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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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대관식 The Coronation of Napoleon (Le Sacre de Napoleon) 1805-07년 제작. 자크루이 다비드, 캔버스 유화
윗 그림 나폴레옹 대관식은 프랑스 혁명기와 나폴레옹 제정기 사이의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이 그림을 의뢰할 당시 그는 대부분의 유럽을 석권하여 절대적인 위치에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전장에서 항상 승리자였던 그는 프로퍼간다에도 깊은 관심이 있었지요. 비록 몇몇 기록들에 의하면 나폴레옹 그 자신은 프로퍼간다에 능숙하지 못하였지만 대신 그는 예술가들과 정부 관리들을 고용하여 그를 치장하는데 사용하였습니다. 18세기 말엽에 있었던 격렬하고 혼란스러웠던 혁명기를 경험한 그는 프로퍼간다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우치고 있었습니다. 이 그림, '나폴레옹 대관식'을 그린 자크루이 다비드 또한 당시 미술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다비드는 열광적인 신고전주의 지지자였습니다. 신고전주의는 경박한 로코코 미술에 대항하여 나온 예술계의 움직임으로서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부흥시키려 노력하였지요. 몽환적이고 감정과 색채를 중심으로둔 루벤스 계열의 미술에 비해 명확한 선을 표현하는데 더욱 중요시하여 고전적인 분위기와 이성, 그리고 질서를 나타내던 푸생 계열의 화가였던 다비드는 '나폴레옹 대관식'에서도 어김없이 그의 예술적 사상을 드러냅니다.
루벤 대 푸생
플란더스 출신 화가이자 외교관, 그리고 기사작위까지 받은 피터 폴 루벤스가 그린 'Rape of Sabine' 입니다. 주제는 고전시대에 있었던 로마남성들의 사빈여자들 강탈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같은시기 프랑스 화가 니콜라스 푸생에의해 그려진 똑같은 주제의 그림입니다. 당대의 명망있고 영향력이 커다란 두 거장들의 이러한 큰 차이점은 예술가들 사이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고, 후에 루벤파와 푸생파로 구분짓게 됩니다.
1804년 12월 2일, 나폴레옹은 그의 성대한 대관식을 치루고 다비드에게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그림속으로 옮겨달라고 요청합니다. 혁명기동안 정치와 예술 두가지 방면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다비드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1805년에 그 원대한 작업을 시작하여 1807년에 마무리하고 그 이듬해에 작품을 선보입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남단의 조그만 섬 코르시카 태생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그의 빛나는 군사적 업적으로도 유명하지만 동시에 그는 프랑스의 수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파리에 문화예술을 꽃피우게 합니다. 재밌는 점은, 나폴레옹이 흥하는 시기는 신고전주의가 유행을 한창 달릴때와 비슷한 시기를 공유하고 있다는겁니다. 그가 프랑스를 통치하는동안, 프랑스안에서는 각각 통령양식과 제국양식(주로 가구 스타일에 집중된)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예술 양식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의 경력 초기부터 그는 정치적 선전의 중요성을 일찍이 체감하고 있었습니다. 혁명 공화정이 사회적 혼란스러움과 불안정으로인해 국민들로부터 불신을 사기 시작할 무렵, 군사적 업적을 거두며 혁명을 방해하는 외세를 모조리 박살내고 다니는 나폴레옹은 곧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가 북이탈리아에서 가난한 공화국 군대를 이끌며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어내면서 그는 프랑스에서 서민들 사이에서 유명스타가 됩니다. 나폴레옹이 두려워한것은 군중들의 그에대한 무관심과 적개심이였습니다. 앞에 언급했듯이, 그는 그 자신이 스스로 포장하는 일에는 서툴렀기에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그를 선전하는 이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를 원했습니다. 후에 한 영국인이 말하길, "나폴레옹은 선전에 있어서 명수였다" 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그는 나폴레옹이 동방세계, 즉 중동과 인도, 그리고 중국세계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잘 활용하여 이상적인 전제군주적인 이미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점도 지적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대중앞에 설때면 언제나 완벽하게 준비되어있기를 원하였습니다. 