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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무진to the칸(1) 짓밟힌 소녀
intro
<축구문화사>는 책을 내면서 멈춘 상태고, 야심차게 시작한 <어른을 위한 교양 공룡>시리즈도 최근작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날 정도의 상태라 독자열분덜의 면상을 뵐 면목이 없다.
본 시리즈는 그간의 태만을 바로잡아 심기일전하기 위해, 또한 다음의 프로젝트를을 시작하기 전에 가벼운 연습을 하고자 하는 마음에 기획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이것도 제대로 써내지 못한다면 올해의 계획들을 어찌 실현하겠는가 싶다. 이 이야기는 역사상 최대의 사이즈를 자랑하는 위인이자 악당인 테무진, 혹은 칭기즈칸에 관한 것이다.
이 심기일전용 연재물의 주제가 왜 테무진이냐. 물론 일차적으로는 걍 내가 쓰고 싶어서다. 하지만 독자열분덜을 위해서도, 굳이 테무진인 이유가 마련되어있긴 하다. 역사속 위인들 중에 테무진처럼 힘들고 비참한 시절을 오랫동안 보낸 인물은 드물다.
테무진은 일생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야 세계를 정복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되어야지! 원래 난 그릇을 크게 타고났으니까~>하는 만화적인 야심을 품지 않았다. 테무진 뿐만 아니라, 이런 사고방식은 대체로 만화에만 존재한다.
혹은 만화처럼 유치한 인간에게나…
테무진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떨쳐내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정복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설계자’였다. 암컷 수백마리를 차지한 수컷 바다코끼리마냥 테스토스테론이 마냥 넘쳐서, 부하들은 충성을 맹세하고 적들은 벌벌 떤 그런 단순무식한 양반은 아니었단 얘기다.
테무진은 몽골사회와 몽골군이 이길 수밖에 없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몽골군은 테무진 개인의 ‘지도력’이 아니라, 그가 만들고 관리한 시스템에 의해 성공한 것이다.
대중은 특정한 인간을 지지하는 듯 하지만, 결국은 그를 통해서 대변되는 ‘시스템’ 즉 체제를 지지하거나 반대한다(물론 자신에게 적대적인 시스템인데도 속아서 지지하는 경우도 있고, 자신에게 유리한 시스템이지만 정의롭지 못하다고 믿기에 반대할 수도 있다.). 테무진이 만든 시스템은 몽골인들을 속일 필요가 없었다. 있는 그대로 누구에게나 공정한, 충성을 바칠 가치가 충분한 시스템이었다. 덧붙여 테무진은 평생 동안 부하에게 한 번도 배신당하지 않았다.
테무진은 의외로 부드러운 남자였다. 눈물도 많았고(별 것 아닌 일에도 잘 울었다.) 권위적이지도 않았다.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에도 모르면 모른다고 했다. 그는 중국이나 페르시아의 학자들 앞에서 자신은 글도 못 읽는 무식쟁이라고 솔직히 말하고 조언을 구했다. 실수했을 때는 아랫사람에게도 즉시 미안하다고 했다.
‘칸(Khan)’은 동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지도자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테무진은 세계를 정복하면서 일생을 보내지 않았다. 그는 삶의 대부분을 초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보냈다. 본 시리즈 <테무진to the칸>은, 테무진이 어떠한 과정에 의해 칸이 되었는지까지를 다룬다.
물론 테무진 칸이 칭기즈칸으로 업그레이드되는 <칸to the카간>을 쓸 수도 있고(‘카간’은 ‘대칸’, ‘칸 중의 칸’ 즉 왕이 아닌 황제급 지도자를 뜻하는 동-북-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언어다.), 칭기즈칸이 드디어 자신의 정체성을 세계정복자로 설정하고 문명 대 문명의 대결을 벌이게 되는 <칸to the월드>까지 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디까지 쓸 지는 내맘이다.
아아… 옛날 옛적에…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까지는 아니고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아마도) 1153년 어느 가을날. 한 소녀를 태운 우차(牛車)가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몽골사람들은 야크와 소를 구분하지 않고 한 단어를 썼다. 따라서 소녀가 탄 수레를 끈 동물이 야크였는지 소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사실 두 동물은 생물학적으로 보면 가까운 친척사이로, 소나 야크뿐 아니라 말, 양, 낙타 등도 키워온 몽골인들에게는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황소나 젖소나 똑같이 소인 것처럼…(사진의 동물이 바로 야크)
소녀가 탄 수레를 호위하는 이는 말에 오른 한 소년. 둘 다 10대 중반쯤 되었는지라, 요즘 우리한테나 소년소녀지, 당시 기준으로는 어엿한 청년과 처녀다. 소녀의 이름은 발음법에 따라 후엘룬, 헐룬, 커어룬, 호엘룬 등 다양하게 부를 수 있다. 여기서는 걍 헐룬이라 부르기로 하자. 소년의 이름은 ‘칠레두’였다.
