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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2019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20년은 6·25가 일어난 지 7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과서에 없는 역사 이야기」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소개하여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자 마련한 코너입니다.
남자현 선생 가족사진(왼쪽에서 두 번째가 남자현 선생)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남자현은 7세에 국문에 능통했고, 소학과 대학을 배웠다. 그리고 19세가 되던 무렵, 영남의 석학인 아버지 남정한의 제자였던 김영주와 혼인하여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일제의 만행이 점점 극에 달하던 1890년대 구한말, 당시 남자현의 나이는 23세. 의병이 되겠다며 집을 나간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고, 기다리는 남편 대신 돌아온 건 피 묻은 적삼이었다. 김영주는 을미의병(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유생들이 친일내각의 타도와 일본 세력을 몰아서 내쫓는 것을 목표로 일으켰다) 전투에서 의병장 김도현과 함께 왜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남자현은 남편의 전사 소식에 일본에 대한 저항의식이 시작되었고, 복수심에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어린 아들을 키우고 시부모를 봉양해야 했기에 명주를 짜서 팔며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 정성과 효성이 어찌나 대단했는지 당시 마을에서 효녀 상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남자현이 46세가 되던 무렵, 전국에서 3·1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이제야 남편의 원수를 갚을 때가 왔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있는 서로군정서(1919년 5월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로 향했다. 경북 영양에서 경성까지, 그리고 다시 경성에서 중국 랴오닝성까지의 여정. 그는 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떠났을까?
남자현은 1907년경부터 아버지 남정한이 의병을 일으키자 본인의 자택을 임시의병모집소로 삼았다. 나아가 직접 저잣거리를 돌며 장정 소집과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해 일제에 요시찰 인물로 여겨졌다. 1919년 3·1 만세 운동에도 참여했던 그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더는 내 나라 안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렵다고 판단해 결국 만주로 떠나는 결심을 한 것이다.
남자현은 만주에서 독립군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면서 북만주 일대에 12개의 교회를 세웠고, 여성 계몽운동에 힘써 10여 개의 여성교육회를 설립했으며, 여성의 권리 신장과 자질 향상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바쳤다. 당시 40대의 나이가 오늘날로 치면 60대이지만,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도전하는 마음이라면 젊은이의 자격은 충분했으리라.
1920년 8월,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잘랐다. 바로 ‘단지(손가락을 자르고 혈서를 쓰는) 결단’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수모를 잊지 말자(일제강점 현실을 잊지 말자)’라는 의미였다. 뒤이어 1922년 3월, 그의 두 번째 단지 결단은 검지 손가락 절단이었다. ‘독립군의 단결이 우선이다(조선 사람들끼리, 독립군끼리 싸워선 안 된다)’라는 마음이었다. 어려움에 빠진 나라를 위해 표명했던 그의 강철같은 정신과 의지는 가히 대장부라 칭할만했다.
서로군정서 단원들의 단체사진
서로군정서에서의 생활이 어느덧 6년이 지날 무렵, 그가 오랜 시간 바라던 기회가 찾아왔다. 1926년 4월 26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사망했는데 이때 남자현과 동지였던 박청산, 이청수는 조선총독부의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위관료들이 조문하기 위해 찾아오리라 판단했고, 세 사람은 순종의 빈소가 차려진 창덕궁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54세, 1926년 4월 27일 남자현은 창덕궁 일대를 답사했다. 그러나 갑자기 들려오는 호각 소리와 구둣발 소리에 혜화동 일대에 일경이 가득 깔리고, 삼엄하게 사람들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남자현과 동지들은 서둘러 인근 교회 건물로 숨어들었다. 알고 보니 남자현과 동지들 외에도 조선 총독 사이토의 목숨을 노리는 인물이 또 있었다. 바로 독립투사 송학선이었다. 남자현 일행과 송학선은 서로 일면식이 없었다. 서로의 계획을 모른 채 한날한시에 각각 거사를 실행한 것이다. 그러나 송학선의 조선 총독 암살 시도로 남자현 일행은 거사를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다수의 역사 저술서와 교과서 등에는 이 사건을 남자현의 암살 실패로 기록하고 있으나, 엄밀히 말해 실패라고 보기는 어렵다. 시도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27년 봄, 도산 안창호는 독립운동가들과 망명 중인 조선인 500명을 모아 독립운동가 나석주의 추도회 및 조국의 미래를 위한 강연회를 열었다. 하지만 일본은 중국 헌병사령관을 압박하여 안창호, 김동삼 등 항일운동가 300명을 불시에 불법 체포했다. 이때 남자현은 수많은 애국지사가 석방될 때까지 정성껏 옥바라지 했으며, 끊임없이 탄원서를 넣어 이들이 보석으로 풀려나도록 애썼다. 또한, 훗날 만주사변이 일어난 후 서로군정서를 세운 독립운동가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자,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있을 때 남자현이 직접 그의 친척으로 위장해 면회를 하고, 연락책 임무를 해냈다. 또한 김동삼의 지시를 동지들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그가 국내에 호송될 때 구출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까지 세웠다.
