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2천만 민중에 / 서상돈만 사람인가? /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 한국 백성 아닐런가?”
-단천군 국채보상소 발기인 이병덕 등이 지은 <국채보상가>중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청년, 보부상을 거쳐 경제인으로 성장하다
서상돈(徐相敦, 1850.10.17~1913.6.30) 선생은 경북 김산군 마잠(현 김천시 지좌동)에서 서철순(徐哲淳)과 김해 김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조부인 서광수(徐光修, 1714~1786)가 천주교에 입교한 이래 모든 친척들도 입교하는 등 독실한 교인 집안이었다. 그런 만큼 천주교 박해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이들은 피해를 모면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이사해야만 했다. 선생이 9세 되던 1859년, 부친이 상주 청리에서 사망하자, 선생은 모친과 동생 상정과 함께 외가인 대구 새방골 죽전으로 이사하였다. 이는 외조부인 김후상(金厚詳)의 보살핌과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 위함이었다. 선생은 어린 나이에 어느 상점 심부름꾼으로 고용되어 돈을 벌었고, 이는 살림살이에 일정 정도 보탬이 되었다.
18세경에는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보부상을 시작하였다. 이는 대구천주교회 원로회장 서용서의 후원과, 보부상의 거두인 최철학의 지원, 그리고 외사촌형 김종학 등 천주교인들의 후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취급 품목은 소금·건어물·일용잡화 등으로 재래시장을 전전하는 신세였다.
그러나 선생은 근면과 성실을 밑천삼아 사업을 점차 확장하여 나갔다. 활동영역도 점점 넓어져 낙동강을 무대로 부산에서 안동까지 무려 800리 뱃길을 이곳저곳 누비고 다녔다. 고령 개포(開浦)는 사실상 그의 본거지나 다름없었다. 취급품과 물량도 쌀·소금·베·기름·창호지·건어물·성냥 등으로 크게 늘어났다. 원격무역은 엄청난 이익 확대로 이어졌다. 1885년 35세에는 수많은 보부상을 거느린 대상인으로서 당당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선생은 안동·군의·김천·칠곡·달성 등지에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로 성장하였다. 어느덧 서상돈 선생은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유력한 경제인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근대식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다
선생은 1894년 45세부터 약 10년간 탁지부 시찰관에 임명되어 경상도 세정을 총괄하였다. 선생의 공직생활은 나라를 걱정하며 재물을 조금도 탐하지 않는 청렴한 생활로 일관되었다. 당시 부패로 얼룩진 공직사회에서 볼 때, 선생은 초야에서 안빈낙도하는 고고한 ‘선비’나 다름없었다. 이에 관아에서 파직된 아전들은 선생을 무고하게 투서하거나 고발하는 등 곤경에 빠뜨렸다. 이때마다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로베르 신부는 이러한 고발과 투서가 거짓임을 증명하는 등 선생을 옹호하였다.
선생은 교회활동을 통하여 근대교육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깨달았다. 1899년을 전후하여 대구읍내 새방골·대어빌·영천 등지에 학당을 설립할 때, 선생은 정규옥(鄭圭鈺) 등 교회 내 신자들과 재정적인 지원 및 학교 운영을 도왔다. 계산동 성당 부속인 한문서당 해성재(海星齋)도 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날로 발전을 거듭하던 해성재는 1908년 4월 1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립학교(聖立學校)로 탈바꿈하여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2년 뒤 부속으로 야간부인 성립여학교를 설치하는 등 여성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은 또한 1905년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 설립에 이일우(李一雨) 등과 함께 적극 관여하였다. 달서여학교는 1909년 학부대신(學部大臣: 대한제국 때에 학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 관청)으로부터 정식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았으며, 합리적인 가정생활을 위한 부인야학회를 운영하는 등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여학교로 발전을 거듭하였다.
