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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양 평사리 부부송을 다중촬영으로 담았다. 반사된 모습이 마치 그림같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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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꽃샘추위 바람도 잠을 자고 봄밤의 하늘엔 그 누구의 눈빛인지 별들도 참 많다. 마침내 이른 새벽 저 별빛들이 지상에 다 내려오면 섬진강 매화 꽃봉오리들이 피어나고, 순식간에 벚꽃들이 환하게 터질 것이다.
며칠 전부터 치통이 심했다. 봄맞이 술 약속과 원고마감, 그리고 개학과 사진전시회 준비 등으로 조금 무리해서겠지 하며 견뎌봤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하동 고운이치과에 갔다. 의사가 “때마침 잘 왔다”고 했다. 결국 오른쪽 위 썩은 사랑니 하나를 뽑고 나니 봄밤의 별들이 더 총총 빛나는 것 같다. 치통도, 통증도 저렇게 빛나는 것일까. 별과 나의 이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마취가 풀리고 나면 그래도 많이 아프겠지 각오했지만 견딜 만했다. 사나흘 동안은 절대로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마저 어길 정도로 빠르게 회복됐다.
이른 아침 마당이 소란해졌다. 지난 1월 24일에 태어난 여섯 마리의 강아지들이 눈을 뜨고 첫 걸음을 시작한 것이다. 지난 12월부터 우리 집 앞마당엔 큰개불알풀꽃, 일명 봄까치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났다. 바로 그곳에서 하얀 강아지들이 난생 처음 꽃밭 나들이를 하고 있었다. 아직은 따스한 햇살이 눈부시니 살살 기어다니며 눈을 뜨다 말다 입을 쩌억 벌리고 꽃밭에서 하품을 하기도 했다. 봄까치와 강아지들 덕분에 올 한 해 받을 복을 미리 다 받은 것만 같다. 왠지 예감이 좋다. 얼씨구, 좋다, 지화자! 부르고 또 부른다. 이 모두 우리 집 개의 이름들이다.
여섯 마리 강아지는 얼씨구가 낳았다. 강아지들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아마도 아랫마을 이장집의 개일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강아지들 중에서 한 마리는 계속 키우기로 했다. 족보 없는 잡종개지만, 그래서 더 예쁜지도 모르겠다. 1대 지화자가 떠난 지 3년 만에 2대 지화자가 얼씨구 좋다와 더불어 마당 꽃밭에서 발랄하게 뛰어논다. 그리하여 참으로 오랜만에 지화자, 얼씨구, 좋다가 완성됐다. 세상은 여전히 만만치 않고 세월은 하수상해도 강아지들 덕분에 아침저녁으로 얼씨구, 지화자, 좋다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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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욱한 안개 속에서 노란꽃을 피운 복수초 ‘몽유운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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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꽃샘추위가 몰려왔다. 지리산 북쪽은 눈이 내리고, 남쪽 섬진강에는 매화우(梅花雨) 봄비가 내렸다. 지리산의 남과 북, 해발 1,000m를 경계로 눈과 비의 냄새와 빛깔도 다르다. 잽싸게 우비를 챙겨 입고 카메라를 챙긴 뒤 매화나무로 달려갔다. 몰아치는 빗줄기와 매화를 찍었다. 셔터 속도 50분의 1초 이하로 찍으니 꽃송이에 내리는 빗줄기가 사선을 그으며 찍혔다.
누군가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는 멋진 말을 했다. 절묘한 표현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니 사진은 ‘시간의 예술’이다. 사실 빛이 곧 시간이기 때문이다. 눈 깜빡하는 것보다 빠른 8,000분의 1초로 담을 수도 있고 장노출로 30초 혹은 그 이상의 시간으로도 빛을 잘라낼 수 있다. 40분의 1초 정도로 담으면 빗방울마저 점이 아니라 빛의 궤적으로 기다란 선이 된다. 이정록 시인은 ‘달은 윙크하는 데 한 달이 걸린다’고 했는데 정말 대단한 장노출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이보다 더해 첫사랑처럼 30년이 지나도 더 생생해질 수 있는 것이다.
