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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못해 무덥기 그지 없는 8월, 무궁화는 피고지고, 광복절 노래가 울려 퍼지는 달..
그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바치신 영령들의 피와 땀과 눈물과 염원이 담겨 있음을 어찌 잊으리오.
개인의 운명이든, 가문의 운명이든, 국가의 운명이든, 한 판의 바둑판과 같다는 생각을 가지게 한다.
좋은 지도자가 나서 이끄는 시대는 찬란하고,
-한국의 발전사를 1인당 국민소득으로 나타낸 세계은행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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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촌 형님의 해방 -
우리 집 큰댁 사촌 형님의 해방은 남다른 것임을 최근에서야 실감하게 되었다.
읽을 수록 내 마음을 흔드는 것들.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가 있을까하는 마음이다.
1944년 1월 20일 일제는 전국의 전문대학 이상의 학생들에게 징집령을 내린다. 형식은 지원입대 형식이었지만 실질은 강제 입대였다.
당시 경성고상(현재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전신)에 재학 중이던 형님도 예외없이 입대하게 된다.
입대 부대는 일본 오사카(大阪) 중부군 4107부대 고사포부대이다. 그곳에서 경리/행정장교로 뽑혀 훈련 도중 필리핀에 있는 남방군총사령부로 가라는 전속명령을 받고 배에 탑승하게 된다. 때는 1944년 10월 5일, 일본 하까다항을 출발한 수송선단은 모두 13척, 한 척이 보통 7천톤 정도 크기에 3-4천명의 보충 병력과 군수물자를 가득 실은 이 선단은 상해 앞쪽으로 해서 타이완을 지나 사령부가 있는 필리핀 마닐라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10월 24일 미군기의 공습과 어뢰정의 공격으로 이 중 10척이 한나절 만에 침몰 당한다. 나머지 3척도 다음날 25일에 결국 피폭당하고 격침된다. 이 와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형님. 가까스로 구조되어 마닐라사령부로 가지만 사령부 역시 미군 공습(레이테만 작전)으로 이미 베트남 사이공으로 옮겨 가버린 상황, 기다리다 마지막 사이공 행 배로 가기 위해 승선 출항 대기 중 다시 미군기의 공습으로 조난 당한다 . 다행히 구조되어서 결국은 1945년 1월부터 필리핀 마닐라 인근의 밀림숲으로 숨어서 전투하는 악전고투가 이어진다. 극한 상황의 밀림 속 생존은 약 8개월간 이어진다. 아사직전의 상황들, 인육을 먹는 상황까지 진행되는 도중인 (1945년) 9월 초에 삐라를 통해서 일본의 항복과 투항 권고하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 후 약 11개월 간 미군의 포로가 된 이후 다시 한국인임이 판명되어 (1946년 7월) 일본 사세보 오무라 수용소로 보내져서 하까다를 거쳐 부산항에 도착한 것은 해방 이듬해 인 1946년 8월 5일 이었다.
1944년 1월 20일 이후 1946년 8월 5일 부산 도착까지의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그려져 있었다.
돌아가시기 3년 전인 1989년에 쓰신 글이다.
<1.20학병사기 제3권 광복과 흥국 >에 게재된 마지막 부분이다.
P.O.W. (전쟁포로:Prisoner Of War) 생활이 그려져 있다.
비운의 한국인 홍사익 중장의 마지막 포로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글은 2차 대전을 주제로 한 어떤 영화(예를 들면 <유황도의 모래>)보다도 결코 못지지 않은 내용이었다.
<주요 부분만 옮긴다>
-( 미.일 사상 최대의 레이테 해전이 있었던 1944년 10월 24일 - 25일 부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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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보충병력과 전쟁보급물자로 가득 채운 13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대선단이 남태평양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는 필리핀 마닐라를 향해 항해 한다.)
10월 24일 이른 아침 7시경 낮은 구름으로 뒤 덮혀 금방이라도 가랑비가 내릴 듯한 희미한 날씨인데, 누군가의,
‘어뢰발견(魚雷 發見)“하는
분명(分明)한 소리를 듣는 순간(瞬間), 우편(右便) 1,000여m 떨어진 수송선(輸送船) 한 척(隻)이 선복(船腹) 복판에 어뢰(魚雷)가 적중(的中)되어 선내 폭약(船內 爆藥)까지 폭발(爆發)하였는지 섬광(閃光)과 함께 배 중앙부(中央部)가 떨어져 나가, 여러 조각으로 분열(分裂)되어 비산(飛散)하는데,
”저것, 저것 봐!“ 하는 동안에 굉침(轟沈)(1분 내 침몰 : 1分 內 沈沒) 되고 말았다.
