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12년 10월 20일 제 4회 칠장사 어사 박문수 전국 백일장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대상을 받은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박세은 양의 작품입니다.
백일장운영위원회 상임위원장 김학용 국회의원이 발행한 문집
『나무』에서 옮겨온 글임을 밝혀둡니다.
카페 자유게시판 799번 내용 관련사항입니다.
사진은 글 내용과 직접관련 없음. 제공: 사진작가 빌라니
나무
안양예고 2학년 박세은
가을이 되면 우편함 326호에는 봄에 뿌린 씨앗이 수확되었다. 탱글탱글 여문 열매들은 ‘독촉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우편함 밖으로 고개를 내 밀었다. 뽑아도 뽑아도 다음 날이면 새로운 경고장이 혀를 내밀고 집을 방문했다. 집 한 구석에 가득 쌓인 우편봉투들은 어머니의 한숨처럼 늘어만 갔다.
‘공사 진행일 2012년 9월 28일까지 묘 이전을 부탁드립니다.’ 수백 번 날아오던 편지의 내용은 매일매일 달랐다. 기나긴 장문으로 배달되어 오던 편지는 108번째가 지나자 간단한 문장으로 변형되었다. 위로장에서 경고장으로, 다시 독촉장으로 변경되기까지 많은 세월이 흘렀다. 편지 봉투를 접어 폐휴지함에 넣었다. 아버지의 나무가 보고 싶어졌다.
아버지는 내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소원 나무를 일러주었다. “종이에 소원을 써서 여기에 매달아 놓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나는 그때부터 먹고 싶은 사탕이나 빵 이름을 적어 놓았고 이틀이 지나면 어김없이 소원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빵 봉지를 뜯으며 좋아하는 내게 아버지는 다가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원을 이루어 주는 요정이 아버지라는 것을 안 후부터 나는 현금을 적어 놓은 쪽지를 매달아 놓았다. ‘용돈이 부족해요, 만 원만 주세요.’ ‘친구랑 놀이동산에 갈 수 있도록 사만 원만 주세요.’ 요구하는 소원이 늘어 갈 때마다 가지는 쪽지의 무게로 인해 축축 쳐져 갔고 영양분이 공급되지 못해 시들어 갔다.
소원 나무가 하루하루 옅은 숨을 쉬며 생명을 유지해 갈 무렵, 아버지는 나무가 되었다. 산에서 버섯을 캐며 무심코 맛을 본 것이 화근이었다. 의사가 내 민 독버섯은 아름답지 않았다. “가끔씩 이렇게 화려하지 않은데도 식용 버섯 사이에 싹을 틔어서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독에 감염된 나무는 소생할 수 없었다. 병실에 누워 나무껍질처럼 딱딱해진 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어머니는 매일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 병실을 찾아와 물수건으로 등을 닦았다.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며 욕창 방지를 위해 등을 밀던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심장은 낮은 곡선을 그렸다.
앰뷸런스가 들어오지 못하는 좁은 골목에 상여가 들어가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의 나무가 시들었음을 깨달았다. 잠을 자는 것처럼 감은 두 눈에는 소원을 들어 주던 요정의 눈빛이 어려 있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를 납골당 대신 나무 아래에 매장하기로 했다. 끈으로 관을 묶어 네모난 구덩이 안에 묘를 안장시켰다. 서서히 땅 안으로 묻히는 아버지는 나무뿌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리고 나무판으로 무덤의 모양이 안정되게 틀을 잡는 동안 나는 소원나무에 다가갔다. 나의 소원을 들어 줄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버지 좋은 곳으로 가게 해 주세요.’ 삼베옷을 찢어 글씨를 써 넣었다. 하얀 옷깃에 잉크가 번져 갔다.
땅을 매입한 지 몇 년이 지나자 묘 옆을 둘러싼 땅을 소유하고 있던 주인은 별장 업체에 땅을 팔았다. 묘 주변은 커다란 건물들이 세워졌다. 뼈대를 만들고 콘크리트로 벽면을 덧칠하며 업체는 아버지의 묘와 나무를 없애기를 강요했다. 아버지의 묘로 인해 공사는 완공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매년 가을이 되면 인부들이 한가할 시간에 독촉장은 집을 찾아와 우리 가족을 조여 왔다.
신을 신고 아버지의 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산의 정상에 오르자 턱 끝까지 숨이 막혀왔다. 아버지의 나무는 주변 공기로 인해 여기저기 가지가 뜯겨져 있었다. 품에 있던 종이를 찢어 펜을 꺼내 글씨를 써 내력 갔다. ‘아버지와 나무가 무사하게 해 주세요.’ 마지막 남은 가지에 소원을 매달았다. 소원의 무게로 인해 나뭇가지는 쳐져갔다. 나무를 품에 안았다. 어느새 나이테가 늘어난 나무는 두 팔로 감을 수 없을 정도로 자라 있었다. 볼을 간질이는 나무껍질의 촉감은 아버지의 팔등과 비슷했다. 울컥,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 나를 꼭 껴안아 주세요.” 거친 껍질을 쓰다듬으며 나는 속삭였다. 가을의 편지를 담은 잎사귀가 펄럭였다.
첫댓글 성민희 회장님, 자료획득의 어려움으로 인해 소개가 다소 지연되었습니다.
ㅎㅎㅎ 큰 숙제를 하셨네요.
전혀 생뚱맞게. 문예잡지가 아닌 국회의원이 발행한 문집에 실렸었군요. ㅋ
현대수필에서 기성 작가 대우를 해준다면서 왜 책에는 싣지 않았나 싶더라구요
진짜 찾기 어려우셨겠어요. ^^
끈질긴 수사로 기어이 범인을 체포한 형사에게 드리는...... 일계급 특진입니다. 석현수 선생님. ㅎㅎ .
아버지와 나무의 메타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 기교가 예사롭지 않네요. 이제 겨우 고등학생인데.
글 전체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시상식날 웃음기 전혀 없이 어둡던 소녀의 얼굴이 오브랩 됩니다.
훌륭한 작가로 성장할 것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