입학식 행사 1박2일 동안 남녀노소 모두 어린 봄꽃의 얼굴
비가 그치자 온 동네에는 정월대보름의 달집태우기 준비로 떠들썩해졌다. 화개장터와 악양면 평사리, 그리고 구례의 마을마다 장작을 쌓고 대나무를 둘러 세웠다. 아쉽게도 나는 서울에 선약이 있는 바람에 보름달 환하게 떠오를 때 달집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올해는 보지 못했다. 사진으로 기록하지도 못했다.
모처럼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모터사이클만 타고 다니다 차를 타니 늘 다니던 길도 달라 보인다. 소설가이자 기자인 조용호 형의 “아주 작은 축하모임에 와달라”는 취중전화를 받고 덜컥 약속을 하는 바람에 나선 길이었다. 이미 10년 전에 펴낸 꽃기행 산문집 <꽃에게 길을 묻다>가 재출간돼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이다. 신문에 연재되던 그의 소설가다운 명문과 꽃사진들. 그 당시 나도 문자메시지로 “자운영 꽃구름이 안착했습니다” 하고 화답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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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가 내리는 날 광양 매화마을로 가서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매화를 담았다. 일명 ‘매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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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노루귀가 하얀 덧니를 내보이며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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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촌놈이 홍대 근처를 배회하며 어리버리 겨우 약속장소를 찾아가니 너무나 반가운 이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한겨레 문학전문기자 최재봉 선배, 판화가 남궁산 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세 명 정도의 작은 술자리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영원한 청년’ 박범신 선생과 정길연 등의 소설가와 출판사 식구들, 그리고 중앙일보 정재숙, 문화일보 최현미 기자 등이 합류해 있었다. 뒤늦게 정범구 박사도 합류해 유쾌한 대취의 밤을 보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떠난 서울은 너무나 낯설다. 술을 마실 때는 덜하지만 술이 깰 때면 어서 빨리 벗어나고픈 마음만 가득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른 새벽 곧바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지난 3월 7일엔 지리산행복학교 입학식이 악양면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1박2일 동안 열렸다. 입학식은 언제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어린 봄꽃의 얼굴이 된다. 소설가 조용호 형처럼 꽃기행을 하기에도 좋고, 스스로 봄날의 한 송이 꽃이 되기에도 너무나 좋은 날이 아닌가. 산야초효소반, 생활목공예반, 시문학반, 아웃도어캠핑반, 지리산길걷기반, 차만들기반, 커피만들기반, 섬진강그림여행반 등 한판 잔치가 벌어졌다. 전국에서 몰려온 130여 명의 ‘지행교 교주들’이 형제봉 아래 최참판댁 일원에서 1박2일 동안 너나없이 공부하고, 놀고, 더불어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췄다.
1박2일 동안 나는 강의는 두 시간만 하고 몰래 사진을 찍었다. 이미 열흘 전에 찍어 놓은 평사리 무딤이 들판의 부부소나무(연인송) 사진을 지우지 않고 그 바탕 위에 다양한 풍경과 인물들을 집어넣었다. 포토샵 합성이 아니라 일명 다중촬영 기법이다. 예전의 필름 카메라는 한 장을 찍고 다시 되감아 찍어야만 했다. 요즘의 디지털 카메라 중 일부는 이 기법이 가능하다.
