.
이것 또한 왕이 만민을 제어하는 대권(大權)입니다. 방채(放債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줌)·세대(稅貸)·전당(典當) 같은 것도 또한 문권을 받도록 하나 별도 문적에는 기록하지 않으며, 기구 같은 작은 물건으로서 값이 50냥 미만인 것은 사적인 문권으로 하는 것을 허가하나 궁실·전원·노비 따위는 비록 적더라도 허가하지 말 것입니다.
제조 1자리는 형조판서가 예겸합니다.
생각건대, 질제와 권계는 본시 지관(地官) 소속이었으나 법금(法禁)과 관계되는 것이므로 지금은 형조에 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