동시(同時)에 우리 배도 정상(正常) 리듬을 깨고 어뢰(魚雷)를 피(避)해 급선회(急旋回) 하는 바람에 동요(動搖)가 심(甚)하여 좌불안석(坐不安席)이었다. 감시원(監視員) 뿐 아니라 갑판(甲板) 위의 여러 군인(軍人)들이 외쳐대는,
”어뢰발견 0시 방향”(“魚雷 發見 0時 方向“)
소리가 다발적(多發的)으로 거듭되고, 주위(周圍) 바다를 보니 어뢰 항적(魚雷 航跡)이 하얗게 여기저기에 산견(散見)되었다.
우리 선단(船團)이 해저(海底)에 잠복 대기(潛伏 待期)한 미 잠수함군(美 潛水艦群)의 해상(海上)을 통과(通過)하는 모양이었다. 미군기(美軍機)는 보이지 않고 순전히 잠수함(潛水艦)의 어뢰 집중 공격(魚雷 集中 攻擊)이었다. 화재(火災)를 일으킨 채 느릿느릿 겨우 움직이는 배, 선미(船尾)를 바다에 쑤셔 박고 서서히 침몰(沈沒)하는 배, 해병(海兵), 선박병(船舶兵)들이 쏘아대는 포격(砲擊)으로 생기는 물기둥, 구잠정(驅潛艇)이 투하(投下)하는 폭뢰(爆雷)의 굉음(轟音). 우리 배도 우왕좌왕(右往左往) 어뢰(魚雷)를 피하고 있으나 언제 화(禍)를 당(當)할 지 몰랐다.
불안(不安)한 마음에 몸이 떨리고 제 정신(精神)이 아닌 듯하였다. 꼼짝없이 태평양 매립 요원(太平洋 埋立 要員)이 되고 말 것 같았다. 필사적(必死的)으로 남진(南進)을 계속(繼續)한 지 몇 시간(時間)이 지났는 지, 깊은 해협(海峽)치고는 파고(波高)도 유연(柔軟)하게 보이고 주위(周圍)도 조용해진 듯하였다.
멀리 가까이에 흩어져서 항진(航進)하는 수송선(輸送船)을 세어보니 다섯 척(隻) 뿐이었다. 그렇다면 수 시간(數 時間) 동안에 8척(隻)이 격침(擊沈)된 셈이었다. 매립요원(埋立要員) 2∼3만 명(萬 名)이 죽은 것이었다. 또 보급 물자 손실(補給 物資 損失)은 그 얼마나 될 것인가? 어떤 육전(陸戰)에서 이렇게 단시간 내(短時間 內)에 이런 막대(莫大)한 희생(犧牲)을 낼 수 있을까? 바다는 참으로 무서웠다.