부부송을 바탕으로 입학식에 참가한 대표적인 털보들을 찍어 봤다. 지리산 의신동천의 최도사 형, 사천에서 온 가수 한목 문해송 아우(그의 본명 해송과 가장 잘 어울린다), 대전에서 공연과 강연 때문에 달려온 명상음악가 평산 신기용 형님, 청학동의 몽양당예절학교 김보곤 훈장님, 그리고 멋진 춤을 선보인 지홍 선생 등. 그들의 머리 위에 새가 날아오르는 백년 부부송을 얹어 주었다. 이 부부송을 가슴에 품고 모터사이클을 타고 전국을 돌아다닐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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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을 뚫고 피어나는 변산바람꽃, 일명 ‘설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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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중화’ 복수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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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꺾인 청노루귀에게 나뭇잎 베개 해줘
평사리 부부송을 가슴에 품고 청노루귀를 찾아 나섰다. 솜털 보송보송한 청노루귀 한 송이가 꽃샘추위 속에서도 하얀 덧니를 내보이며 씨익 웃고 있다. 사실 청(靑)이라기보다는 보랏빛 자(紫)에 가깝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겨우 3cm도 되지 않는 청노루귀가 평사리 부부송만큼이나 키가 커 보였다. 그만큼 대견하다는 말이다. 그때 한 아이가 생각났다. 스무 살 막 지나자마자 공단 자취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은 혜경이. 좋아한다고 말 한마디 못 한 채 보내고서는 30년도 더 지난 뒤에야 산중에 홀로 쪼그리고 앉아 오래 오래 청노루귀를 바라보았다. 혜경이의 하얀 덧니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외로운 청노루귀에게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부부송을 데려다 주었다. 좀 더 피어나길 기다리며 하산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꽃샘추위 속에 보송보송 솜털 옷을 껴입은 청노루귀가 자꾸 눈에 밟혔다. 하얀 덧니를 내보이며 배시시 웃던 그 애가 보고 싶어 밤새 안달이 났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는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전 11시쯤 다시 찾아가니 야생화 사진가 한 분이 벌써 하산 중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뛰어올라갔다. 아뿔싸, 막 피어나던 청노루귀 한 아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발에 밟혀 목이 꺾인 채 누워 있었다.
오후 2시쯤이면 활짝 피어날 텐데 그 사이에 이런 변고를 당하고 만 것이다.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야생화를 짓밟는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어쩌다 ‘적과의 동침’이 된 것이다. 나 또한 나도 모르게 숱하게 많은 꽃들을 밟았을 것이다. 이제는 귀한 꽃을 찾아다니는 일을 그만 둘 때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그대로 두면 오히려 잘 살 것을 천박한 사진 욕심에 밟고, 꺾고, 뽑아버리는 만행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마치 혜경이를 보는 듯 넋 놓고 앉았다가 목이 꺾인 청노루귀에게 나뭇잎 베개를 해주고 평사리 부부송과 섬진강을 보여 주었다. 나부터라도 다시는 이 골짜기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못다 핀 꽃송이’가 어디 이 골짜기에만 있겠는가. 대한민국 곳곳에서 날마다 벌어지는 일들이니 한숨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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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월 7일 평사리 최참판댁에서 지리산행복학교 입학식이 1박2일 동안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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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보고 또 보며 사진 정리를 하는데 부고(訃告)가 날아왔다. 내게 야생화의 참멋을 처음 가르쳐 준 김인호 시인, 그의 어머님께서 끝내 돌아가시고 말았다는 비통한 소식이다. 김인호 형은 파견 근무지인 베트남에서 급거 귀국 중인데 어머님께서 한 발 앞서 먼 길을 떠나고 말았다. 의식이 없던 어머님께서 만리타국 아들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는 눈동자를 조금 움직였다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졸지에 고아가 된 인호 형에게 도대체 무어라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막막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곧바로 광주의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많이 수척해진 인호 형을 보기에 너무 짠했다. 어머님께서 먼 길 가시는 날, 오래 전에 떠나신 서방님 만나시라고 다중촬영으로 평사리 부부송에 산수유, 매화, 섬진강 등불들을 새겨 넣었다. 18년 전에 먼저 가신 나의 어머님이 더 간절히 생각났다. 환절기를 맞으면서 우리 시대의 어머님들이 이렇게 한 분씩 떠나고 있는 것이다. 가부장적 억압과 불평등 속에서도 헌신과 희생, 고난의 일생으로 못난 아들딸들을 지켜낸, 자기 숟가락을 가장 나중에 드는 인류의 마지막 모성애일지도 모른다.
