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불의의 화마(火魔)가 휩쓸고 지나갔던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남대문)이 5년 3개월 만에 국민 품으로 돌아왔다.
언론에 공개된 숭례문은 새로 복원된 성벽(좌 16m, 우 53m)이
양쪽으로 날개처럼 펼쳐져 예전보다 더 위용을 갖춘 모습이었다.
총비용 245억원과 연인원 3만5000명이 투입된 숭례문 복구 작업은
'원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해 최고 장인(匠人)이 전통 기법으로
복구한다'는 원칙으로 진행됐다 (그래픽 참조)
신응수 대목장이 주도한 목공사에는 국내산 육송 15만1369재(才) 26t이,
이근복 번와장이 감독한 기와 공사에는 전통기와 2만3369장이 쓰였다.
신인영 대장장 주도 철물공사는 자재 31종 3만7563개가 들어갔다.
이번 작업이 '복원'이 아닌 '복구'로 표현된 것은
5년 전의 방화로 숭례문이 완전히 멸실(滅失)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석축과 1층 문루 대부분이 그대로 남았고,
기존 목재 6만47재가 복구에 재활용됐다.
문화재위원회는 5년 전 방화 사건 직후 숭례문의 국보(國寶) 지위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화재가 났지만 역사적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2의 사고를 막기 위해 관리동을 비롯해 화재 감지기, 스프링클러,
CCTV가 설치가 돼었다.
숭례문은 다음 달 5일부터 일반에게 무료 개방된다.
돌아온 국보 1호, 615년 전 모습 되살렸다
숭례문 현판이 본 복원 5년3개월
예산 276억, 연인원 3만5000명
현대 기술과 전통 기법의 결합
성벽도 복원 …
나는 ‘국보 1호’ 숭례문의 ‘현판(懸板)’이다.
5년 전 화마(火魔)에서 살아남았다.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깨어지며,
610년을 함께 버텨왔던 내 몸이 불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조선땅을 덮쳤던 숱한 재난과 전쟁에도 서울의 중심을 지켜왔던 우리다.
숭례문이 무참히 타 들어가던 5년3개월 전의 악몽,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드디어 복구작업이 끝났다.
나는 다시 만날 서울의 풍경을 상상하고 있다.
나는 국민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를 씻어줄 현판이다.
◆이렇게 달라졌다
되살아난 숭례문은 많은 이에게 조금 낯설 수 있다.
화재 전에 봤던 모습과는 제법 다르기 때문이다.
숭례문은 태조 7년(1398년) 탄생했지만,
세종 30년(1448년), 성종 10년(1479년)에 큰 수술을 거쳤다.
6·25전쟁 당시 총탄에 훼손돼 60년대 초반 다시 해체수리 과정을 경험해야 했다.
이번 복구는 조선 초 창건 당시의 원형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276억7000만원의 예산이 들었고, 연인원 3만5000여 명이 참여했다.
역대 최대 규모의 문화재 복원이다.
쓰인 나무만 25t 트럭 28대분, 돌은 15t 트럭 236대 분량이다.
사료 등을 참고해 중건(重建) 과정에서 잘못 변형된 부분을 바로잡았다.
60년대 공사에서 짧아진 용마루의 길이는 늘어났고,
1층 추녀마루의 머리 장식 잡상(雜像·어처구니)도
조선 후기 사진 자료에 따라 8개에서 7개로 줄어들었다.
민망할 만큼 알록달록했던 옷(단청) 대신 원래 입고 있던
차분한 색감의 옷으로 다시 갈아입게 됐다.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에 서럽게 잘려 나갔던 나의 양팔,
즉 석벽이 돌아와 반갑다. 한양을 둘러싸고 위용을 자랑하던 성곽이
무참히 부서지던 순간의 굴욕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동쪽으로는 53m, 서쪽으로는 16m밖에 되살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 옛날 활기가 넘치던 도성 풍경을 상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5년만에 돌아온 숭례문
화려한 채색의 숭례문 내부
봄과 함께 돌아오는 숭례문
원형 일부 되찾은 숭례문 성벽
공개된 숭례문 내부
다시 돌아온 숭례문
첫댓글 아름답게 복원된 숭례문 정말 아름답다. 그동안 복원 공사에 관계한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대한민국이 세계 문화강국이 댈 날이 앞 당겨진거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모두 축하 축하 축하 ~~~
5년3개월만에 국민의 품으로, 다시 한번 아름답게 복원된 숭례문 역시 국보 1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