한편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독립협회가 주관한 자주독립 수호를 위한 민중대회) 참여는 선생으로 하여금 새로운 변화를 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은 재무부 과장·부장을 맡아 열강에 빼앗긴 이권 회수와 민권보호를 위한 맹렬한 투쟁에 앞장섰다. 이러한 경험은 내수자강(內修自彊)에 입각한 시대정신을 일깨우는 요인이었다. 1906년 1월, 김광제 선생·정규옥 등과 대구광문사와 대구민의소를 조직한 일은 근대교육 보급과 민지계발(民智啓發)을 위한 일환이었다. 2월 경북관찰사 신태휴(申泰休)는 관내를 순회하면서 대구광문사 교육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나섰다. 관찰사는 각 군에 학교설립과 서적구입 등에 관한 일체를 대구광문사에 문의하도록 지시하였다. 교사 양성은 사립 사범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선생은 김윤란·정규옥·서병오 등과 함께 500원의 기금을 출연하는 등 재정적인 기반 확충에 진력을 기울였다.
토착 상권 보호와 민족자본 육성책은 대구농공은행 설립으로 귀결되었다. 선생은 김병순·서병오·이장우·이중래(李重來)·이상악(李相岳) 등과 대구농공은행 주주로 참여하였다. 이들 대부분은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자립경제 수립에 노력을 기울였다. 1907년 1월 29일, 선생은 대동광문회 특별회에서 국채 1,300만 원을 갚아 국권을 회복하자는 취지를 발의하였다. 선생은 즉석에서 800원을 의연금으로 내놓았고, 200여 명의 다른 회원들도 만장일치로 선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선생의 국채보상 발의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승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대구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된 국채보상운동
1907년 3월 11,15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국채보상동맹취지서>(위) 및 <국채보상금모집취지서>(아래). 당시 언론에 보도된 전국 각지의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가운데 일부이다. <출처: 한국언론진흥재단>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곧바로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1907년 2월 22일, 서울에서 김성희(金成喜)·유문상(劉文相)·오영근(吳榮根) 등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다. 이는 전국 각 지방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국채보상운동을 총괄하는 기구로서, 그 취지와 회칙을 발표하는 등 합법적인 단체로서 형식을 갖추었다. 회칙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본회는 일본에 대한 국채 1,300만 원을 보상함을 목적으로 한다. 2. 보상 방법은 국민 의연금을 모집한다. 단 금액은 다소에 구애받지 않는다. 3. 본회에 의연금을 바치는 사람은 본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고 씨명과 금액을 신문에 게재한다. 4. 본회와 목적을 같이 하는 각 단회는 서로 연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는데 힘쓰기로 한다. 5. 의연금은 수합하여 위의 액수에 달하기까지 신용 있는 본국 은행에 임치한다. 단 수합 금액은 매월 신문을 통하여 알린다. 6. 본회는 목적을 달성한 후 해산한다.
국채보상기성회는 의연금 수전소로 야뢰보관 임시사무소, 김상만(金相萬)의 광학서포, 유한모(劉漢模)의 조동 건재약국, 대한매일신보사, 상동 청년학원, 고유상(高裕相)의 서포, 주한영(朱翰榮)의 서포 등 7개소를 지정하였다. 또한 서병염(徐丙淡)·윤흥섭(尹興燮)·박규순(朴圭淳) 등 59명도 [국채보상포고문]을 발표하고 국채보상중앙의무사를 설립함으로써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의연금 수전소는 황성신문사였다.
