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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25. 러시아령(露領) 조선인(鮮人)의 獨立運動에 關한 件(『韓國獨立運動史』36|| 1919. 5. 5)
러시아령(露領)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관한 건
러시아령(露領) 재주(在住)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한 바대로 노인단(老人團) 및 김하석(金河錫), 김진(金震) 등의 일파인 청년단(靑年團)의 활동 및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한 폭도파(暴徒派) 셋으로 나뉘어 있는데, 김진(金震)·김하석(金河錫) 등은 실제 이동휘(李東輝) 일파를 위해 군자금을 모집하고 장정(壯丁)을 모집하는 등 완전 이동휘(李東輝)의 휘하에 속하는 것이어서 차라리 이를 이동휘(李東輝)일파로 간주하는 것이 지당하다. 또한 이동휘(李東輝)는 소위 국민회의(國民議會)의 선전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바, 러시아령(露領) 조선인의 독립운동은 대별하여 국민의회(國民議會)와 노인단(老人團) 둘이 된다. 최근 양자(兩者)의 행동에 대하여 얻은 정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 노인단(老人團)
노인단(老人團)의 활동에 대해서는 그 후 그리 중요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나 오히려 근래 의기가 높아지는 듯하다. 동단(同團)의 중심인물로 불리는 자는 김치보(金致甫), 박은식(朴殷植) 및 최승정(崔升亭-병숙(秉琡) 등이다. 박은식(朴殷植)은 의지박약한 노인(62~3세)으로 스스로 일회(一會)의 주창자가 되어 활동할 것 같은 인물은 아니다. 오직 타인의 비난이 두려워 외관을 치장하려고 제반의 행동에 참가할 뿐 하등의 정견도 없이 항상 세력에 부수하는 경향이 있다. 최승정(崔升亭)도 역시 70여 세의 노인으로서 건강하지 못하여 오직 방문하는 유지자 등에 대하여 상호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에 있어, 일단(一團)의 수뇌로서 활동하기에는 도저히 가망이 없는 바 이다. 최승정(崔升亭)은 근래 배일자(排日者)라고 인정받은 후로는 오히려 친일(親日)의 경향이 있음이 인정되어 그의 언행으로 증거한다면 점차 대세를 이해하고 시국을 달관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최승정(崔升亭)은 항상 이번 독립운동은 마침내 아무 것도 얻는 바가 없게 되어 도리어 장래에 해를 끼칠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소위 애국자, 유지자라는 자는 무책임하고 또한 생각이 깊지 못함을 통탄하였다. 일례를 들자면,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무기명한 것을 꾸짖고 드디어 문창범(文昌範), 김철훈(金喆勳)으로 하여금 이에 서명하라고 하고 또 이번의 『독립신문(獨立新聞)』이 누구에 의하여 발행한 것인가를 밝히지 않은 비밀출판과 같은 것으로 이는 겁쟁이가 한 것이고 또한 무책임한 것이라고 책문(責問)하였다. 윤능효(尹能孝)는 상인으로서 다소의 재산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이 이를 공경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감히 이를 대우하겠는가 하고 이를 통렬히 매도하는 등 비교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
금일 러시아령(露領) 조선인 중 학식 있는 자는 동인이다. 동인이 위와 같이 말한 것은 동인을 숙지(熟知)한 것을 말한 것이고, 김치보(金致甫)에 이르러서는 원래 무학(無學)하여 하등의 식견을 가지지 않고 단순히 약간의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이를 공경할 뿐 노인단(老人團)의 중심인물인 저들은 이미 이와 같다. 또한 나의 무리는 이미 부화뇌동의 무리가 된다면 노인단(老人團)의 장래는 또한 이와 같이 될 것이다. 지금은 일반 조선인의 소위 독립열기로 들떠 있는 것을 본다면 점차 열기의 냉각에 따라 단순히 변명한 것으로 어떤 일도 없을 것 같다. 동단에서 대표자를 총독부에 파견하는 일은 일시 흐지부지되었다. 