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기존 학계의 지배층이 동물계를 수컷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남성들이었고 또 많은 분야에서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이 문제를 악화시켰다. 연구에 영감을 주는 질문 역시 남성의 관점에서 던져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암컷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수컷은 사건의 중심이자 모델 생물이 되었으며, 암컷이 존재하는 토대이고 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반면 ‘엉망진창인 호르몬’에 좌우되는 암컷은 주요 사건과는 상관없이 주변부에서 산만하게 얼쩡대는 이상치이므로 수컷과 동일한 수준의 과학적 검토를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암컷의 몸과 행동은 조사되지 않았다. 그로 인한 데이터 공백이 급기야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암컷은 언제까지나 수컷의 노력을 보조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취급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연구된 적이 없으니 들이밀 결과가 있을 리가 없다.
(54-55)
X 염색체와 비교했을 때 Y 염색체는 가장 약한 녀석이다. 제대로 크지도 못했고 유전물질도 훨씬 적게 갖고 있다. 그러나 염색체에서는 크기보다 그 안에서 무엇을 암호화하는지가 더 중요하다. 실제로 Y 염색체에는 SRY(Sex-determining Region of the Y, Y 염색에의 성결정 지역)라는 아주 중요한 성결정 유전자가 자리 잡고 있다.
(74)
조직개념은 테스토스테론의 전능함만을 강조해왔지만 에스트로겐 역시 강력한 호르몬이라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에스트로겐은 앞에서 본 것처럼 개구리의 성을 전환하는 능력과 함께 테스토테론만큼이나 발생 초기에 동일한 조직에 영향력을 발휘한다고 드러났다. 또한 크루스는 에스트로겐을 차단하여 발생 중인 도마뱀 암컷의 성을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에스트로겐은 분명 암수의 성 발달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한 이후에도 성적 행동을 활성화하는 근본적인 책임을 맡고 있다. 이 ‘여성’ 성 호르몬은 정소와 정자를 만드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일부 종에서는 수컷의 교미 행동을 자극한다고 밝혀졌다.
(122)
동물의 왕국에서 암컷은 수컷에게 빼앗긴 성적 운명의 통제권과 알의 친자 결정권을 되찾기 시작했다. DNA 검사 기술로 도마뱀에서 뱀, 바닷가재까지 다른 암컷들의 정절이 속속 철회되었다. 일처다부의 경향은 모든 척추동물에서 발견되었고 무척추동물에서도 예외가 아닌 표준으로 선언되었다. 한편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는 진정한 성적 일부일처는 극히 드물어 지금까지 알려진 종의 7퍼센트 미만에서 확인되었다.
(133-134)
여성의 성적 취향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500만 년 동안 어떻게 변해왔는지 추측의 영역이다. 인간은 오늘날 사회적으로 일부일처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건 동부요정굴뚝새도 마찬가지다. 데이비드 M. 버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는 모든 여성이 아이들을 가장 잘 부양하기 위해 궁극적으로 일부일처를 추구한다는 생각을 즐길지도 모르지만, 만약 정절이 여성의 타고난 자질이라면 왜 그렇게 많은 문화에서 여성의 성생활을 통제하려고 애를 쓰겠냐고 허디는 묻는다. 통제 수단이 비방의 말이든 이혼이든 심하게는 할례이든 간에, 그 이면에는 여성을 방치하면 성적으로 난잡해진다는 보편에 가까운 의심이 깔려 있다. 허디가 지지하는 새로운 관점은 여성이 가진 성적 성향의 잠재력을 억제하고 제한하기 위해 가부장적 사회 체계가 진화했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는 여성의 정절이 대단히 유연하게 작용한다. 처한 환경과 다양한 선택지에 따라 달라질 뿐, 아무리 유행하는 패러다임이라도 배우체의 숙명으로 여성의 정절을 예측할 수는 없다.
(243)
“옥시토신은 근본적으로 엄마가 되는 실질적인 생리 과정과 연관되어 있어요.” 로빈슨이 내게 설명했다. 이 호르몬은 부드러운 근육 수축제로 작용하여 포유류에서 자궁이 아기를 밀어내도록 자극한다. 옥시토신이라는 명칭도 그리스어로 ‘신속한 출산’이라는 뜻에서 왔다. 또한 옥시토신은 유두에서 젖이 나오는 것도 촉진한다. 분만의 물리적 과정은 혈류에 있는 옥시토신에 의해 자극된다. 그러나 출산 중에 자궁경부가 확장되고 질이 늘어나면 그때부터 뇌에서는 전능한 옥시토신이 물밀듯이 쇄도한다. 그 결과 이 천연 아편제는 초보 엄마가 세상에 갓 나온 아기와 유대감을 형성하도록 단단히 준비시킨다. 아기가 젖을 빨기 시작하면 엄마의 뇌는 옥시토신에 흠뻑 적셔져서 아기를 돌보는 일에 중독이 된다.
