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로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628번 시내버스 이용 구마고속 화원나들목에서 5번 국도 이용 대구쪽 1.4km에서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여 하천 따라 2.5km 지점
수봉정사(壽峯精舍) 천수봉에서 이름해 손님접대및 일족의 모임장소 광거당(廣居堂)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곳 壽石老苔池館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님의 글씨인데 굵직한 대나무와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고가의 분위기다. 인수(仁壽)문고 만여권이 소장되어 한국전적종합목록(국학자료보존협회 발행)에 수록 중곡(中谷)문고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
고려 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인흥사는 없어지고 마을 이름만 인흥으로 남은 터를 잡아 신분에 따른 건축 제한(궁궐만 100칸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이 폐지된 후였기에 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우수한 자재와 기량으로 11개 건물 3,500여평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건축의 전통과 안목을 높였다 남평문씨 의안공 이곡파의 후손인 인산제 문경호(文敬鎬1812-1874) 씨가 건립한 후 160여년에 걸친 문씨세거지인데 시도민속자료 3호로 대구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바 이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해남의 윤씨종가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에서 관리하는 3개 문중의 하나로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이곳의 자랑은 7000여질의 2만권이 넘는 장서인데 후손에게 일제치하의 식민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에 구입단을 파견하여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을 거쳐 지리산의 태산준령을 넘어 운반하는 것은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사망 후인 1931년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냈는데 이는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선조를 모심에도 소홀함이 없어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님이 이 집안 출신이며 주관리자는 종손 문정기님이고 서책관리는 서울신문사 사장을 하신 문태갑님이 하고 계시면서 안내를 하시기도 하는데 언제 방문하여도 좋으나 늦여름 담장마다 능소화가 만개 했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전통적인 도서관은 왕립도서관(규장각 등) 학교도서관(성균관, 향교, 서원등) 개인도서관과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가능한 문중문고(문중 자녀들 교육용) 로 나눌 수 있다. 인수문고는 만권당과 수봉정사에 소장된 ①경(교과서 격인 경전) 536책 ②사(역사서)1813 ③자(기예와 술수 소설등 )588 ④집(개인문집)4011으로 총6,948책과 1975년 이후에 구입한 1,500책으로 8,500책에 20,000여권으로 서원중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안동 도산서원이 4,400책이니 책의 량을 가늠할 수 있다. 경술국치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일본학교에 보내 일본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하여 남평문씨의 자녀 교육을 위한 독자적 프로그램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겸 도서관이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선별은 김영택(유학자요 문장가로 한국소사, 한사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을사보호조약후 통분하여 상해에 거주함)님의 추천으로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 함양, 거창을 넘어 대구로 수차례에 걸쳐 운반되었다. 만권당은 돈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과 재력의 뒷받침을 남평문씨들은 모두 갖추었던 것 같다. 남평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萊파) 문세근(世根)씨가 500여년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에 이주한후 화원에 들어온 것은 문세근의 9대손인 문경호(敬鎬)로 1840년경이었다. 인흥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역대연대표를 작성하고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흥사의 절터였는데 종손이 살고 있는 집이 대웅전 자리이고,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인 고려정은 인흥사때부터 사용한 것이며 밭가운데의 석탑도 인흥사 유물이라고 전한다. 