최근의 정보에 의하면 총독부에 제출할 탄원서도 작금 점차 탈고하여 김치보(金致甫)·최병숙(崔秉琡)·김병합(金秉哈) 등 21명의 서명으로써 해당 탄원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대략 결정되었으나 대표자 선정 등은 미정인 모양이다. 본건에 대하여 동단에 관계가 있거나 또는 일방 폭도파에도 상당히 관계가 있는 불령(不逞)배 사이에도 약간 신용 있는 이윤(李崙)은, 우리가 밀정을 통하여서 때때로 소식을 전하고 우리 쪽의 의향을 살피고 있는데, 노인단(老人團)에서 대표자를 파견할 경우에 당 총영사관 및 총독부는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혹은 대표자를 체포하여 투옥시키는 것이 아닌가? 등의 걱정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목등(木藤) 통역관은 이에 대하여 해당 탄원서를 당관 및 총독부가 이를 수리할 것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이를 명언(明言)하지 말고 다음과 같이 보통의 수속으로 조선을 여행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일본관헌은 어떤 구속을 가하지 않고 특히 이들 대표자가 노인단(老人團)을 대표하여 상당히 식견 있는 인물이라면 내지(內地) 여행의 기회를 마땅히 주어 상세히 조선내지의 실상을 시찰하고 정당한 이해를 얻어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와 노인단원은 물론 일반 조선인에게 설명함으로써 조선인 등의 총독정치에 대한 오해를 푸는 길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당 총영사 및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저들에 대해 도리어 상당의 편의를 제공하는 것으로 하여서 저들 대표자는 마땅히 관광단이 되기를 은근히 기다려 조선으로 건너오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전(傳)하는 취지이다.
2. 이동휘(李東輝) 및 국민의회(國民議會)
갑(甲), 이동휘(李東輝)는 기보한 대로 중국령(支那領) 스카쳔제에 있는데, 장정을 소집하고 있다. 동인의 행동에 대해서 여러 방면에서 전달된 정보를 종합하면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동휘(李東輝)는 러시아·중국(露·支) 국경에 접한 니콜스크 서쪽으로 100여리 떨어진 중국령(支那領)인 조선인 부락 다아치야코바에 있다고 한다.
5월 3일 다아치야코바 방면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허근(許瑾)은 최근 수 개월간 만주리역(滿洲里驛)에 있으며 본직(本職)인 목수직에 종사 중 근래 독립운동이 치열함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동지(同地)를 떠나 도중에 소수분(小綏芬), 삼차구(三岔口) 및 다아치야코바에 들렀고 이동휘(李東輝)도 면회하고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고 한다. 동인의 말에 의하면 이동휘(李東輝)가 허근(許瑾)에게, 각 방면에서 래집(來集)한 장정이 매우 많아서 모두 각 조선인 부락에 나누어 수용하고 각 교관에 의하여 조련을 실시하며 무기탄약도 상당히 있다고 하고, 이동휘(李東輝)는 허근(許瑾)에게 만주에 있는 무장병력이 1만인에 달하도록 감히 애쓰고 있다는 말을 하고, 이어 허근(許瑾)에게 속히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동지를 다그쳐 장정의 모집에 힘 쏟아 계속 우리 쪽에 보내어 10인에 1인 완장을 두고 이 10인장을 자신(李東輝)에게 보내면 자신은 이를 각 부락에 분배 수용하여 곧바로 교련하는 것이 가하다고 격려하는 바가 있었다고 한다. 허근(許瑾)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래 이윤(李崙), 기타 구 폭도파(舊暴徒派)에게 공(公) 등은 이러한 때에 무슨 이유로 유유자적하며 무위(無爲)로 날을 허비할 것인가, 속히 옛날 부하를 다그쳐서 이동휘(李東輝)의 휘하로 합치게 하자고 스스로 의기를 헌앙(軒昻)하고 있는데, 이를 들은 이윤(李崙) 같은 이는 내심 다소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다.
