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이해하는 이야기틀에 대하여
전도를 최고의 가치라고 외치던 류광수 목사, 그리고 그의 외침에 화답하고 함께 목소리를 높이던 목사들, 그들은 왜 그렇게 처참하게 타락했을까?
그들은 사도 바울처럼 “주여, 제가 무엇을 하리이까?”를 질문하지 않고, “내가 어떻게 이것을 하리이까?”를 물었기 때문이 아닐까? 본질에 대한 질문이 ‘무엇’이라면, 방법에 대한 질문이 ‘어떻게’일 것이다. ‘무엇’과 ‘어떻게’는 둘 다 중요하다. 그러나 어떻게는 결코 무엇을 앞설 수 없다. ‘무엇’이 정해지고 나서 비로소 ‘어떻게’를 생각해야 한다.
무엇에 대한 질문은 복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며 시대의 과제에 대한 질문이다. 과거에는 이렇게 했는데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것이 우리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 주께서 복음을 전하라 하시고 교회를 세우셨는데 그것을 우리는 이제 무엇을 통하여 성취해야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복음전파와 교회설립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은 복음과 교회의 사명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방향에 대한 고민이며 본질과 이유에 대한 탐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질문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어떻게’라는 질문에 삼켜지고 그 결과는 본말전도의 불상사가 된다.
아무리 전도가 중요하고 아무리 성장이 중요해도 본질에 대한 탐구 없이는 결국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망각하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이 하는 불의한 일에 그럴듯한 이유를 달아 합리화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평가를 받아 그 수치가 온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것이 지난 주에 있었던 PD수첩 방송이다.
우리는 지금 ‘왜?’가 사라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왜?’라는 질문은 맹인의 사회에서 새로운 빛을 비춰주는 창문과 같다. ‘왜?’가 사라진 세상은 그 창이 없는 감옥과 암흑의 세상이 되고 그곳에서는 눈 먼 자들의 본능과 광기어린 집착, 그리고 맹목적인 행위가 반복될 뿐이다.
우리는 왜 전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할 때 우리는 그 질문 속에서 그 일의 목적과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인력이 작용하는 것을 느낀다.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할 때 전도의 목적을 생각하게 되고, 전도의 목적은 전도의 본질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전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생각하게 하고,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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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어떤 사람이 천국과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을 들었다. 어떤 이는 죽은 후에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천국에 대한 개념은 사람마다 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2천년 전 사람들과 오늘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이 바라던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그들의 입장’에 서 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노력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나 성경을 아전인수격으로 이해하고 성경의 가르침에서 멀리 떠난 교훈을 진리라고 붙들게 된다. 그럴 때마다 본말전도의 위험이 발생한다.
지금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순복음교단은 지금 딜렘마에 빠져 있고, 많은 교회들이 지금 그렇게 본질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고 소경인도자들처럼 그렇게 집단적으로 모여 앉아서 소리를 높이고 있다.
천국은 무엇이고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신 목적은 무엇이고 그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용하는 이야기틀은 무엇이고 그 틀은 정당한가?
그 동안 일반적으로 교회가 성경을 이해하는 이야기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구원이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 천국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예비하신 하늘의 집이다. 모든 인간은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대속하시고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십자가의 대속 은총과 오직 믿음으로 받는 구원, 그리고 모든 인간의 타락과 심판, 죽음… 그리고 거기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 구원이다.
이런 이야기틀과 좀 다른 이야기틀이 있다. 그것은 창조와 그 창조의 목적, 그리고 하나님의 대리인이자 동역자인 인간, 하나님의 끊임없는 새 창조 활동과 최종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가 있다.
여기서 강조되는 부분은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보존과 회복과 완성이 하나님의 뜻에서 궁극적인 목적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구원이란 하나님과 함께 다시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관리하고 다스리는 본분을 회복하며 마침내 새롭게 된 세상을 물려받고 그 세상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틀에 비추어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다시 오심이며(임마누엘),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롤모델(Role Model)이며, 그리고 이 타락하고 어두움 세상을 종식하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음을 확증하고 증거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된다(Revolution, 혁명). 이것이 톰 라이트가 강조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기독교회의 갱신과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영역은 윤리와 예전이지만, 그 모든 개혁의 바탕이 되는 근본적인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이야기틀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런 개혁이 어떻게 가능할까? 굳은 유빙과 암반을 절단하려면 구멍을 내고 금이 가게 하여 깨뜨리는 방법이 있다. 그런 작업은 아마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