당시 몽골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저명한 사학자 잭 웨더포드에 따르면, “쇠로 된 등자 하나만 있어도” 마을에서 제일 잘나가는 남자였다. 등자란 말에 오른 사람의 발을 받쳐주는 받침대를 뜻하는 말이다. 훗날 칭기즈칸이 되는 테무진은 자신의 의형제인 ‘자무카’에게 아주아주 귀한 선물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귀한 선물이란 게 겨우, 양의 복사뼈에 쬐그만 놋쇠 조각을 박아 넣은 거였다.
놋쇠조각… 당시 고려에서는 시장통마다 놋쇠그릇이 굴러다녔음을 생각해보면, 이게 선물할 만한 물건으로 통용된 초원이 얼마나 가난했는지 알 수 있다. 아마도 중국 북부쯤에서 매매되거나 약탈된 놋쇠물건 하나가 테무진이 사는 북으로, 북으로 흘러왔을 것이다. 그러면서 원래의 형체를 잃고 해체되고 조각났을 것이다. 그 찌그러진 쇳조각 하나를 박아 넣어서 귀해진 복사뼈였을 것이다. 참고로, 몽골의 아이들은 짐승의 복사뼈를 주사위나 공깃돌로 쓴다.
이런 설명을 하는 이유는, 헐룬과 칠레두가 지나던 곳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닌’ 곳이었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다. 그 두 사람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소년소녀다. 이 두 사람이 초원 어딘가를 지나갔다…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중요도로 따지면 백 년 전 영국 어디쯤에서 잭과 제인이 산책을 나갔다거나, 독자여러분이 어제 친구의 주선으로 소개팅을 나가 킹카 혹은 폭탄을 만났다거나 하는 일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일이라는 거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역사적 사건은 우연에 의해 폭발한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하러 소년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둘은 신랑신부였던 것이다. 몽골의 결혼제도(관습이라 부르는 편이 더 적당하겠지만)는 기본적으로 데릴사위제다.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혼종문화를 갖고 있었던 고구려에도 데릴사위제도가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북방유목민식이었다. 자 그럼 먼저 데릴사위제가 뭔지를 알아보자. 중고등학교 때처럼 “남자가 처가에 들어가는 제도”라고 퉁치고 끝나면 간단하겠지만, 이 암기위주 공식에는 “왜?”가 없다.
전통적으로 결혼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서약이었던 적은 없다. 요건 서양 근대 이후에나 생긴 환상이고, 원래는 그보다는 훨씬 실용적이다. 정략결혼이니 하는 건 나중에 얘기하고, 여기서는 노동력에 대한 것만 집중해보자.
초원의 삶에선 여자가 놀 수 없다. 물론 논다고 해봐야 갖은 가사에 시달리며, 고작해야 본격적으로 근육을 쓰는 험한 육체노동을 피하는 정도지만… 어쨌든 놀 수 없다.
목축을 하고 있는 몽골의 여자아이들
중국과 비교해보면 특히 그렇다. 중국인들(주의해야 할 것은, 주로 중국 ‘남부’문화라는 것.)의 생활을 지켜본 한국 여자들은, <중국여자들은 남자를 어떻게 이다지도 훌륭하게 훈련시켰는지>를 매우 궁금해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내에게 차와 아침을 대접한 후, 돈벌어오러 출근하고 열심히 일한 다음 퇴근해서는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투정하는 아내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며 아내가 먹을 저녁요리를 준비하는 중국 남자… 여자들끼리 모여 마작이라도 할라치면 집주인 되는 남편은 정성을 다해 웨이터 노릇을 자처한다.