절터 중에서는 명당이 많으나 그렇지 못한 곳도 있는데 바위로 된 곳은 기도처로는 좋지만 주택으로는 좋지 못한데 이곳은 바위산이나 보이지 않는 온화한 곳이었다. 이집의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데 왕가가 아닌 민간 집안에서 500여년에 걸친 조상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이는 집안의 가통이 확실하게 정립되었음과 조상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경호는 천석의 재력을 갖추었고 처음부터 계획한 마을로 우물정(井)자 형태로 400~500여평의 대지를 가진 9개의 가옥과 공공건물인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까지 도합 12채의 건물이 1만여평의 대지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1만여평은 동네마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유공간에 건물이 들어서면 품격이 떨어짐을 우려하여 앞으로도 더 이상의 건물을 짓지 않고 현재 처럼 9채만 유지하기로 문중에서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 살고 차남은 다른 곳에서 사는데 다른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보다 주택을 받은 장남이 적게 가지는 등으로 상속되지만 주택만은 장남상속의 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데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며 직장을 다닐 때는 객지에서 생활 하더라도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이며 외부인에게 집을 판매하지 않아 문씨들만 살고 있어 마을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휴지나 빈병등의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적인 가옥은 종갓집인 문정기씨 가옥으로 반듯한 흙담에 손질된 마당의 잔디, 윤이나는 현관마루 정감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음어져 있어 전통가옥에서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 법도를 지키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조선소설사 저자)은 인흥의 모습을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 나면 수년전 연희 전문학교에 만여권의 도서를 기증한 전남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 壽峯 문영박)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방문하니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이 모여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전채 제시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건과 무림수죽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고 했디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여진 계기는 1910년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로 지었으나 광거당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 공관인 셈이다 그 재력은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이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어 1만권의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광거당 내에서 일곱종의 문헌을 간행하는데도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는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들인 수봉 문영박(1880~1930)이다 만권당의 기획은 문영박이 하고 아버지가 적극 후원하였으니 부자간의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문경호가 터를 잡고 손자인 문봉성이 대들보를 세우고 증손자인 문영박이 기왓장을 다듬고 마당에 나무를 심은 셈으로 문장지와 수봉선생이란 표현들은 문영박을 지칭하며 수봉정사도 수봉 문영박의 사후(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수봉이 교류한 인물중에는 심제 조긍섭(영남지방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창강 김택영(강화학파와 밀접한 관련있음) 난공 이건방(강화학파 핵심멤버), 이정, 변정상 등이며 강화학파는 개화기때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을 만큼 실천적 학파로 일제 강점기를 수용하지 않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만주로 갔으나 강화학파의 맥을 잇기 위해 이건방을 남겼고 위당 정인보에게 전했기에 수봉의 묘갈명을 정인보가 짓게된 것이며 수봉 사망후 상해 임시정부발행으로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은 1931년의 이 조문은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중곡(中谷)문고에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난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씨가 설치하였는데 1955년부터 인수문고 청지기 역할을 하는데 신학문을 하지 못하게 했어도 대학을 다닌 것은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신학문 금지가 해제가 되어 최초로 신학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수문고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오며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장으로 사용 요청시 집안에서 협조하고 장기간 열람한 사람들을 위하여 거경서사도 개방해 놓고 있다고 한다.
