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가치 인정받은 한옥 형태의 공소성당
이진주 마리안나 전주 Re. 명예기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80호로 지정된 전주교구 시기동성당 신성공소를 찾았다. 정읍에서 남쪽 정읍시 전북과학대에서 직진하여 신월교를 지나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도로 끝까지 가면 꼬불꼬불한 들길과 산길 끝에 견고한 성벽처럼 둘러싼 크고 작은 돌로 쌓아 올린, 기와를 이은 토석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입구를 따라 들어가 보니 하얀 성모상이 맞이한다.
전통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신성공소는 1903년 초대 김승연 신부가 부임하여 초가 4칸과 1200평의 성당부지를 매입했다. 2대 프랑스의 맹 미알롱 신부가 부임하여 1909년부터 기와 굽는 공장을 설치하여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통한옥 양식의 여덟 칸의 성당, 네 칸의 사제관, 여섯 칸의 사랑채를 건축하였다. 현재는 당시 성당 건물은 1936년 매각되어 없어지고 사제관 건물을 성당으로 이용하고 있다.
본래 사제관 모습은 평면이나 외관이 많이 개조되어 정면 4칸, 측면 3칸의 한식 목조 구조 팔각지붕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며, 지금의 건물은 잡석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정면 가운데 2개의 평주는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출입문은 삼면에 내고 창호는 유리 미세기창이나, 일부 창은 안쪽에 유리 미닫이창을 달고 밖으로는 나무로 만든 루버창을 시설하여 빛을 조절하였다. 내부는 장마루가 깔려 있으며, 천장은 연등천장으로 서까래가 노출된 목조구조의 특성을 살려 1903년에 건축된 우리나라 초창기 한옥 형태 건물로 종교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사제관 왼쪽에 있는 회합실은 사랑채 역할과 동시에 외지 교우의 숙소 역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6.25 전쟁 때에는 이곳이 인민군 치안대로 사용되어 폭격
을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제관 아래쪽에는 움푹 파인 곳이 있는데, 임춘남 베드로 형제(현 공소회장)의 증언에 따르면 “음식물을 보관하는 냉장고 역할을 했던 곳”이라고 하였으며, “병인박해 때 전남 장성에서 이곳으로 오신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이곳에 살고 있다”고 했다. 이를 통해 당시 신자들의 생활양식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 듯했다.
또한 신성공소를 빙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담장은 전남 담양의 교우들이 자신들이 먹을 식량을 갖고 와서 직접 쌓은 것이다. 조선시대에 천주교를 탄압하자 신자들은 관군의 기습에 대항하여 담장을 만든 것이라고 한다. 10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을 처음 모습 그대로 간직한 담장을 보며 선조들의 깊은 신앙의 뿌리를 느낄 수 있었다.
병인박해 이후 모여든 교우들로 본격적인 교우촌 형성
공소 곳곳에서 옛 신자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 만큼, 이곳 신성공소는 역사가 깊다. “신성마을의 순교성인 황석두 루카(1813~1866년), 다블뤼 주교와 위앵 신부, 오 메트로 신부, 장주기 요셉의 순교 사실을 고 황 막달레나, 고 서 알베르또가 증언하였다.”고 임 베드로 형제가 말했다.(천주교 전주교구사Ⅱ p856 참조)
신성마을에 천주교 교우가 살고 있었던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전부터이며, 병인박해 이후에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당시 병인박해를 피해서 충청도를 비롯한 타지의 많은 교우들이 박해가 비교적 적은 전라도 산간지역으로 이주하여 신성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착한 신자들은 산등성이에 화전을 일구어 담배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였다. 1894년 신성리공소가 설립되었고 1903년 신성리본당으로 승격되었다. 교우촌이 형성되고 본당이 설립되기까지 30여년 기간 동안 신자들이 겪었을 어려움이 느껴진다.
1905년 11월18일 신성리본당을 방문한 뭐텔 주교는 34명에게 견진성사를 주었다. 제3대 페셀 신부가 1924년 9월 부임하였다. 본당 소식과 교회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교구 최초로 월보를 발간하고 청년회를 창립하여 활성화하는 등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글을 읽고 쓸 수 있도록 모르는 사람들에게 야학회를 개설하고 강론 외 외교인 전교와 신자 재교육, 예비신자 교육에 환등기를 사용에 시청각교육 통해 본당 사목을 했다. 신자 수도 100여 명이 넘었다. 1928년에 들어 본당을 신성리에서 읍내로 이전했는데 그곳이 현재 정읍 시기동성당이다.
현재 공소에는 12가구 37명의 신자들이 있는데 대부분 어르신들로 한적한 모습을 보인다. 공소에는 미사가 없어 순례객 방문만 가능하다. 주일에는 시기동성당에서 차량운행을 한다. 숨겨진 보석과 같은 공소에 신자들에게 많이 알려져 자연 안에서 하느님을 찾아 평화를 얻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긴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신성공소를 보며, 옛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간접적으로 접해볼 수 있었다.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아 현세대의 우리들도 하느님께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사진설명(위로부터)>
– 신성공소 건물
– 신성공소 성모상
– 100년 넘은 담장
– 현재의 냉장고처럼 음식물을 보관했던 곳
– 교육관으로 사용된 사랑채
-(좌로부터)1970년 시기동성당, 1989년 판공성사 후, 1997년 공소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