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메이너드 케인스-2
돈, 민주주의, 그리고 개인의 삶
인구 과잉은 번영에 위협이 된다 여겼지만, 풍요로운 시대에 성장을 사람은 민주주의 전통과 관습은 예술과 사상이 만개할 여건을 마련한다. 1919년에 케인스가 예견한 재앙은 경제나 자본주의, 인류 근본적 논리에 불가피한 일이 아니다. 올바른 리더쉽으로 극복 가능한 정치적 실패일 뿐이다. 마르크스는 고장이 난 비이성적 자본주의 질서를 비난하고 혁명을 요구한다. 케인스에게 기아와 유혈사태가 주는 공포는 사망자 수가 아니라 그로 인해 예술, 문학, 배움의 붕괴였다. 돈과 희소성 문제에서 통찰력을 발휘해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케인스의 첫 선언이다.
케인스는 도박도 즐겼다. 경마장에서 노는 것과 주식투자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둘 다 술을 마시는 것처럼 즐거움과 흥분을 가져다준다. 아침에 일어나 내 앞으로 굴러올 돈을 생각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니까!. 전시에 케인스는 주식과 원자재에 투자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의 보유주식은 세 배 이상 뛰어 1만 4,453파운드(대략 우리 돈 140억)가 된다. 통화투기로 번 돈까지 약 3만 파운드다. 투자로 돈을 항상 번 것은 아니고 1920년 4월에는 2만 2,575파운드를 날려 빈털터리가 된다. 그는 5천 파운드를 신용으로 빌려서 과감한 예측으로 투자한다. 1924년에는 다시 순자산 6만 3,797파운드가 된다((한화 650억 안팎). 그녀의 애인 리디아는 유명한 발레리러 이니 그의 매니저와 결혼한 기혼자였다. 그녀의 이혼신고가 이뤄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극장의 안내원으로 러시아에서 간신히 먹고 사는 데 이미 술 중독으로 죽었고, 많은 동생과 어머니는 간신히 목구멍에 풀칠하는 수준이였다. (그러나 삶의 기쁨에서 일상의 행복을 발견한 어머니의 교육으로 리디아는 바르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니 처가에 많은 돈이 흘러갔을 것이다) 리디아로 인해 성적 가치관에 눈을 뜬다. 케인스가 리디아에 홀딱 빠진 것이다.
1920년 유럽 각국은 디플레이션에 빠졌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미국까지 모두 공격적으로 물가를 내렸다. 낮은 물가를 미덕으로 여기는 믿음 때문이었다. 연준은 물가를 내리기 위해 금리를 올리니, 세계 금이 미국으로 흘러든다. 나머지 나라들도 금 고갈을 막으려면 금리를 인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미국은 국제 금융을 조정할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른 사회적 비용은 농장이 압류되고, 기업은 파산이며, 수백만 명이 실업자가 된다. 임금도 삭감되니 광산 노동자와 철도노조가 파업한다. 영국 정부는 군을 투입한다. 사회주의자들이 의심해온 사실들이 확인되니 자본주의는 부당하고 불공평하니 마르크스 사상을 공부하고 자본주의 미덕을 버려야 한다는 정서가 생긴다. 디플레이션에는 채무자가 채권자에 줄 돈과 노동자가 받을 임금, 내국인이 외국인에 받을 돈이 제각각 달라진다. 케인스는 수요와 공급, 자유무역과 자유사상을 포기하는 것은 해법이 아니며, 통화체제를 안정화하여야 한다. 믿고 있다. 그리고 신문 지면으로 캠페인을 시작한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계약, 주식, 자본주의 시스템이 타격을 입는다. 전쟁으로 일어난 인플레이션을 회복함은 금융인의 주장처럼 내리막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안정기를 되찾는 일이다. 재정 조율을 평화 시대처럼 끌어 올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 물가 안정, 후 환율 조정을 해야 한다. 정부가 인플레이션이 진정되기를 기다린다면, 자신의 역할을 쉽게 보는 것이다. 기다리다가 실업, 기아, 폭등, 혁명까지 많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장기적 개혁보다 사회 복지적 발전을 통해 쉽게 구현할 단기적인 개혁이 우선시 된다고 주장한다. 소요와 공급은 사회에 발전적 균형을 가져왔다. 자유방임주의가 작동하려면 재산권, 법규, 물가 안정, 같은 기본적인 경제구조가 필요하다. 1922년 <화폐 통화 개혁방안>이란 책을 내고 금본위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케인스의 새로운 경제이론서는 평화의 경제적 결과에 열광했던 대중을 감화시켜 런던 지도층의 관심과 비평을 동시에 받는다.