08:45 병준충선공파 부회장, 차범부산종친회 총무, 병준님과 함께 목화 이식을 위해 부산을 출발하여 남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구마고속도로를 달리다 화원 나들목으로 나와 5번국도를 따라 대구쪽으로 진행하다 본리동과 남평문씨 세거지의 안내판을 보고 다리를 건너 내려가니 왼편에는 인흥서원(추적 선생 배향)이 있고 오른편이 문씨 세거지로 참깨밭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인수문고앞 주차장에 내리니 연락을 받으신 정기님(종손)과 태갑님(전 서울신문사장)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입구에 심어둔 목화가 30cm 정도 자라 있기에 가져간 것은 분재용으로 쓰기로 하였고 먼저 종가댁을 방문하였는데 양쪽은 2m 가량의 흙과 돌로 담은 쌓았고 도로폭도 2m 정도인데 60여m 를 걸어 대문에 들어가니 거북모양의 잠금장치는 종가에만 거북의 등에 무늬를 세겼다는데 사랑채의 대문과 안채의 대문이 있어 대문이 3개였다. 대지는 400여평에 300여평의 채마밭이 딸렸다 공직에서 물러난후 인흥에서 생활 하시는 정기님의 집안은 의안공 이곡파인데, 원래 성당동에 입향하여 경호선조께서 인흥에 터를 잡으셨고 10여리 떨어진 뒷산에 14대에 걸친 선조님의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손수 커피를 내어오신 김신자(종부)여사 께서는 응접실은 창고를 개조 하였고 안채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안채는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안내를 하시면서 긍지에 찬 자신있는 표정으로 전문가에 가까운 지식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하시면서 조용현 교수님(한국의 명가 저자)도 안채에서 하루를 머물었다고 하고, 건축가와 풍수 관련 분야등의 전문가들의 방문이 잦다고 하신다 안채는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대청의 우측은 부엌이고 좌측은 아담한 방인데 천장의 구조가 특이하였고 아름드리 홍송으로 건축하여 아직 다른 나무 한쪽 덧된 것이 없다는 종부님의 설명을 듣지 않드라도 견고하고 정교하게 지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현판과 그림 앞에서는 워낙 아는 것이 없으니 무식이 탄로날까 하여 질문조차 못했다. 내부는 생활을 위해 개조하였다는데 부엌은 일핏보면 현대식 주방으로 보이지만 싱크대 옆에는 물려 내려온 것이라는 고색창연한 찬장과도 함께 들여 놓은 듯이 잘 어울리고 위에 걸린 에어컨 까지 원래 부터 자리를 잡고 있은 것처럼 현대와 고대가 이질감이 없다고 느낌을 말했더니 종부께서는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고 답하시었다. 부엌의 문을 열어 보이시는데 현대식의 욕실이 나타나니 문경의 태조왕건 촬영 세트장에 갔을때 한식의 기와지붕을 한 건물앞에 화장실의 안내판이 있어 들어갔을 때의 수세식 화장실을 만난 듯한 기분인데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무릎이라도 치고 싶었다.
대청에서 보이는 마당은 온통 꽃밭인데 종부님이 꽃을 좋아해서 3년전 산청에서 목화꽃을 본 후 씨앗을 구하여 목화를 3년째 기르고 있다고 하시고, 야생화도 손수 심어 가꾸어 잔디의 녹색 바탕에 수채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를 보는 듯 한데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대며 서성대는 순하게 생긴 개는 그림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2칸의 행랑채는 행랑살이가 없어 헐고 정원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을 하시는데 배와 포도가 녹음속에 고깔을 쓰고 영글고 옆의 우물이 고려정이라고 설명하시는데 차범총무님은 고려정이란 안내판을 붙여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신다. 사랑채의 문을 열어두면 안채의 대청에서 마을 입구가 보이도록 구조가 되어있어 손님의 내방을 미리 알 수 있고, 경호 선조님께서 건축 당시는 모두가 초가였지만 광거당과 3채의 집을 1910년에 기와를 올리고 차례로 작업하여 30여년전에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1:30 인터넷 족보 입력을 위하여 인흥파보 한권을 기증받아 종가를 나오는데 종손님과 함께 종부님께서 마을 입구까지 전송하면서도 식사 대접을 하지 못함을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는 종부님의 모습에서 친절과 겸손이 몸에 베인 종가집 며느리의 품위를 다시 한번 느낀다. 조용현 교수의 글에서 안동 김성일씨의 집안에서는 종부에게 해가 바뀌면 모든 일가들이 세배를 올리고 종부는 서울에 살면서도 일년의 절반을 안동에 내려와 손님을 접대하면서 종가를 지킨다는 글을 읽고 무척 부러워 했는데 남평문씨 인흥세거지의 종부도 그에 못하지 않으니 가씀이 부듯하였다.
