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새벽의 여유로움은 조금 간단한 고민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수색 좋은 중국 녹차를 마실까, 구수하고 깊은 보성 녹차를 마실까, 아니면 고소함과 깊은 맛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콜럼비아 커피를 갈아 내릴까... 뭐 이런 별것 아닌 고민은 사실 일요일이기에 가능합니다.
항상 새벽 네시 반이면 일어나 컴퓨터로 세상을 들여다보고 넋 놓고 앉았다가 그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치이고 밀려 얼른얼른 새벽, 다시 고속도로를 향해 차를 몰고 달려가야 하는, 새벽을 늘 ?혀야만 하고, 그것이 굳이 고달프다 느낀 적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일요일 새벽의 여유는 참 사람을 느긋하게 만듭니다. 관성이란 게 뭔지, 늦잠을 자도 될 일요일마저도 사람을 이렇게 일찍 깨워 놓습니다. 사실 토요일 같으면 조금 늦게 자도 될 법 하련만, 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잠깐 컴퓨터를 들여다보다가 아홉시 조금 넘자마자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어제 내려받은 나꼼수 28회 귀에 꽂고 조금 들으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걸 다시 들어야 합니다. 하하.
가만히 이 여유를 누리며 생각하다보니 참 한 해가 일찍 갔다는 느낌만 듭니다.
매년 추수감사절 때면 칠면조를 세일할 때 사다가 부모님 사시는 동네 가까운 곳에 있는 '한스'라고 하는 독일 델리에 가져다 맡깁니다. 보통 미국인들은 칠면조에 '스텁'이라고 불리우는 말린 빵조가리를 속에 채워놓고 버터를 발라 굽지만, 그렇게 하면 뻑뻑한 칠면조, 별로 맛 없습니다. 그러나 이 독일 가게에 맡겨 놓으면 훈제를 해 구워주는데, 이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수작업이어서 - 칠면조를 소금으로 벅벅 문질러 닦고, '브라인'이라 불리우는 소금물에 꽤 오래 담가놓고, 그리고 나서야 훈연해서 기름을 빼고... 하는 - 추수감사절 바로 전 주 월요일까지는 내가 산 칠면조를 가져다 줘야만 작업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이 '한스' 가게는 독일 사람이 운영하는 독일 가게이고, 직원들도 거의 독일인 1세들이라, 영어보다 독일어가 더 많이 들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올해는 어떻게 1년이 빨리 흘렀는지, 넋 놓고 가만히 있다가 보니 11월이 됐고, 아무생각 없이 한 주를 그냥 보내다가 아내와 우연히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러다보니 한스 생각이 퍼뜩 난 겁니다. 허겁지겁 한스에 전화를 해 보니 다행히 시간이 조금 있었고, 그래서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에 칠면조 세일하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조금 피곤했고, 어떻게 시간 맞춰 한스에 가져다 맡겼습니다. 문제는 전혀 11월이 왔다는 것, 즉 추수감사절이 코앞이라는 것, 따라서 칠면조를 훈연하기 위해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까먹고 있었다는 거죠.
아무튼, 말은 이렇게 길게 했지만, 이 과정에서 '득템'을 좀 했습니다. 미국 추수감사절에 많이 쓰이는 와인으로는 달콤한 와인, 그리고 달콤하면서도 산도가 강한 와인, 그리고 과일향이 풍성한 와인이 많이 팔립니다. 추수감사절부터 이듬해 부활절까지를 미국 와인업계에서는 대목으로 치는데, 그 이유는 역시 '먹을거리가 풍성하기 때문'이죠. 옛날, 산업화가 이뤄지기 전이나 냉장고가 발명되기 전엔 있을 수 없었던 일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추수감사절 가장 많이 팔리는 와인은 화이트 진판델입니다. 일단 달콤하므로 코카콜라를 선호하는 미국인의 입맛에 딱인데다, 색깔도 예쁜 분홍빛이어서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공히 서브되는 햄과 색깔도 어울리고, 또 짭짤한 햄의 소금기를 적당히 가려주면서 서로 대비효과를 내 주기 때문에 좋습니다. 물론 엄청나게 대량생산되는 와인이고, 포장도 보통 병보다는 대용량 (보통은 5리터짜리)의 박스와인 스타일로 나오는 것이 더 많기 때문에 '가족와인'으로 선호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주가 더 많이 팔리는 게 현실이긴 하지만.