중국 남부 한족문화의 전통적인 부부관계는, 이 문화권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말해준다(물론 중산층 이상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긴 하다.). 이런 문화는 남존여비 사회의 또 다른 단면이다. 중국인들은 집안에서 뭔가를 키우는 걸 좋아한다. 인공적인 공간에서 감상하기 위한 물고기가 처음 생긴 나라가 중국이다(금붕어와 잉어를 말한다.). 화분을 처음 발명한 곳도 중국이다. 새장이 처음 만들어진 곳도 물론 중국이다. 분재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남자들은 취미생활의 일환으로, 집안에서 난초를 가꾸고 새를 애지중지 키우듯이 ‘아내를 가꾼다.’ 잘 먹이고 잘 입혀서 <감상>하는 것이다. 투정부리는 모습조차도 감상의 대상이다. 전족은 남성의 성적 만족을 위해 여성의 신체를 조작하는 악습이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 한 가지는 이 여자들은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거다.
전족은 <자연을 인공에 가두는> 중국적
취향의 궁극이다.
11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초원엔 그딴 거 없다. 이 기사의 주인공 헐룬은 자기 아들이 유라시아 대륙의 반을 정복했을 때도 가축의 젖을 짰다. 물론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동했을 리는 없다. 일상의 흐름과 생활습관이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초원엔 농경문명의 풍요가 없다. 풍요롭다 하더라도 삶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려면 노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남자들이 수렵과 전쟁을 하는 동안 여자들은 소, 야크, 양, 말, 염소, 낙타와 아이들과 노인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 사람 한 명당 적게는 십 수 마리에서 많게는 백여 마리의 가축이 딸려 있다.
몽골제국이 확장될 때, 남자들이 전쟁할 동안 제국을 관리한 것은 여자였다. 몽골군의 인프라는 가축에서 나온다. 남자들의 전쟁을 여자들이 받쳐준 거다. 늙은 남자와 포로 등 다른 인력도 있었겠지만, 거의 전적으로 여자들이 초원을 ‘돌아가게’ 했다고 보면 된다(덧붙이자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노동의 양과 권리는 비례한다. 몽골도 남존여비 사회였지만, 초원의 여자들은 다른 문화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목소리가 컸다.’ 이와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은데, 이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하자.).
능숙하게 말을 다루고 있는 여자아이. 네 살이다.
이렇듯 결혼을 한다는 건, 한 여성의 노동력을 공짜로 제공받는 걸 뜻한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수많은 문화권에서 ‘신부값(신부대라고 하기도 한다)’이라는 게 존재한다. 아프리카의 줄루족이나 중동의 유목민들은 가축으로 신부를 데려오는 값을 치렀다. 다른 문화권에서는 물품이나 현금을 내놓기도 했다.
한편 신부가 지참금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 남녀차별이 심한 인도에서 노동의 권리와 의무는 남자에게만 속해 있는 경우가 절대적이다. 따라서 한 집안이 신부를 받아들이게 되면 총 노동력은 그대로지만, 노동력이 책임지는 ‘입’은 하나 는다. 이 평생의 비용을 ‘선결제’하는 것이 바로 지참금이다. 결혼할 때 갖고 온 지참금이 적다고 학대당하는 인도여자들을 다룬 기사들은 셀 수도 없이 많다. 하여간 이것도 악습은 악습이다.
여하튼, 동아시아 북방의 유목민들은 신랑 집안이 신부 집안에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딱히 뭐 대단한 걸 주질 않는다. 모피옷이나 칼, 활 따위의 선물을 주긴 하지만, 가축처럼 생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선물은 없다. 초원의 생활이 원체 가난하기도 하고, 다른 ‘합리적인’ 대안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이 대안이 바로 데릴사위제다. 신부가 시집가서 평생 제공할 노동력을 조금이라도 보상받는 방법 중 가장 확실한 것은, 신랑이 미리 처갓집에서 몸으로 때워서 ‘선결제’하는 것이다. 어릴 때 처갓집에 가서 결혼적령기가 될 때까지 쎄빠지게 일하는 거다(우리나라도 전통적으로 가난한 남자들은 처갓집에서 몇 년간 머슴으로 일하는 풍습이 있었다. 학창시절 때 김유정의 <봄봄> 다들 읽어보셨을 거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는 데릴사위제는, 초원 유목민들에게 딱 들어맞는 관습이었다.
참고로 전통 유목생활에서 몽골 사람들은 남자아이를 지나칠 정도로 사랑하며 키운다. 가정교육이 이렇게 허술하면 나중에 커서 초원의 양아치가 될 법도 하지만, 어차피 처갓집에서 막노동과 웬갖 잡일에 시달리며 몇 년 간이나 눈칫밥을 먹어야 하는 걸 생각해보면 집안에서까지 굳이 엄하게 키울 필요가 없는 거다.