인흥에서 서고 관리를 하시는 태갑님의 안내로 들어간 인수문고는 근간에 건축하여 현대의 인문에 관한 서적을 보관하였으며 열람은 맞은편 건물에서 한는다는 설명이 계셨고 사람이 겨우다닐 좁은 통로외에는 책들로 가득 채웠는데 감명깊에 읽었던 왕비열전등이 앞쪽에 꽂혀있고 영어로된 책들이 안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수봉정사 마루에는 추사의 글씨외에 문진경(송나라의 명필)씨가 적었다는 사백루 현판의 글씨는 날아갈 듯 한데 복사한 글씨로 목판에 세긴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만약 진품글씨가 있다면 가격이 없다는 설명도 하셨다. 설명과 담소 속에 2시간이 잠간인 듯 갔고 정기님과 태갑님의 전송을 받으면서 다음 목적지인 군위로 향했다
열차로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628번 시내버스 이용 구마고속 화원나들목에서 5번 국도 이용 대구쪽 1.4km에서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여 하천 따라 2.5km 지점
수봉정사(壽峯精舍) 천수봉에서 이름해 손님접대및 일족의 모임장소 광거당(廣居堂) 후손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곳 壽石老苔池館의 편액은 추사 김정희님의 글씨인데 굵직한 대나무와 높이 솟은 노송들이 고가의 분위기다. 인수(仁壽)문고 만여권이 소장되어 한국전적종합목록(국학자료보존협회 발행)에 수록 중곡(中谷)문고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한 서고
고려 때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인흥사는 없어지고 마을 이름만 인흥으로 남은 터를 잡아 신분에 따른 건축 제한(궁궐만 100칸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 있었다)이 폐지된 후였기에 井자 모양으로 길을 내고 우수한 자재와 기량으로 11개 건물 3,500여평을 건축하여 우리나라 건축의 전통과 안목을 높였다 남평문씨 의안공 이곡파의 후손인 인산제 문경호(文敬鎬1812-1874) 씨가 건립한 후 160여년에 걸친 문씨세거지인데 시도민속자료 3호로 대구시에서 관리하고 있는 바 이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해남의 윤씨종가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국가기관에서 관리하는 3개 문중의 하나로 가문의 영광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이곳의 자랑은 7000여질의 2만권이 넘는 장서인데 후손에게 일제치하의 식민교육을 받게 할 수 없다하여 국내는 물론 중국에 구입단을 파견하여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을 거쳐 지리산의 태산준령을 넘어 운반하는 것은 돈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수봉 문영박(1880~1930)의 사망 후인 1931년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냈는데 이는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으며 선조를 모심에도 소홀함이 없어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님이 이 집안 출신이며 주관리자는 종손 문정기님이고 서책관리는 서울신문사 사장을 하신 문태갑님이 하고 계시면서 안내를 하시기도 하는데 언제 방문하여도 좋으나 늦여름 담장마다 능소화가 만개 했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한다
전통적인 도서관은 왕립도서관(규장각 등) 학교도서관(성균관, 향교, 서원등) 개인도서관과 유교적인 토양에서만 가능한 문중문고(문중 자녀들 교육용) 로 나눌 수 있다. 인수문고는 만권당과 수봉정사에 소장된 ①경(교과서 격인 경전) 536책 ②사(역사서)1813 ③자(기예와 술수 소설등 )588 ④집(개인문집)4011으로 총6,948책과 1975년 이후에 구입한 1,500책으로 8,500책에 20,000여권으로 서원중 장서를 가장 많이 보유한 안동 도산서원이 4,400책이니 책의 량을 가늠할 수 있다. 경술국치이후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일본학교에 보내 일본사람으로 만들 수 없다하여 남평문씨의 자녀 교육을 위한 독자적 프로그램으로 설립한 사립학교겸 도서관이다