그 다음은 리즐링입니다. 특히 리즐링은 서북미에서 선호도가 높은데, 그것은 서북미 자체가 독일 다음으로 리즐링을 많이 생산하고 '에로이카'의 경우에서 보듯 우수한 질의 리즐링을 생산하며, 그 풍성함 때문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낮고, 그러면서도 리즐링이 '거의 아무 음식에나 잘 어울리는' 와인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아시안계의 거주 비율이 높은 이곳에서, 아시안 음식과 맞는 페어링인 리즐링의 번영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죠. 물론 곁다리로 보졸레 누보 한 병쯤은 놓겠지만, 아마 이번 추수감사절도 '리즐링 우선의 원칙'은 변하지 않을 것 같네요.
샤토 생 미셸이나 콜럼비아 와이너리의 리즐링은 물론이고, 어제 구한 리즐링 중 강추하는 것은 '워싱턴 힐스'의 레잇 하베스트 리즐링입니다. 독일계의 슈페트레제나 아우스레제가 주는 특이한 귀부 곰팡이의 향이 조금 적은 대신 진한 사과맛이 입맛에 착착 감깁니다. 무엇보다 가격이 싸며, 이곳에서는 3리터짜리 대용량 박스 와인으로도 구할 수 있다는 게 강점. 저렴한 가격 때문에 선입감을 가질 수 있으나 음식의 맛을 살려주고, 특히 샐러드이면서도 약간 달콤하고 스파이스가 있는 샐러드, 예를 들어 참기름이 약간 들어간 오리엔탈 치킨 샐러드 같은 경우엔 최강의 궁합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블루 넌. 아마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졌을 것 같은 이 와인은 사실 리즐링하고는 관계가 멉니다. 아마 뮐러 트루가우나 실바너 같은, 독일 포도 중 리즐링과는 다른 품종으로 만들어졌고 이른바 챕털레이션(양조를 위해 충분한 당도를 얻기 위한 가당 과정)을 통해져 만들어졌을겁니다. 리즐링만치는 깊지 않지만, 추수감사절 음식처럼 이것저것 나올 때 사이드를 받쳐주는 와인으로 딱이라는.
쉴링크 하우스의 스팻트레제. 아시겠지만 독일 리즐링의 당도는 포도의 숙성 과정에 크게 영향을 받고, 포도가 얼마나 귀부화되었는가(즉 곰팡이가 팍팍 슬었는가)에 따라 산도와 당도는 포도에 남고, 물기는 날아가버리며, 에곤 뮐러와 같은 환상적인 와인이 나올 수 있는 날씨 조건 같은 게 다 맞아줘야 하죠. 이런 문제 때문에 서북미에서는 좋은 아이스와인은 나오지만 이런 귀부 와인을 만들기가 힘듭니다. 어쨌든, 이번에 산 쉴링크 하우스의 나헤 지역 와인은 모젤 지역만큼 환상적이진 못하다 해도 귀족적인 독일 와인이 어떤 모습이다 하는 것은 보여줄 수 있죠. 아무튼, 이번 추수감사절은 이렇게 '리즐링의 경연대회'가 될 듯 합니다.
돌아오는 목요일 말고 그 다음주 목요일. 아마 돌아오는 목요일은 보졸레 누보들이 나오겠군요. 남들 사 놓으면 맛이나 볼까 합니다만. 그냥 이번 추수감사절은 편안하게 독일식으로 훈제한 칠면조에 리즐링 옆에 놓고 평범하게 맞을까 합니다. 때로는 이렇게 와인이 풍성한 곳에 사는 것이 와인 뿐 아니라 다른 경험들도 참 많이 늘려준다는 생각도 듭니다. 인생이란 것이, '경험치'를 쌓아나가는 소스들은 참 많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들을 그냥 흘려버리기 쉽다는 것이고, 저같은 경우도 어쩌면 우연히 접하게 된 이 '와인'에 대한 경험을 흘리지 않고 모으려 했던 것이 오늘날, 바로 지금의 저를 만들어줬다 싶기도 하네요.
시애틀에서...
|
출처: Seattle Story 원문보기 글쓴이: 권종상
첫댓글 아~ 북반구는 가을걷이할 때 군요.
남미는 여름으로 가고...
여긴 일 년 내내 마냥 덥기만 하고...
추수를 감사한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 틀림없을 겁니다. ^^
흐흐... 적도를 중심으로 그런 것들이, 참 사소한 것들이 크게 바뀐다는 게 재밌습니다.
벌써 보졸레누보가 나오는 때가 되었네요. 시간 참.. 와하시고 언제나 건강하세요 ^^*
넵,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