고향을 떠나 남의 집에 일하러 온 코찔찔이 소년은 겁에 잔뜩 질려있게 마련이다. 성격이 대담하다 하더라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 혼자 떨어진데다, 처갓집 어른들 입장에선 몇 년 후에 귀한 딸래미를 뺏기기 전까지 ‘뽕을 뽑아야’ 하기 때문이다.
데릴사위로 온 꼬맹이에게 유일한 ‘내 편’은 신부밖에 없다. 다 큰 처자가 꼬마신랑과 결혼하는 우리나라의 ‘조혼제’는 고려시대에 몽골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신부가 볼에 바르는 연지곤지도 몽골에서 왔다.). 초원에서 신부는 신랑보다 두, 세살 많은 것이 관례다.
척박하고 일이 많은 초원에서는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기 힘들다. 부부는 운명공동체다. 이 관계는 다른 문화권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긴밀하다. 가축을 어떻게 관리할지, 올 가을엔 어디로 이동해서 천막을 칠 지 부부가 함께 의논하고 결정한다. 그런데 남자는 여자보다 성장이 늦는다. 초등학생 때 같은 학년의 남자아이들에 비해서 여자아이들이 얼마나 조숙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니 신랑신부의 나이차이가 말이 두세살이지, 실제로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대여섯 차이가 나게 된다. 남편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어른으로 자라기 전까지, 여자가 어른 노릇을 하며 가정을 이끄는 셈이다. 우쨌든, 이렇게 나이차가 나다 보니 신부는 자기 집에 혼자 온 꼬마신랑을 어르고 달래고, 때로는 꾸중도 하고 콧물도 닦아주며 보살피게 된다.
또한 인구밀도가 적은 데다가 사람보다 가축이 훨씬 많은 초원에서는 게르(천막이자 집을 가리키는 몽골어. 중국식으로는 ‘파오’라고 한다.)와 게르가 뚝뚝 떨어져있다. 어린아이의 입장에서는 동년배 친구를 만나기도 힘들거니와, 만난다 하더라도 철마다 목축지를 옮기면서 떨어지기 일쑤다.
우리처럼 학교 가면 초글링이 득실대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한 게르에서 수 년간 함께 사는 두 꼬맹이는 자연스럽게 소꿉친구가 된다.
뿐만 아니다. 몽골에선 신부가 신랑에게 ‘성교육’을 시켜주는 게 관습이다. 신부는 적당한 때가 됐다고 느끼면 꼬마신랑에게 가벼운 스킨십부터 시작해 키스 등등을 거쳐 ‘남자가 잠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직접 가르친다. 자신과 평생 함께 살 사람이므로 정성을 기울이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몽골 남자에게 아내란 소꿉친구이자, 베스트프렌드이자, 누나이자, 어머니이자, 첫 경험의 그녀이자, 동료이자, 가장 중요한 조언자이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런 부부관계는 초원 바깥의 남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이 중요하고 긴밀하다.
헐룬과 칠레두도 그런 사이였다. 이미 칠레두는 처갓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세상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신부 헐룬과 함께 자신의 부족인 ‘메르키트’부족의 영토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리면, 이제 그도 어엿한 가장이다. 얼마나 좋았겠는가? 이제 조금만 더 가면 고향땅이다.
몽골의 결혼 청첩장
참, 그러고보니 지금 지나치고 있는 이 땅엔 ‘몽골족’이라는 부족이 살고 있다. 훗날 몽골족은 주변 초원의 유목민들을 흡수해 죄다 ‘몽골인’으로 만들어버리지만, 그건 나중 얘기다. 당시 몽골족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부족으로, 초원의 북쪽 끄트머리에 간신히 붙어 있었다. 바로 위에는 시베리아 숲이 있었다.
두 사람은 바로 이곳, 오논 강가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땅이 워낙 척박해 몽골족 사람들은 가축을 많이 키울 수 없었다. 모자라는 고기는 숲에서 사냥을 해 충당했다. 사냥이란 것도 뭐 대단한 건 아니다. 배고픈 몽골인들은 쥐까지도 잡아먹었다. 그 외 풀밭과 숲에서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은 닥닥 긁어모았다. 이렇게 배고프게 살다보니 약탈과 강도짓을 하게 된다.