우리시대의 어머님들처럼 눈을 덮어쓰고도 변산바람꽃과 복수초는 피어났다. 2월 28일과 3월 1일의 경계에 눈이 내렸다. 이른 새벽 그 비밀의 정원을 찾아가 만난 눈 속의 변산아씨가 짠했다. 복수초도 얼어버린 눈을 덮어쓰고 있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기어코 꽃을 피우는 야생화들. 사실 돌이켜보면 너도 나도, 우리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환한 봄날도 좋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고 아무도 찾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바람과 비와 눈과 구름과 안개 속에서도 반드시 얼굴을 내민다. 풍설우운무(風雪雨雲霧) 속에 피는 꽃들에게 깊이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손을 내밀면 손끝이 보이지 않고 서서 오줌을 누면 오줌발이 안개 너머로 사라지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절대고독의 운무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나인 것이다. 너는 비로소 온전한 존재의 너인 것이다. 깊은 밤 홀로 깨어 울더라도 바로 그때 누군가 깊은 눈빛으로 봐준다면 누구나 한 송이 아름다운 몽유운무화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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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평사리 부부송과 가수 한목 문해송을 다중촬영했다. 2 명상음악가 평산 신기용을 평사리 부부송과 함께 다중촬영했다. 3 갓 태어난 강아지 ‘지화자’가 마당 봄까치 꽃밭에서 노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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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진전과 시인교실 열어
지난 3년간 되도록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마치 꿈결처럼 산속 운무화를 찾아다녔다. 세상도처에서 운무화를 통해 다시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3만 리 순례길로 무너져가던 내 건강도 되찾았다. 모두 야생화들 덕분이다. 이제 그 사진들 중에서 20장 정도를 공개할 때가 된 것 같다.
살다 보니 사진전시회를 하는 행운도 누리게 됐다. 이른바 첫 전시회를 꽃피는 봄날의 전남 여수 해안통 갤러리(3월 24일~4월 13일)에서 하기로 했다. 첫 개인전이지만 운이 좋게도 해안통 갤러리 초대전이다. 여수는 내가 처음 변산아씨를 만난 곳이다. 사진가 김홍희 형의 제자이자 울산에서 ‘산신령사진학당’을 운영하는 사진가 박태진 형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부산 경성대 앞의 갤러리카페<52>에서도 4월 6일부터 매월 둘째 넷째 주 월요일 오후 3시부터 ‘시인교실’을 열기로 했다. 최근 문을 연 부산의 새로운 문화공간 갤러리카페<52>는 유명한 사진가 김홍희 형이 지인들과 함께 만들었다. 사진과 시와 다른 예술 장르들이 모여 전시도 하고 공연도 하며 술도 마시는 아지트를 지향하는 곳이다.
나는 사실 시보다는 시적인 삶에 더 관심이 많다. 그래도 시를 쓰고, 감상하며 더불어 시적인 삶과 술판을 공유한다는 것은 멋진 일이 아닌가. 조만간 이곳에서도 나의 ‘몽유운무화’ 사진전을 하게 될 것 같다.
남해 망덕포구에서 섬진강을 따라 매화향을 맡으며 황어 떼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한 편의 시
족필(足筆)
이원규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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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시인님
자식 같은 작품 잘 지내나 궁금하시죠
저희 집 현관에서 밝은 모습으로 맞아 주고 있답니다.
아!
^^
요안나님 잘 읽었습니다~
이시인님...저도 시를 쓰고 싶은 이유가...
시적인 삶을 살고파서인데요...ㅎㅎ
저도 이제 읽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