국제연맹조사단 리턴조사단
1931년 일제는 만주를 점령했고, 중국 북동부지역에 ‘만주국’이라는 괴뢰국(다른 나라의 지배 하에 있는 나라)을 설립했다. 시간이 지나 1932년 9월이 되었는데 이때 국제연맹조사단인 리턴조사단이 일본의 침략상을 파악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을 접한 남자현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일제의 만행을 리턴조사단에게 직접 호소해야만 했고, 그 방법을 고민했다. ‘어떻게 그 열망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때 그의 시선은 3개밖에 남지 않은 왼손으로 향했다.
남자현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잘랐다. 정확히 왼손 넷째 손가락 두 마디를 잘라흰 천에다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 조선독립을 원합니다)’이라는 혈서를 쓴 뒤 잘린 손가락 마디와 함께 리턴조사단에 전달했다. 그의 세 번째 ‘단지’였다. 그의 마지막 단지는 민족의 강인한 독립정신을 국제 사회에 알리는 동시에 일본인들에게 속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다.
이러한 연유로 그는 만주지역 항일투사와 독립군들에게 ‘대모’라고 불렸다. 그는 잘린 손가락과 혈서를 인력거꾼에게 전달했으나 평소 그를 주시하던 일제 경찰에 의해 인력거꾼이 검거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거사는 아쉽게도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분연히 일어섰다. 조국독립을 위해 이미 세 손가락을 버린 그는 이제 일생을 걸기로 했다.
1933년, 일제가 만주에 괴뢰국을 만들고 1주년이 되었는데 이때 일본 전권대사(한 나라를 대표하여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주재하면서 외교 교섭을 하며 자국민에 대한 보호 감독의 임무를 수행하는 최고 직급의 외교 사절)이자 일본 육군 대장인 무토 노부요시가 온다는 소식에 남자현은 암살계획을 준비하고, 직접 거사를 실행했다. 마지막 영정사진을 남기듯 사진을 찍은 남자현. 그의 후손들은 그때 그가 입은 옷이 을미의병 당시 피 묻은 적삼으로 돌아온 남편의 마지막 옷이었다고 전한다.
거사 이틀 전인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 45분경. 직접 변장하고 무기를 운반하던 그는 밀정의 신고로 출동한 일본 경찰에 검거되고 만다. 그 후 이어진 극심한 고문에 그는 고통받았다. 당시로써는 매우 고령인 61세의 나이였다. 일제의 고위관리를 처단하려고 한 이 사건은 일제에게는 큰 치욕이었고, 결국 그는 하얼빈 주재 일본 영사관에 수용됐다. 당시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있던 일본 영사관 지하실에는 항일투사들만을 대상으로 한 고문실이 있었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영사관 건물은 많은 이들이 지나다니는 시내 한가운데 위치했다. 그런데 그곳 지하에서는 대한제국의 독립투사들이 고문받았고, 고통 속에 절규와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남자현 선생 서거 관련 기사(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
잔혹한 고문과 15일간의 단식 투쟁으로 사경을 헤매던 남자현은 수용된 지 6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급히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달려갔다. 남자현은 출옥 후 5일 만에 하얼빈의 작은 여관방에서 사망했다. 온몸은 고문으로 망가졌고, 왼손가락은 두 개밖에 없는 노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임종을 지키던 아들에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너 때에도 독립이 이뤄지지 않거든 자식 중 한 명은 나라를 위해 독립투사가 되게 해라. 조선이 독립되는 날, 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써라.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당시 하얼빈의 사회 유지, 부인회, 중국인 지사들은 남자현을 ‘독립군의 어머니’라고 존경하면서 하얼빈 남강구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여 생전의 공로를 되새겼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찬란한 빛을 남긴 그의 영전에 동지들은 깊은 애도를 표했다. 아들은 어머니의 유언을 지켜 1946년 3·1절 기념식장에서 백범 김구에게 독립축하금(248원)과 사연을 전달했다. 남자현이 하얼빈에서 눈을감은지 13년 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하얼빈의 남자현 묘역은 지역 개발로 외국인 무덤이 이장되며, 유해의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3·1 만세 운동 참여 외에도 무장투쟁에 나섰던 독립군·의열단원·광복군의 수가 매우 많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남자현처럼 비록 역사에 자세히 기술되지 못했지만, 우리는 반드시 우리 선조들의 숭고한 희생과 신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왼쪽) 하얼빈 외국인 묘지에 있었던 남자현 선생의 묘
(오른쪽 위)남자현 선생의 마지막 모습(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임종을 지키고 있다)
(오른쪽 아래) 남자현 선생 기념 우표(2016년 6월 1일 발행)
남자현(南慈賢) 선생
(1872.12.7. ~ 1933.8.22.)- 독립운동가- 서로군정서에서 활약, 12개의 교회 건립 및 10개의 여성교육회 조직-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 전달-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