초원에서 약탈은 항상 일어나는 일이지만, 몽골족은 좀 심했다. 사람을 붙잡아 인신매매를 하기도 했고, 여자를 훔치기도 했다. 특히 여자는 중요했다. 이런 헐벗은 부족에 딸을 시집보내는 아버지는 별로 없었으니, 여자를 약탈해 아이를 낳게 해야 부족의 머릿수를 유지할 수 있었을 터… 물론 세력이 약해서, 다른 부족이 군대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공격하면 냅다 도망가기 바빴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었지만, 남들이 봤을 땐 양아치 수준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고려인들)이 북망 유목민들을 오랑캐라고 부를 때, 이 ‘오랑캐’들은 자신들을 ‘초원 사람들’과 ‘숲 사람들’로 나눴다. 예를 들어 한때 금나라를 세웠다가 망한 후 나중엔 청나라를 세우는 여진족(만주족)은 ‘숲 사람들’에 속했다. 초원과 숲은 생활의 방식이 조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부족민들의 눈에, 숲에 붙어있으면서도 초원을 기웃거리는 몽골족은 어정쩡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에 비해 헐룬의 부족인 ‘올쿠누트’족은 동쪽의 풍요로운 초원에 자리잡고 있었다(올쿠누트 족이 숲 사람들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그래도 무척 잘사는 부족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는 게 괜찮아서인지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부족이다. 헐룬도 미녀였다고 알려져 있다.
신랑 칠레두의 부족인 ‘메르키트’족도 몽골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튼실했다. 몽골족과 가까운 거리에 있지만, 세력이 크고 싸움을 잘해서 시베리아 숲 속에 사는 부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메르키트족의 땅을 향하는 신랑신부 – 음흉한 눈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한 악당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예수게이’였다.
몽골족은 수십 개의 크고작은 씨족으로 이뤄져 있었다. 예수게이는 그 중 ‘보르지긴’ 씨족 출신이었다. 이 씨족 중 ‘키야드 혈족’의 수장이었다. 혈족이라고 하면 꽤 근사해 보이지만 그래봐야 대가족 정도다. 그러니 가장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할 것이다.
주 : 유목문명은 정주문명과 많은 면에서 다르다. 땅과 땅의 경계란 게 없는 초원에서 <내 편>과 <남의 편>은 철처하게 혈통으로 구분된다. 우리 어머니는 밀양 박씨지만, 경상도 사람을 놀리는 유머를 들으면 유쾌하게 웃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이 다르다. 항상 먼 거리를 이동하며 가축을 치는 사람들에게 ‘특정 지역의 정체성’이 형성되긴 힘들다. 이들의 정체성은 ‘함께 이동하는 혈통 집단’에 귀속되어 있다.
또 씨족이라고 해봐야 어차피 혈통 단위다. 예를 들어 나는 ‘남양 홍씨’의 후손이다. 남양 홍씨는 풍산 홍씨, 당산 홍씨와 먼 친척사이다. 또 남양 홍씨는 ‘토홍계’와 ‘당홍계’로 나뉘어 있다. 전국의 홍씨 전체를 몽골족이라고 하면, 예수게이는 홍씨들만 사는 시골 집성촌의 이장님이나 청년회장 정도 되었을 것이다.
예수게이는 쌈 잘하기로 소문난 사내였다. 그래서인지 추종자들도 많았다. 확실히, 다른 부족과 달리 분열되어 지들끼리 치고받고 있던 몽골족 내에서는 주목받는 젊은이였다. 그렇지만 그정도 되는 사내야 초원 전체로 보면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예수게이는 사냥을 나온 참이었다. 언덕에 올라 어디 가젤이나 사슴떼가 눈에 띌까 하고 초원을 내려다보는데 결혼적령기를 딱 맞춘 십대 소녀가 있지 않은가?
몽골 사냥꾼. 사냥에 쓰이는 매는 매 둥지를 털어서 새끼 때부터 훈련시킨다.
예수게이는 너무 가난해서 사윗감으로는 낙제였다. 혈족을 먹여살리기 바빠 데릴사위짓을 할 여유도 없었다. 결혼적령기도 훨씬 지나 있었다. 그런데 고작 남자애 하나 딸린 올쿠누트 족의 처녀라니… 이게 웬 떡인가 말이다.
사실 예수게이한테는 소치겔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소치겔은 정식 부인이 아니었다. 아마 어딘가에서 약탈하거나, 정상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득템’한 여자였을 것이다. 둘 사이엔 아들도 하나 있었다. 하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아내, 아니 여자 하나 더 생기면 좋지 뭐.