그 후 우리 밀정에게 술회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곤란한 일이 이루어져 가는데 자네들(밀정을 가리킴)의 말에 따라서 폭거의 우(愚)을 알아도 저들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도 없고 들어 흘려보내는 것도 불가하니 나는 차라리 가지 않겠다.”고 한다.
또 수이푼(秋豊)에 사는 사람 마리아 이(李)라는 조선여자가 우리 밀정에게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 여자는 근일 다아치야코바에 아편구입을 위해 갔는데, 동(同) 지방의 조선인 가옥에 도착한바 조선 관병(官兵- 여자의 말을 그대로 기록함)이 가득 찬 어떤 집 같은 한 집에 70인을 수용하고 있었는데, 저들은 매일 일정의 시간 조련을 받고 그 나머지 시간은 농업, 기타에 힘쓰면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4월 30일 치타에서 이강(李剛)의 옛 부하라고 칭하는 청년 11명이 이동휘(李東輝)의 부하로 투신할 목적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4명은 강택희(姜宅熙) 집에 7명은 각 객주(客主)에 나누어 묶었다. 이강(李剛)은 저들을 인견(引見)하고 저들이 이동휘(李東輝) 밑으로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의 구조(句調)로 무엇도 별로 급한 것이 없지 않은가, 하여간 나(李剛)의 뜻에 따라 행동하라고 암암리에 만류하였다고 한다. 이동휘(李東輝)는 4월 5일 블라디보스토크(浦潮) 출발에 임하여 8천 루블을 휴행(携行- 다분히 김치보(金致甫)의 손에 있던 독립운동비 중에서 수취한 것임)하였다. 후에 전일(全一)은 니콜스크에서 1만 5천 루블을 휴행(携行)하여 이동휘(李東輝)에게 교부하였다고 한다.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이동휘(李東輝)는 다아치야코바에 있으며 자주 장정을 모집하여 폭거를 계획하고 그 일당에 속한 청년 김진(金震)·김하석(金夏錫)·전일(全一) 기타 무리는 각 부서를 정하고 지방을 유세하여 헌금과 장정모집에 힘 쏟고 있다 한다. 그리고 국민의회(國民議會)를 내세워 이동휘(李東輝)를 후원하여서 문창범(文昌範)을 비롯하여 소위 군자금의 공급에 급급한 것 같다. 일례를 들자면 4월 초 최재형(崔才亨)은 조선인사범학교 유지비로서 사위(女壻) 최만학(崔萬學- 리스베토바 4세) 및 그 동업자 러시아인 몰스키에게 기부금을 권유하여 최만학(崔萬學)은 8천 루블, 몰스키는 5천 루블, 합계 6천 루블을 얻어 이를 문창범(文昌範)에게 교부하였는데 이 무렵에 이르러 문창범(文昌範)은 앞의 3천 루블을 학교비로 3천 루블은 독립운동비로 제공했다고 보고한 바 있는데, 최재형(崔才亨)은 자못 이를 불만하고 문창범(文昌範)을 비난한 일이 있는데 하여간 문창범(文昌範)이 군자금조달에 힘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을(乙), 국민의회(國民議會)가 이동휘(李東輝)의 후원에 열중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이유가 있는 바가 있어 이를 약술(略述)한다면,