상당수는 중국에서 수입한 책으로 선별은 김영택(유학자요 문장가로 한국소사, 한사계 등의 저서가 있으며 을사보호조약후 통분하여 상해에 거주함)님의 추천으로 구입한 책을 목포로 보내면 소달구지로 남원, 함양, 거창을 넘어 대구로 수차례에 걸쳐 운반되었다. 만권당은 돈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학문에 대한 열정과 자기주체성을 지키겠다는 자존심과 기백, 그리고 당대 명사들과의 다양한 인맥과 재력의 뒷받침을 남평문씨들은 모두 갖추었던 것 같다. 남평문씨가 대구에 살기 시작한 것은 문익점의 9세손(萊파) 문세근(世根)씨가 500여년전 경기도 파주에서 대구에 이주한후 화원에 들어온 것은 문세근의 9대손인 문경호(敬鎬)로 1840년경이었다. 인흥은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11년간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역대연대표를 작성하고 불경까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인흥사의 절터였는데 종손이 살고 있는 집이 대웅전 자리이고, 종가의 문간채 앞에 있는 우물인 고려정은 인흥사때부터 사용한 것이며 밭가운데의 석탑도 인흥사 유물이라고 전한다. 절터 중에서는 명당이 많으나 그렇지 못한 곳도 있는데 바위로 된 곳은 기도처로는 좋지만 주택으로는 좋지 못한데 이곳은 바위산이나 보이지 않는 온화한 곳이었다. 이집의 선산은 14대 조부부터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데 왕가가 아닌 민간 집안에서 500여년에 걸친 조상의 묘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이는 집안의 가통이 확실하게 정립되었음과 조상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경호는 천석의 재력을 갖추었고 처음부터 계획한 마을로 우물정(井)자 형태로 400~500여평의 대지를 가진 9개의 가옥과 공공건물인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까지 도합 12채의 건물이 1만여평의 대지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고 1만여평은 동네마당으로 되어 있는데 여유공간에 건물이 들어서면 품격이 떨어짐을 우려하여 앞으로도 더 이상의 건물을 짓지 않고 현재 처럼 9채만 유지하기로 문중에서 합의를 하였다고 한다. 또한 9채의 주택에는 장남 부부들만 살고 차남은 다른 곳에서 사는데 다른 재산은 차남이나 딸들보다 주택을 받은 장남이 적게 가지는 등으로 상속되지만 주택만은 장남상속의 원칙을 굳건하게 지키는데 문씨 세거지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득이한 방법이며 직장을 다닐 때는 객지에서 생활 하더라도 정년이 되거나 퇴직을 하면 반드시 인흥으로 돌아와 사는 것이 관례이며 외부인에게 집을 판매하지 않아 문씨들만 살고 있어 마을 전체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휴지나 빈병등의 쓰레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표적인 가옥은 종갓집인 문정기씨 가옥으로 반듯한 흙담에 손질된 마당의 잔디, 윤이나는 현관마루 정감있는 사랑채 온돌, 청결한 수세식 화장실 안채옆 채마밭 모두 사람의 손길로 다음어져 있어 전통가옥에서 연상되는 생활의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고 한옥이 지닌 고풍스러움과 낯익은 편안함, 그리고 양반집에 와 있다는 품격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있어 법도를 지키는 명문가 후손들이 사는 동네답다
1935년 동아일보에서 전국의 책이 많은 집을 소개하는 답사기를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연재를 담당한 김태준(조선소설사 저자)은 인흥의 모습을 "조선에 장서가 이야기 나면 수년전 연희 전문학교에 만여권의 도서를 기증한 전남곡성 정씨를 첫째로 꼽고는 아마 그 손가락으로 대구 문장지(文章之 : 壽峯 문영박)씨 장서를 세어야 할 것이다 하도 많은 소문을 들은 터라 일부러 방문하니 상투를 짠 선비님들이 얼른 5~6명이 모여왔다. 장서가 문장지씨는 고인이 되고 그 자손 시채, 전채 제시가 인계해서 유지한다고 한다. 따로이 재실을 깨끗이 짓고 석병토건과 무림수죽이 모두 고아한 흥취가 있었다"고 했디