각 지방에서도 국채보상회 설립과 더불어 취지서를 발표하는 등 주민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유도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기간 중 확인이 가능한 국채보상소를 설립한 곳은 전남(제주도 포함) 18개소, 경기 15개소, 충남 20개소 등이었다. 다른 지방도 이와 비슷한 양상이었다고 생각된다.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고 전국민운동으로 진전된 국채보상운동은 의연금 관리 등 보다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통합기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907년 4월에는 이를 지도·총괄하기 위한 통합기구로서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와 국채보상연합회의소도 각각 조직되었다. 보상금에 관한 전반적인 실태를 조사하기 위한 국채보상조사회, 이를 검사하기 위한 국채보상검사소도 설립되는 등 통합과 장기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다. 결국 두 단체의 통합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의연금 수합과 국민 지도라는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대구 시민회관 내에 위치한 국채보상운동기념비. <출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대구·경북 독립운동사적지Ⅰ], 2010.>
국채보상운동에는 고관이나 양반·부유층은 물론 노동자·농민·부녀자로부터 상인·군인·학생·기생·승려 등에 이르기까지 참여하지 않은 계층이 없었다. 유아나 초등학교 학생들도 자신들 용돈을 의연(義捐: 사회적 공익이나 자선을 위해 돈이나 물품을 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여성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반찬값을 절약하거나 비녀·가락지·은장도 등을 의연품으로 기꺼이 내놓았다. 일본유학생들과 멀리 미주와 노령 교포들도 의연금을 보내왔다. 국내에 거주하는 일부 외국인들도 참여하는 등 열기를 고조시켰다. 어느 서양인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4원을 의연하였고, 평남 영유군 이화학교(李花學校)의 일본인 교사 정유호빈(正柳好彬)도 2원을 의연하는 등 외국인 동참도 증가를 거듭했다.
특히 2월 26일 고종황제의 칙어(勅語: 임금이 몸소 이름)와 함께 단연보상 참여는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는 국채보상운동을 국가적·국민적 의거로서 공인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초기 국채보상운동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던 정부대신들도 이 소식을 접한 이후 금연 결심과 함께 참여하였다. 특히 단천군 국채보상소 발기인 이병덕(李炳德)·김인화(金仁化) 등은 “국채보상가”를 지어 널리 보급하였다.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생략)… 대한 2천만 민중에 / 서상돈만 사람인가? 단천군 이곳 우리들도 / 한국 백성 아닐런가? …(중략)… 아홉 살 어린이 이용봉(李龍鳳)도 / 세뱃돈 얻어 보조하니 감발(感發: 감동하여 분발함)할 일 감발할 일이네 / 충애심으로 감발할 일이네 포동 사는 안형식(安衡植)이 지금 여섯살 어린애로서 아버지의 의금 내는 것 보고 / 구화 2원 꺼내 바쳤네 …(이하 생략)…
국채보상운동의 좌절과 민족실력 양성운동
이처럼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빠른 시간에 전개될 수 있었던 요인은 언론활동에 크게 힘입었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은 2월 대구광문사에서 국채보상을 결의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이래, 운동 확산에 진력하였다. 특히 <황성신문>은 1907년 2월 25일 “단연보국채(斷烟報國債)”라는 제목의 논설을 통하여 국채보상을 국민의 의무사항으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제국신문>도 3월 1일 “국채보상금 모집에 관한 사정” 이라는 논설에서 국채보상이 정부를 위함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운동임을 선언하였다. 5월 27일에는 “재외부인의연서”를 통하여 하와이 부인들의 의연활동을 소개하기도 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가장 적극적으로 국채보상운동 관련 사실 보도에 앞장섰다. 이는 국외 활동에 대한 소개로 이어졌다. 또한 각 신문사는 사내에 국채보상 모금처를 설치하고 전국민적인 참여를 촉구하는 한편, 각지에서 조직된 기성회 취지서와 의연금납부자 명단을 게재하는 등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 물론 초기 일부 언론은 성과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후 범국민운동으로 확산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상돈 선생은 국채 보상운동을 발의하였고, 이후에도 국채보상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널리 추앙되었다. 이에 일제는 이 운동을 금지시켰으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 방해하여 결국 국채보상운동은 더 이상 진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 활동에 전념하여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실력 양성에 힘썼다. 그러다가 1913년 6월 30일,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