(1) 처음 국민의회(國民議會)는 러시아령(露領) 재주 조선인 중 중요한 북파(北派) 조선인으로서 조직하여, 경파(京派) 및 평파(平派)의 인물을 수용하는 것을 꺼려 북파 인사만으로 한국독립의 공적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파리(巴里) 평화회의의(파리강화회의) 파견원도 북파 조선인 윤해(尹海)·고창일(高昌一) 양인을 내세워 평파(平派)의 반대만을 고려했을 뿐 경파(京派) 등에게는 결코 상담도 하지 않았다. 그 후에 이르러 경파(京派)의 이동녕(李東寧)은 돌연 북경(北京)으로부터 상해(上海)에 출현하여 먼저 경인(京人) 김규식(金圭植)을 파리(巴里)에 파견하였다.(동인은 이미 파리에 나타난 것은 사실인 것 같음. 『조일신문(朝日新聞)』 통신원의 말에 의함)
(2) 다음 최근에 이르러 상해에서 임시정부라는 것을 조직하고 의장은 이동녕(李東寧)이 맡고 있다. 그리고 이동녕(李東寧)은 니콜스크를 출발할 때에 국민의회(國民議會)에 아무런 자문도 하지 않아 동회(同會)를 당황하게 한 모양이다. 이 사정은 북파 조선인 사이에 모두 알려져서 북파 조선인의 반감은 점점 심해져 상해에서 임시정부조직의 보고가 전달되자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浦潮)에서 국민의회(國民議會)를 개회하고 동 정부 승인문제를 의논하고 분명한 의사표시는 아니지만 대략 당분간 불승인할 것으로 결정하였다. 북파 조선인은 당초의 예기(豫期)에 반하여 경파(京派)에게 공(功)을 빼앗긴 것으로 보아서 상해임시정부를 좋아하지 않는 동시에 북파 조선인은 한층 국민의회(國民議會)의 노력 유지에 진력할 것으로 결심한 것 같다. 김하석(金河錫)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온 후 그의 권유에 의하여 국민의회(國民議會) 상설위원 중에 평안파(平安派)에서 5명[김치보(金致甫)·김이직(金理直)·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안정근(安定根)], 경파(京派)에서 5명[이동녕(李東寧)·조완구(趙完九)·조승환(趙昇煥) 외 2명]을 추가하였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회의(浦潮會議)에서 이동녕(李東寧), 조완구(趙完九)를 제명하고 김이직(金理直)은 스스로 사직하는 등의 사실은 바로 북파 조선인의 발호, 횡포를 보이는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평파(平派)도 당초부터 적지 않은 불평을 품고 있는 모양이다.
(3) 5월 1일 아침 최재형(崔才亨)이 출발하여 돌아갈 때에 엄인섭(嚴仁燮) 집에 모인 한용헌(韓容憲), 전 소위[全少尉- 고(故) 전지덕(全德智)의 아들), 김(金)미하일, 미하일바 4세 준위(准尉), 한니콜라이 매르게로바 4세 등이 회합 석상(席上)에서 전 소위가 크게 기염을 토하며 상해정부에 대항할 기세를 보이고 큰소리로 “상해정부와 국민의회(國民議會)는 뭐 하는 세력인가? 오늘 이후 실제를 보아 알아야한다. 다행히 금일 러시아정부(露國政府)는 35세 이하의 장정에 대하여 동원령을 내리면 조선인 중 적령자는 나가 모두 응소(應召)하여 이 기회에 전법(戰法)을 배워서 만일의 시기에 모국(母國)을 위해 순국할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라고 운운하였다. 이와 같은 것은 바로 북파(北派)의 의사를 대표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상 국민의회(國民議會)를 중심으로 한 북파 조선인 등은 이동휘(李東輝)로 하여금 크게 실력을 양성시킴으로써 금일의 독립문제에 있어서도 지금의 당파적 쟁투는 점차 명료하게 되어 이러한 관계상 이동휘(李東輝)의 행동은 한층 급진적 위험성을 띠게 될 것임으로 걱정되는 바이다.