문씨 집안의 문풍이 전국적으로 알여진 계기는 1910년 광거당이 설립되면서이다 광거당은 본래 재실로 지었으나 광거당내에 만권의 책을 비치한 만권당이 설치된 뒤로 전국의 문인과 학자들이 방문하여 책을 읽고 학문과 예술 그리고 조선의 앞일을 걱정하고 토론하는 문화공간으로 사용됐다. 살롱이면서 도서관이고 아카데미 기능을 가진 복합문화 공관인 셈이다 그 재력은 개기조 문경호의 손자인 후은(後隱) 문봉성(文鳳成1854-1923)이 경제에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여 큰 재산을 이루어 1만권의 서적을 구입하는 한편 광거당 내에서 일곱종의 문헌을 간행하는데도 아낌없는 재정적 후원을 하였는데 이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아들인 수봉 문영박(1880~1930)이다 만권당의 기획은 문영박이 하고 아버지가 적극 후원하였으니 부자간의 호흡이 잘 맞았던 모양이다 문경호가 터를 잡고 손자인 문봉성이 대들보를 세우고 증손자인 문영박이 기왓장을 다듬고 마당에 나무를 심은 셈으로 문장지와 수봉선생이란 표현들은 문영박을 지칭하며 수봉정사도 수봉 문영박의 사후(1936년)에 세운 기념 건물이다 수봉이 교류한 인물중에는 심제 조긍섭(영남지방 산림유학을 대표하는 학자) 창강 김택영(강화학파와 밀접한 관련있음) 난공 이건방(강화학파 핵심멤버), 이정, 변정상 등이며 강화학파는 개화기때 행동하는 양심이라 일컬을 만큼 실천적 학파로 일제 강점기를 수용하지 않고 죽을 것을 알면서도 만주로 갔으나 강화학파의 맥을 잇기 위해 이건방을 남겼고 위당 정인보에게 전했기에 수봉의 묘갈명을 정인보가 짓게된 것이며 수봉 사망후 상해 임시정부발행으로 비단천에 대한국춘추주옹(大韓國春秋主翁)이라는 제목의 추조문과 특발문을 수봉의 자제들에게 비밀리에 보낸 것은 1931년의 이 조문은 독립자금을 지원한 데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며 가로 15cm, 세로22cm의 분홍색 비단천에 활자판으로 인쇄한 임시정부 조문은 문씨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인수문고는 1981년 정부 보조를 받아 수봉정사 옆 공터에 별도의 건물을 지었고 1993년에는 인수문고 옆에 중곡(中谷)문고에 5천여권의 현대의 서적을 보관하였는데 관료와 정치인을 거쳐 서울신문사 사장을 지난 수봉의 손자인 문태갑(文胎甲)씨가 설치하였는데 1955년부터 인수문고 청지기 역할을 하는데 신학문을 하지 못하게 했어도 대학을 다닌 것은 조부님이 돌아가신후 신학문 금지가 해제가 되어 최초로 신학문을 했다고 한다.
현재 인수문고는 동양사상과 고전을 연구하는 대학교수들이 많이 찾아오며 광거당도 개방하고 있으며 학술세미나 장으로 사용 요청시 집안에서 협조하고 장기간 열람한 사람들을 위하여 거경서사도 개방해 놓고 있다고 한다.
08:45 병준충선공파 부회장, 차범부산종친회 총무, 병준님과 함께 목화 이식을 위해 부산을 출발하여 남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다 구마고속도로를 달리다 화원 나들목으로 나와 5번국도를 따라 대구쪽으로 진행하다 본리동과 남평문씨 세거지의 안내판을 보고 다리를 건너 내려가니 왼편에는 인흥서원(추적 선생 배향)이 있고 오른편이 문씨 세거지로 참깨밭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인수문고앞 주차장에 내리니 연락을 받으신 정기님(종손)과 태갑님(전 서울신문사장)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입구에 심어둔 목화가 30cm 정도 자라 있기에 가져간 것은 분재용으로 쓰기로 하였고 먼저 종가댁을 방문하였는데 양쪽은 2m 가량의 흙과 돌로 담은 쌓았고 도로폭도 2m 정도인데 60여m 를 걸어 대문에 들어가니 거북모양의 잠금장치는 종가에만 거북의 등에 무늬를 세겼다는데 사랑채의 대문과 안채의 대문이 있어 대문이 3개였다. 