10월 24일은 일본(日本)이 만방에 자랑하던 세계 최대의 거함(巨艦) *“무장”전함 (“武藏” 戰艦)이 미군기(美軍機)의 집중 공격(集中 攻擊)으로 무참히 격침(擊沈)당한 일해군 최악(日海軍 最惡)의 날이기도 하였다. 위풍당당(威風堂堂)하던 (*13척의) 대선단(大船團)이, 잔여 3척(殘餘 3隻)의 수송선(輸送船)만이 남아, 호위정(護衛艇)들과 어울어져 처량하게 남진(南進)을 계속(繼續)하니, 우선 나는 살아있구나 하는 자각(自覺)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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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전함 (“武藏” 戰艦):무사시(武藏:むさし)은 일본의 1번 전함으로 야마토(大和)에 이은 두 번째 전함이다. 64,000톤급 전투함으로, 전장 263m, 승조원 3300명, 주포 460mm 9문, 함재기 7대를 운용하고 있고 1940년 진수 1942년 취역했다. 1944년 10월 23일∼25일 「레이테 만」 전투에서 10월 24일 저녁 6차례에 걸친 미군기와 어뢰 공격에 의해 필리핀 시부야만 근해에서 격침당했다., 1985년에 잔해가 발견되었고, 2016년 여름에 일본 NHK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피격 당시 승조원 3,300여 명 중 구조된 사람은 1,350명이었고 이들은 다시 지상전투에 투입되었다. 그 후 생존자로 귀국길에 오른 사람은 430명 뿐이었다. 이마저도 귀환 도중 공습으로 일부는 희생되었고 끝까지 살아서 일본까지 도착한 사람은 겨우 120명, 기타 지상전에서 살아남은 56명과 합해도 불과 176명만이 목숨을 구한 셈이니 결국 3,100여명 이상이 희생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 통 에 이렇게 희생된 젊은이들이 그 얼마나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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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1944년) 10월 25일의 날이 밝자 아주 멀리서 흑점(黑點)이 보이었고 점차(漸次) 시간(時間)이 지남에 따라 도서(島嶼)임이 분명(分明)해졌다. 위험(危險)한 해협(海峽)을 빠져나와 비율빈 여송도(比律賓 呂宋島) 가까이 다다른 것이었다. 남항(南航)하니 한결 안심(安心)되었다. 링가엔 만(灣)이냐, 마닐라 만(灣)이냐, 하고 상륙지(上陸地)를 점(占)쳐 보았으나 아무도 알 도리(道理)가 없었다. 그러나 10여 시간(餘 時間)이면 마닐라 항(港)에 도착(到着)하게 된다는 방송(放送)으로 마닐라 항(港)으로 직행(直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사(無事)히 상륙(上陸)하기만을 염원(念願)하고 있었는데, 10시 경(時 頃)에
“어뢰 발견 14시 방향”(“魚雷 發見 14時 方向”)
하는 감시병(監視兵)의 다급한 소리에 이어,
“어뢰 발견 9시 방향”(“魚雷 發見 9時 方向”)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었다. 수분 후(數分 後)에 “꽝”하는 폭음(爆音)과 동시(同時)에 선체(船體)가 크게 동요(動搖)되더니 후갑판 선미(後甲板 船尾)에 가설한 망루 겸 고사포대(望樓 兼 高射砲臺)가 와르르 붕괴(崩壞)하고 부근(附近)의 군인(軍人)과 적재물(積載物)이 비산(飛散)하였다. 선미(船尾)에 어뢰(魚雷)가 명중(命中)했던 것이었다.
갑판 상(甲板 上)의 군인(軍人)들이 우왕좌왕(右往左往)하고, 이미 해중(海中)에 나가 떨어진 사람도 많았다. 나는 조난 훈련(遭難 訓練)에서 습득(習得)한 잠재 지식(潛在知識)이 발로(發露)되어서인지 무의식중(無意識 中)에 여러 사람을 헤쳐 가며 선수(船首)쪽으로 달려갔다. 이미 선미(船尾)가 가라앉기 때문에 선수(船首)가 바다에서 높이 솟아오르고 경사傾斜)진 갑판(甲板) 위에 적재물(積載物)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30∼40m나 되는 높이에서 해면(海面)을 내려다 보니 검은 파도(波濤)가 넘실거리었다.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어 힘껏 바다로 뛰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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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선 후(破船 後) 5시간(時間) 정도 표류(漂流)하다 구조(救助) 받은 지 1주야(晝夜)를 자고 소생하여 갑판(甲板)에 나와 보니, 남방(南方)의 밝은 태양(太陽)이 내리 쪼이는 마닐라 항내(港內)에 이미 들어와 있었다.
바닷물에 쩔어 송장 냄새 풍기는 뻣뻣한 군복(軍服)을 주어 입었으나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수일 간(數日間)의 수속 절차(手續節次)를 마치고 11월 1일 마닐라 부두(埠頭)에 상륙(上陸)하였다.