(250-251)
엄마가 된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진화적 영향력을 가진 대단히 까다로운 일이다. 이처럼 어미가 아닌 다른 개체와의 사이에서 형성되는 유연한 애착 관계는 엄마로 하여금 유일한 부모상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을 덜어주고 훨씬 넓은 범위의 돌봄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버려진 새끼를 입양한 회색물범의 경우처럼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애초에 공동 양육이 진화한 종도 있다. 이는 ‘이중 업무’, 소위 투잡을 뛰어야 하는 동물의 어미에게 엄청난 이점이다.
(299)
영화 <마다가스카르>에서 아프리카의 이 커다란 섬은 줄리언 대왕이라 불리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지배한다.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들이 사실주의적 묘사로 유명한 건 아니지만 줄리언 대왕이 실제 마다가스카르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자는 그를 신뢰할 만한 인물로 판단해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영화 속 줄리언 대왕의 설정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 실제로도 마다가스카르에는 알락꼬리여우원숭이가 많이 살지만 그들의 리더는 왕이 아니라 여왕이다. 영화 제작진은 자신들이 만든 영화에서 남성을 지배자로 내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꼈을지 몰라도 알락꼬리여우원숭이 사회를 지배하는 성은 단연 암컷이다.
(343)
결국 인류 과거에 대한 가장 적절한 재구성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특징을 섞은 형태일 것이다. 그것이 침팬지에 더 가까웠는지 보노보에 더 가까웠는지는 영원한 논쟁거리가 될 수 있고 아마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게 아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기에 바꿀 수 없다. 그러나 미래는 다르다. 보노보 사회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노보 이야기는 우리에게 남성이 공격적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행위와 능력은 환경적, 사회적 요인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여성에게 힘을 부여한 핵심적인 요소는 압제적인 가부장제를 무너뜨리고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자매결연의 힘이다. 여기에서 자매란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까지 모두 아우른다.
(360)
진경한 완경(完經)은 생식기관의 노화와 신체의 노화가 분리될 때 일어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생식기관은 몸의 다른 부분보다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동물원에서 폐경을 경험한 고릴라는 공짜 식사와 건강 관리로 수명이 인위적으로 연장되었다. 야생에서 고릴라 암컷은 35~40년을 살지만 사육 상태에서는 60년까지도 살 수 있다. 몸과 뇌가 난소의 나이를 넘기는 것이다. 5000종의 포유류 중에서 야생에서 자연적으로 완경에 이른다고 알려진 종은 이빨고래류 4종과 인간뿐이다.
(379)
레이산알바트로스는 스테로이드에 심각하게 중독된 갈매기처럼 보인다. 22종의 알바트로스 중에서 체구가 가장 작을지 모르지만 날개를 활짝 펴면 농구계의 거인 르브론 제임스도 꼬마처럼 보일 정도다. 이 바닷새의 특별한 체격은 역동적인 활공에 최적화되어 해양의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 날개 한 번 움찔대지 않고 푸른 지구를 수천 킬로미터나 항해할 수 있다. 알바트로스는 물갈퀴 달린 발로 한 번도 땅을 밟지 않고 바다에서 몇 년을 보낼 수 있다. 지구력만큼 이길 자가 없는 이들은 선원과 시인과 신화 창조자들에게 똑같이 신성시되었다.
(425)
“저는 학계의 테러리스트예요.” 러프가든이 농담처럼 내게 말했다. “영욱에서 다윈은 일개 과학자가 아닌 국가의 영우이죠. 다윈의 업적을 칭송하는 것은 영국 정체성의 일부입니다. 그 바람에 영국 진화생물학계는 보수적인 성향이 아주 강하게 되었지요.”
(435)
동물의 왕국을 흑백 안경을 쓰고 보는 바람에 다윈과 그의 발자취를 따른 많은 과학자들이 성의 차이점만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게 크루스의 입장이다. 유사성을 연구함으로써 배울 것이 더 많은데 말이다.
“사람들은 사실 수컷과 암컷의 형질 대다수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수컷이든 암컷이든 모두 뇌가 있고 심장이 있고 몸이 있어요. 서로 다른 성 사이에는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더 많아요.”
(441)
과학이 동물의 암컷을 얼마나 왜곡해왔는지를 책으로 쓰겠노라 처음 마음먹었을 때, 그 이야기가 이렇게 커질 줄도 몰랐고 내 대상이 이토록 문화적으로 오염되어왔는지도 몰랐다. 나는 막연하게 과학이란 당연히 과학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이성적이고 증거에 기반하여 실험을 통해 추론되고 오염되지 않은 지식이라고 말이다. 내가 대학에서 복음처럼 배운 진화생물학의 기본 개념들이 편견에 의해 왜곡되어왔다는 것은 충격적 깨달음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편견에 맞서게 되었고 과연 우리가 개인적 인지의 족쇄에서 벗어나 동물의 세계를 진정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는지가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