대지는 400여평에 300여평의 채마밭이 딸렸다 공직에서 물러난후 인흥에서 생활 하시는 정기님의 집안은 의안공 이곡파인데, 원래 성당동에 입향하여 경호선조께서 인흥에 터를 잡으셨고 10여리 떨어진 뒷산에 14대에 걸친 선조님의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손수 커피를 내어오신 김신자(종부)여사 께서는 응접실은 창고를 개조 하였고 안채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데 안채는 일반 관광객들에게는 개방하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안내를 하시면서 긍지에 찬 자신있는 표정으로 전문가에 가까운 지식으로 친절하게 설명을 하시면서 조용현 교수님(한국의 명가 저자)도 안채에서 하루를 머물었다고 하고, 건축가와 풍수 관련 분야등의 전문가들의 방문이 잦다고 하신다 안채는 인흥사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로 대청의 우측은 부엌이고 좌측은 아담한 방인데 천장의 구조가 특이하였고 아름드리 홍송으로 건축하여 아직 다른 나무 한쪽 덧된 것이 없다는 종부님의 설명을 듣지 않드라도 견고하고 정교하게 지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으나 현판과 그림 앞에서는 워낙 아는 것이 없으니 무식이 탄로날까 하여 질문조차 못했다. 내부는 생활을 위해 개조하였다는데 부엌은 일핏보면 현대식 주방으로 보이지만 싱크대 옆에는 물려 내려온 것이라는 고색창연한 찬장과도 함께 들여 놓은 듯이 잘 어울리고 위에 걸린 에어컨 까지 원래 부터 자리를 잡고 있은 것처럼 현대와 고대가 이질감이 없다고 느낌을 말했더니 종부께서는 인테리어 전문가들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고 답하시었다. 부엌의 문을 열어 보이시는데 현대식의 욕실이 나타나니 문경의 태조왕건 촬영 세트장에 갔을때 한식의 기와지붕을 한 건물앞에 화장실의 안내판이 있어 들어갔을 때의 수세식 화장실을 만난 듯한 기분인데 옛것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무릎이라도 치고 싶었다.
대청에서 보이는 마당은 온통 꽃밭인데 종부님이 꽃을 좋아해서 3년전 산청에서 목화꽃을 본 후 씨앗을 구하여 목화를 3년째 기르고 있다고 하시고, 야생화도 손수 심어 가꾸어 잔디의 녹색 바탕에 수채물감으로 그린 풍경화를 보는 듯 한데 낯선 사람을 보고 컹컹대며 서성대는 순하게 생긴 개는 그림이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2칸의 행랑채는 행랑살이가 없어 헐고 정원으로 만들었다는 설명을 하시는데 배와 포도가 녹음속에 고깔을 쓰고 영글고 옆의 우물이 고려정이라고 설명하시는데 차범총무님은 고려정이란 안내판을 붙여야 한다고 재삼 강조하신다. 사랑채의 문을 열어두면 안채의 대청에서 마을 입구가 보이도록 구조가 되어있어 손님의 내방을 미리 알 수 있고, 경호 선조님께서 건축 당시는 모두가 초가였지만 광거당과 3채의 집을 1910년에 기와를 올리고 차례로 작업하여 30여년전에 모두 기와집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1:30 인터넷 족보 입력을 위하여 인흥파보 한권을 기증받아 종가를 나오는데 종손님과 함께 종부님께서 마을 입구까지 전송하면서도 식사 대접을 하지 못함을 미안스럽게 생각하시는 종부님의 모습에서 친절과 겸손이 몸에 베인 종가집 며느리의 품위를 다시 한번 느낀다. 조용현 교수의 글에서 안동 김성일씨의 집안에서는 종부에게 해가 바뀌면 모든 일가들이 세배를 올리고 종부는 서울에 살면서도 일년의 절반을 안동에 내려와 손님을 접대하면서 종가를 지킨다는 글을 읽고 무척 부러워 했는데 남평문씨 인흥세거지의 종부도 그에 못하지 않으니 가씀이 부듯하였다.
인흥에서 서고 관리를 하시는 태갑님의 안내로 들어간 인수문고는 근간에 건축하여 현대의 인문에 관한 서적을 보관하였으며 열람은 맞은편 건물에서 한는다는 설명이 계셨고 사람이 겨우다닐 좁은 통로외에는 책들로 가득 채웠는데 감명깊에 읽었던 왕비열전등이 앞쪽에 꽂혀있고 영어로된 책들이 안쪽에 진열되어 있었다. 수봉정사 마루에는 추사의 글씨외에 문진경(송나라의 명필)씨가 적었다는 사백루 현판의 글씨는 날아갈 듯 한데 복사한 글씨로 목판에 세긴 것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만약 진품글씨가 있다면 가격이 없다는 설명도 하셨다. 설명과 담소 속에 2시간이 잠간인 듯 갔고 정기님과 태갑님의 전송을 받으면서 다음 목적지인 군위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