1924년 케인스는 유럽 사회에서 누구도 대체될 수 없는 지위에 올랐다. 엘리트 사회에서 인정받는 기쁨은 블룸즈버리가 추구하는 가치는 아니었다. 블룸즈버리는 귀족적 습성을 칭송하는 것과 귀족사회의 참여에 선을 그었다. 돈은 더 근사한 것에 쓰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사도들이 좋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는 것으로 죽을 때까지 좋은 것들이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 믿었다. 케인스는 이상주의자였다. 지적인 이론이 어리석은 이론을 압도할 것이라는 믿음은 혜택을 주는 개혁을 ”기득권“이 거부하는 세상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웠다.
케인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일반적인 분석과 달랐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사회가 피할 수 없는 위기로 치달으면서 겪는 역사적 국면으로 생각했다. 케인스도 자유방임주의적 자본주의가 사회경영의 중요한 요소들을 방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실수라 여겼다. 자본주의를 타도하기보다는 ”현명하게 관리“해야 할 때다. 그는 책에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삶의 방식에 대한 우리 생각을 훼손하지 않고 효율적인 사회 조직을 만드는 그것이라고 썼다. 자유방임주의는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을 양립하게 했고, 대중적인 교리가 되었다. 그러니 선한 결과를 낳을 수 없다면 즉 공유하지 못한다면 이념적 역할은 불안정한 것이다. 이유는 유럽 군주들이 부패로 역기능이 심해 경제력을 박탈하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군주들이 사라지면서, 사회는 개인들이 시장의 중재 없이 행동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다. 우리 시대 심각한 경제적 해악 중 다수는 위험, 불확실성, 무지의 결과로 생긴다.
1925년 8월 4일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리디아 로포코바’와 런던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2년은 살고 있었지만, 전 남편의 이혼 절차가 완료되어 올린 혼례식이다. 결혼식은 영국은 물론 멀리 미얀마까지 각종 신문에 대서특필된다. “영국에서 가장 명석한 경제학자와 러시아 최고 발레리나의 결혼은 예술과 과학의 상호 의존이라는 달콤한 상징이다.” 리디아는 십 대에 가족을 떠난 후, 처음 친정에 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레스토랑과 발레 학교 등 그녀의 기억에 남은 집들은 있었다. 처가 소련에 대한 일련의 에세이를 쓴다. “잔인함”과 ”억압적 분위기“에 탄식한다. 경제 방식이 무엇이든 소련 정부가 육성하는 삶 방식에 재미가 없었다. “편안함과 습관은 포기라 부르지만, 일상의 자유와 안전을 파괴하고 박해와 국제 분쟁이란 무기를 사용하는 신조가 달갑지 않다. 자국 가정과 집단에 스파이를 심어 해외에서 혼란을 일으키는 데, 수백만 달러씩 쓰는 정권을 어찌 존중하겠는가? 물고기보다 진흙을 선호하고 어떤 잘못이 있든 삶의 질을 알고, 인류 발전의 씨앗을 옮기는 부르주와의 지성인보다, 천박한 프롤레타리아를 높이 평가하는 신조를 내가 어찌 채택할 수 있겠는가?“
유휴인력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케인스는 엄청난 사업을 제안한다. 영국의 지역을 연결하는 새 고속도로와 순환도로, 다리, 터널을 만들고 농촌까지 포장하는 엄청난 사업이었다. 2년간 1억 4,500파운드 비용과 35만 명의 노동자가 투입될 전망이다. 도로 건설에 1파운드를 지출하면 그 이상의 경제 효과가 발생한다. “승수”라는 케인스의 개념이다. 런던의 빈민가에 100만 채의 집을 지어 탈바꿈하고, 10년 15만 명을 고용한다. 전화 개발과 전기 공급사업에 다른 15만 명을 투입한다. 후대를 위해 ”구릉과 황무지, 호수, 숲, 언덕, 농촌의 공유지를 보호하고, 자연의 아름다움과 쾌적함을 보존하는 국가의 단호한 조치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금은 부채로 조달하고, 일자리에 취업이 되면 실업급여에 돈이 들지 않는다. 경제가 활성화되면, 세수가 증가하고 재무부 금고가 든든해지면, 그 돈으로 부채를 갚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사회 진보의 동력으로 자유방임주의적 개인주의를 거부하는 것이다. 자동차, 전화, 교류전류 발명은 위대한 사회가 그 잠재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집단적인 노력이 필요했었다.
2022.01, 07
존 메이너드 케인스-2
김성아 옮김
ROK 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