(4) 재상해(在上海)의 임시정부는 재러시아령(在露領) 조선인의 연락을 자주 의심하고 또한 동 정부가 러시아령(露領) 또는 간도(間島), 기타 조선과 접경 지방으로 이전하지 않는 이상은 어떠한 실력도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실제상의 위험은 우선 적어도 과격파와의 연락 같은 것은 그 목적이 만약 군사적 행동에 있다면 적어도 러시아령(露領) 재주(在住)의 북파 조선인의 중개, 기타 원조를 얻지 못하면 거의 불가능한 것이고, 만약 과격사상을 조선 내지에 선전하여서 조선에서 혁명을 야기하고자 한다면 대개 반드시 러시아령(露領)과의 관계를 요(要)하지 않고 조선 내지에서 예수교도(耶蘇敎徒)와 연계하는 일을 계획함이 편리할 것으로 인정된다.
이곳 재주(在住)의 평파(平派) 조선인은 예수교도인 관계상 이강(李剛) 등 같은 친미파(親美派)의 조선인이 솔선하여 미국인에게 접근하고 원조를 얻기에 급급한 것은 동인의 서면(書面) 등에 증거가 명확하다. 이 일파는 상해정부 일파와 연합이 아주 쉬울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평파(平派)와 경파(京派)의 관계는 일찍이 경파와 평파(北派)의 관계와 같이 도저히 일치할 수 없는 오랜 감정의 골이 있다면 그 합동 역시 바랄 수 없고 필경 저들은 끝까지 당파적 쟁투를 위해 대업(大業)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5) 이런 가운데 홀로 북파 조선인은 간도(間島) 이북 만주(滿洲) 및 러시아령(露領)에 걸쳐 수십만의 동포를 가지고, 또한 종래 수십 년 간 러시아령(露領)에 이주하여 그 자제는 러시아어에 정통한 자가 많고 또 전술한 바와 같이 러시아(露國) 군인으로 병역(兵役)에 소집(召集)되거나 이후 소집될 자가 적지 않다면 저들의 향배는 자못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나아가 과격파와의 교섭과 같은 것도 혁명 이래 여러 차례 보고한 바와 같이 저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는 정보에 의하면 한용헌(韓容憲)·야콥김·찌오니츠스김(그리스도의 번두(番頭)·루까·인나겐찌에바 4세 김 등과 같은 이는 바로 과격파 사상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한용헌(韓容憲)과 같은 이는 제2회 한족총회(韓族總會- 1918년 음력 5월 5일)에 보내서 과격파의 극동위원장 크라스노슈터티프의 휘하에 외교위원으로서 파견하고자 장차 출발할 때에 마침 체코군이 궐기하자 드디어 과격파가 전복되었다. 이 무리배는 금후 기회가 있으면 러시아(露國)과격파와 통하여 우리에게 해(害)를 가할 것이다. 따라서 북파의 세력이 장래 과격파의 세력의 원조를 받거나 혹은 끊이지 않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동휘(李東輝)는 지금 속히 중국관헌과 교섭하여 이를 체포하고 그의 여당(與黨)은 모두 해산시켜서 조선인의 무기는 일체 몰수하는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지금의 긴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찍이 정보에 의하면 적괴 홍범도(洪範圖)도 근래 옛 부하를 모집하여 이동휘(李東輝)의 휘하에 가담하여 수이푼(秋豊) 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5월 1일 소성(蘇城) 방면에서 귀래(歸來)한 한 에그리(한군명-韓君明)는 독립운동비로 현금 3천 6백 루블을 모집, 지참했다고 한다. 일찍이 그는 소성(蘇城) 각 조선인 부락 6천 5백여 호에 각 호 29원씩 분배, 과금하고, 해당 지방에서 선정한 모집위원이 지급(至急) 모집하여 취전(取纏)시켜서 지참하라는 말을 하였다는 취지의 보고로 말하였다.
위는 참고하시도록 보고하여 올립니다. 敬具
본신 사송(寫送) 부처(附先)
재중(在中)공사, 하얼빈(哈爾賓)총영사, 간도(間島)총영사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