파시휙마루 승선자(乘船者) 4,000 명(名) 중(中) 150 여명(餘 名) 생존(生存)에 비(比)하여, 우리 경리 후보생(經理 候補生)은 40여 명 중(餘名 中) 11명(名)이 생존(生存)하였으니, 우리의 생존(生存)은 천우신조(天佑神助)에다 조난대비 훈련교육(遭難對備 訓練敎育)의 직접적 효과(直接的 効果)였음을 절감(切感)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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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닐라 상륙 후 밀림속 생활 )-
일반부대(一般 部隊)에 대한 보급(補給)이 전무 상태(全無 狀態)가 되자 기근과 열병(熱病) 등(等)으로, 군 사기(軍士氣)도, 명령 계통(命令系統)도 없이 지리멸렬(支離滅裂)되어 방황하는 대원(隊員)들, 급기야는 아군 패잔병(我軍 敗殘兵)사냥, 약육강식(弱肉强食)의 人肉먹기, 소림륭 중장(小林隆 中將)을 위시(爲始)한 사령부 요원(司令部 要員)들의 집단(集團) 아사(餓死) 등 밀림(密林) 속의 참상은 필설(筆舌)로 표기(表記)할 수 없는 지상(地上)의 생지옥(生地獄) 그대로였다.
밀림 상공(密林 上空)에는 중단(中斷)없이 주야(晝夜)로 감시(監視)하는 미 관측기(美 觀測機)가 날고, 간간(間間)이 B24, 쌍동(雙胴) 록히트기(機)에 의한 밀림 무차별 맹폭 소이탄 투척(密林 無差別 盲爆 燒夷彈 投擲)이 자행(恣行)되는가 하면, 중장비로 밀림 능선(密林 稜線)에 대로(大路)를 개척(開拓)하며 침공(侵攻)해 오는 전차(戰車)의 영거리 사격(零距離 射擊) 등(等)으로, 불태우며 전진(前進)하는 미군(美軍)에 밀려 끝없는 후퇴(後退)를 강요 당(强要 當)하여, 생존 가능성(生存 可能性)은 전무상태(全無狀態)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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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항복과 투항 후 11개 월간의 미군 포로 생활이 계속된다)-
(*1945년) 9월 초 안빳드 강변(江邊) 무명고지 산정(無名高地 山頂)의 초원(草原)에서 종전(終戰)과 무장해제(武裝 解除)에 관(關)한 작명(作命:*작전명령의 준말) 삐라를 주워 읽고 일본 항복(日本 降伏)을 알게 되었다. 약 8개월의 밀림생활(密林生活),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연명(延命)해온 것은 내 힘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은 여러 가지 가호(加護)의 덕택(德澤)이며 행운(幸運)이었다.
- (귀국 ) -
P.O.W. 생활(生活) 11개월 만에 즉(卽)(*1946년) 7월 6일, 일본행 미 소함정 편(美 小艦艇 便)으로 마닐라 항(港)을 떠나 구주 사세보 항(九州 佐世保 港)에 도착(到着)하였다. 대촌 수용소(大村收容所) 경유(經由) 하까다(博多)에서 제반 귀국 수속(諸般 歸國 手續)을 마치고 부산항(釜山港)에 도착(到着)한 날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8월 5일이었다.
그리운 고향(故鄕) 땅을 다시 밟으니 감개무량하였다.
고난(苦難)과 오욕(汚辱)의 일제 학병 생활(日帝 學兵 生活)을 이렇게 종결(終結)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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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인의 운명이 아홉 번 죽었다 살아나는 구사일생이 아닌, 천번 죽을 뻔하다 살아남은 거의 불가능한 눈물 겨운 사실들이다.
이렇게 살아 돌아오신 형님에게는 이것이 끝이 아닌 조국의 상황 전개, 좌익과 우익의 다툼인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으로 이어지고 가까스로 정부 수립이 된 1948년 8월 15일 이후 얼마 안 되어서, 1950년의 6.25 한국동란까지 파란만장했던 삶이었다. .
그렇게도 혼란하고 가난했던 보릿고개 시절도 넘고 경제발전을 이루어 선진국 문턱에 이르렀을 때는 소형이지만 자가용을 몰기도 하시고, 일본 여행까지 하셨던 형님의 감회는 어떠 하셨을까? 우리나라의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한 글이었다.
"묻지마라 갑자생(甲子生 : 1924년 생 )이다" 라는 말이 다 있으리오, 하는 세대들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애환어린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기록으로라도 남겨 놓으셨으니 조금이나마 알지 누가 어떻게 알리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 것을 !
(2024.8월 2일 카페지기 자부리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