선천적으로 그는 좋은 연설가는 아니였던 모양입니다. 대신, 그는 연습을 끊임없이 꾸준히하여 언제나 멋진 대사를 간드러지게 날릴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는 임기응변으로 머릿속에 떠올리는 그대로 연설에 옮기는 그런 타입은 아니였습니다. 대신 그는 연설이 필요할때면 미리 알게모르게 준비하고 연습해서 군중들의 마음을 뒤흔들수 있을 정도록 완벽해지도록 노력하였지요. 1804년에 있었던 대관식의 식 자체도 나폴레옹에 의해 옷입힌 인형들과 함께 리허설이 몇번 진행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에서의 실수는 그의 이미지를 먹칠할 뿐더러 그가 용납할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였죠. 심지어 다비드가 그 대관식을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에도 나폴레옹은 몇번씩이나 참견을 하려했죠. 이러한 점들을 미루어보아 나폴레옹은 그 자신을 선전하는데 있어서 꽤나 집착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의 선전에 관한 집착이 당시 프랑스 예술계에 있어서 좋은 결과를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그 스스스로를 '관대한 후원자'라고 부르던 나폴레옹은 예술 학교도 새로 건립하고 그를 추종하던 화가들에게 폭넓은 지원을 해주었던 모양입니다. 그 예로,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약탈해온 문화재로 가득찬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에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춘걸로 알려져있습니다.
자크루이 다비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의 의뢰를 받던 당시 다비드는 그의 경력에 있어서 최고점을 달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다비드는 1748년,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소싯적에 아버지를 결투로 여의고 나서 친척의 추천을 받아 당시 신고전주의를 이끌던 조셉 마리 비엔의 지도하에 그림 수업을 받으며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였습니다. 비엔은 당시 상류층만의 예술로 여겨지던 경박한 로코코 미술을 싫어했으며 이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1775년 가량부터 다비드는 로마에 머물게 됩니다. 이탈리아에 머무는동안 그는 옛 그리스-로마의 유적지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후에 이는 그가 열렬한 신고전주의 지지자가 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고 생각됩니다. 이 시기에, 그는 라파엘, 카르바지오, 카라치, 그리고 푸생의 영향을 크게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다비드는 혁명 초기의 순수한 이데올로기와 신념을 지지하였습니다. 혁명 기간동안, 다비드는 혁명 사상이 담긴 그림 몇점을 전시하면서 그의 정치적 신념을 드러냅니다.
마라의 죽음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이 그림은 혁명기 전 루이 16세 치하에 그려졌지만 당시 급진적인 사상가들은 이 그림에서 고대 로마공화정에 대한 향수와 로망(?)을 느껴 결국엔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게 됩니다. 특히 자코뱅 당원들이 이 그림을 마음에 들어했다네요.
다비드는 혁명세력에 의해 테니스 코트에서의 맹세를 다룬 그림을 의뢰받았지만 아쉽게도 대충 그려진 스케치만 남겨지고 그림은 결국 정치적 이유로 그려지지 않게 됩니다. 다비드의 친구이자 동지인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였던 다비드는 혼란스러운 정계에 직접 뛰어들어 공직 몇자리도 짧게마나 앉게됩니다. 그러나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고 로베스피에르가 감금된뒤 처형되는 지경에 이르렀을때, 다비드 또한 그의 정적들에 의해 감옥에 수감됩니다. 아이러니한점은, 당시 나폴레옹도 자코뱅파였다는 이유로 수감되고 있었다는 점이죠. 물론 그는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이유로 금방 풀려납니다만.
첫댓글 나폴레옹 대관식 장면은 실제랑 많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죠.ㅎ 먼저 조세핀이 나이에 비해 엄청 젋게 나왔으며, 실제로 대관식에 참여하지 못한 가족들이 전부 다 참여한걸로 나와있고, 교황이 나폴레옹에게 축복을 표하는 손짓을 하는 등.
맞습니다... ^^
흠흠 엠토 다쓰모드 깔고 에이전트 암살하면 나오는 명화 마라의 죽음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