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五德時代 전후에 창건(創建)
이제 진사공(鯤․1515~1582)의 시대로 돌아가 보자. 1515년에 태어났으니 20세 안팎인 1535년쯤에 광주(廣州) 이씨와 혼인해 69세 때 타계했다. 그 안에 할머니 평산 신씨, 아버지 강릉참봉, 어머니 탐진 최씨가 돌아가시자 할머니(평산 신씨) 묘역 계하에 모셨다. 더나가 친아버지(진수)는 용산 봉황동에 모셨지만 생모(진수의 배위)는 영은동에 모셨다. 그래서 영은동에는 할머니, 양부모, 친어머니 등의 묘소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시묘는 대물림으로 했을 것이다. 아들은 부모를 위해 시묘를 했다면 여막(廬幕)은 줄곧 있었을 것이다. 또한 당곡진사공이 타계한 후로는 아들 오덕(五德) 가운데 모두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시묘살이를 했을 것이다. 오덕의 아들들인 廷望․廷瞻․廷獻․廷龍․廷灝․廷鳳․廷喆․廷赫․廷勳․廷烈․廷鳴 등 11명이다. 이들도 조부 또는 아버지 내외분이 돌아가셨을 때 묘막을 짓고 시묘를 했을 것인데 이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관산 입향 5세대인 23세 동자(東字) 항렬(行列)대에 장천재를 지었다면 이전 4세대는 아무 일도 안했는가. 4대의 재세(在世)기간으로 치면 최소 120년 이상의 역사가 없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시묘(侍墓)를 위한 공간은 참봉공 때부터 있었음이 분명하다. 재력 또한 참봉공과 진사공 때가 가장 풍족했으리라. 오덕이 분가하고, 다시 22세가 분가할 때는 후손은 많아 먹고 교육시키느라 제각을 지을 정도로 재력이 풍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장천재창건을 웅천공 이후가 아니고 오덕(五德)시대 전후이다. 만회재공(晩悔齋公․1583~1657)의 유서를 보자. '-(중략)- 내가 평일에 비록 군(郡)이나 현(縣)을 역임하였으나 일찍 가인의 생업에 뜻을 두지 않아 사소한 세업을 전급함이 적어 보잘 것이 없으니 너희들은 장차 기한(飢寒)을 면치 못할 것이나 어찌하겠느냐'고 탄식했다. 현과 군수와 국사(國使)로 청나라를 다녀온 벼슬아치가 자식들의 기한을 걱정했을 정도였다.
만회재공은 바로 웅천공과 함께 무과에 급제한 3세 연하의 종제이다. 웅천공은 현감을 지냈으나 그 기간이 극히 짧다. 예나 지금이나 국녹(國祿)을 먹고 사는 벼슬아치의 생활은 일반과는 사뭇 달랐다. 그럼에도 거의 40여 년간 관직생활을 했던 만회재공이 재산을 모으지 못했다면 친인척의 경제적 수준이 어느 정도였겠는가. 더구나 웅천공의 장남은 당시 연치 17세의 소년이었음을 감안하면 앞뒤가 잘 연결되지 않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상과 같이 전후 사정을 감안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장천재의 창건은 승려들이 기거했던 암자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창건역사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이름도 처음에는 장천재라 부르지 않고 장천당이라 했다. 처음에는 초가(草家)였으나 나중에 기와를 얹었다. 그런 연후에 묘각(墓閣)과 서당(書堂)을 겸했다는 요지로 요약되고 있다. 이 같은 전후사정에 따라 장천재의 창건연혁은 훨씬 이전임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장천재는 여러 번 중수한다. 기록상으로는 최초의 중수가 1705년(乙酉)이라 한다. 초가를 46년 만에 보수했다는 말도 그리 신빙성이 없다. 2차 보수는 1724년(甲辰), 3차 보수는 1747년(丁卯), 4차는 1873년(癸酉)에 지금의 형태로 중건했다. 그 후 105년 만인 1978년(戊午) 9월 21일자로 전라남도지방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됐다. 이로 인해 1991년(辛未) 전남도비를 들여 재직실을 신축하는 등 보수공사를 해서 오늘에 이른다.
장천재는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다. 장흥 위씨 관산파는 장천재에서 제사를 지내고 자제들의 강학하는 장소였으며, 문중회의를 개최하는 장소로 이용한다. 존재공은 17세 이전부터 여기서 학업을 닦고 훈장으로 청소년을 가르쳤다. 장천재는 문중의 어른들이 내로라는 시인묵객들과 수창하며 접대하고 제야(除夜)를 지내는 장소였다. 그리고 족보편찬소(1916) 등 허다한 문중행사와 방촌의 마을 행사를 거행하는 중요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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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聽禽遺稿 : 권2 顔巷居第重修上梁文
11) 기묘대동보 : 편제록 p. 92
12) 기묘대동보(1999년) : p. 227 通德郞公 行狀
휼륭하신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역사공부를 하고 갑니다.
장천재의 연혁에 대해 세밀하게 기록하셔서 후세에 귀한 자료로 그 가치가 중요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