신부는 소(혹은 야크)가 끄는 수레를 타고 있다. 예비 말은 없었다. 뻥 뚫린 초원에서는 모든 게 속도로 결정된다. 말을 타고 쫓으면 얼마든지 여자를 약탈할 수 있다. 신랑이 자기 말에 신부를 태워봐야 두 사람을 태운 말은 속도가 느려질 것이다.
하지만 예수게이는 신랑과
여자를 내놔라! 음하하하하
사태를 감지한 칠레두는 신부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헐룬은 칠레두에게 얼른 혼자서 도망가라고 설득한다. 헐룬이 이별인사를 하는 대목은 정말이지 절절하다.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면… 그녀를 헐룬이라고 불러줘요.”
그러면서 자기가 입고 있던, 짐승의 가죽 혹은 털로 만든 몽골식 조끼를 벗어서 사랑의 정표로 건네준다. 칠레두는 복수를 맹세하며 메르키트의 땅으로 도주한다. 역사(<몽골비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 칠레두는 멀어져가는 헐룬의 모습을 자꾸만 뒤돌아보았다고 한다.
예수게이 일당은 소녀 혼자 남은 수레를 간단히 접수했다. 칠레두는 걍 내버려뒀다. 어차피 남자녀석 따위 관심도 없다. 몽골족의 거주지로 끌려가던 소녀 헐룬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크고 긴 비명을 질렀다. 이 비명소리의 크기가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정도다.
이렇게 헐룬은 나이많고 가난하고 게다가 범죄자인 예수게이와 결혼하게 된다. 말이 결혼이지, 예식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예수게이가 겁탈하고 나서 이제부터 이 여자가 자기 아내라고 선언하는 수준이었을 게 뻔하다. 이런 짓을 해놓고 아무 일 없기를 바라면 안되는 거다. 예수게이야, 잃을 게 별로 없는 사내였으니 일단 저질러놓고 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훗날, 결국 ‘잃을 게 있는’ 그의 아들 테무진이 아버지 대신 보복을 당하게 된다.
한편 우리의 불쌍한 헐룬은 자기 운명을 한탄할 틈도 없었다. 몽골족 남자의 아내로 먹고 살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말이다. 쥐, 늑대가 남긴 짐승의 시체, 이름모를 새의 알 등 그녀는 사람이 이런 것도 먹을 수 있나 싶은 음식(?)들의 맛을 봐야 했다. 옷도 누더기였을 거고… 소치겔을 밀어내고 ‘본부인’자리를 차지한 게 그나마 다행일 수는 있겠다.
예수게이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꾸준히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을 모으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어느 정도의 군사력은 가지게 됐다. 아마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정도의 규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혈족집단은 자식을 낳고 친척들과 합치면서 덩치를 불리게 마련이다. 예수게이는 어떻게 순식간에 세력을 불렸을까? 초원에는 게르 하나에 의지해 떠돌아다니는 작은 가족과 ‘낭인’들이 많았다. 습격과 약탈은 초원의 일상이었다. 이런 폭력 때문에 부족을 잃고 헤매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예수게이는 필시 갈 데 없는 사람들, 특히 사냥과 약탈에 할께할 수 있는 남자들을 긁어모았을 것이다.
그럼 이 사람들을 어떻게 부양할까? 가난한 몽골족에게 약탈은 사냥처럼 생계의 일부분이었고, 사실 또다른 사냥이기도 했다. 예수게이는 약탈과 분배를 통해 부하들을 먹여살렸고, 부하들이 늘 수록 더 큰 규모의 약탈에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게이의 집단은 하나의 목표를 위해 결합된 운명공동체이자 이익집단이었다. 사람 없고 물자도 없는 몽골족 남자가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비혈통집단.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이 방식이 장차 초원의 정복자가 되는 자신과 헐룬의 아들에게 그대로 계승되기 때문이다.
아, 그러니까 헐룬이 임신했다는 얘기다. 불쌍한 헐룬…
(다음 편에 계속)
첫댓글 일부 사진이 깨졌는데 시간 나면 사진 첨부하겠습니다.
이렇게까지 친절한 제 자신에게 스스로 놀랐습니다. 수정 완료^^
잘 보았습니다
재미있을것 같아 책 주문 완료
김용의 사조영웅전 재탕 중인데
배경이 비슷하네요.
잘보았습니다~~~
옛날 무협지좋아하던
어떤여인
할머니가되어
두근두근
기대하며봅니다~♡♡♡
연재의 매력에 빠져 보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
이번 글에는 엄지척이 하나도 없군요. 실망입니다~
엄지척! 예전에 올렸을때도 잘 읽었습니다. 정말 잘 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