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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루나 칼럼 I
현장검증
글 이원익 leewonik@hotmail.com
한국 불교의 전파와 대중화에 힘을 보태려는 발원으로
태고사를 도와 왔으며 우담바라회 회원이다.
포항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서울 문리대를 졸업했다.
오래 전에 회사 주재원으로 와서 LA 지역에 살며 국제운송업을 하고 있다.
어디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아마 나는 그때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던 것 같고 누군가와, 아마 내 또래겠지, 거의 늘 붙어 다니던 동갑내기 ‘상서이’인가 아니면 같이 놀다 걸핏하면 집에 간다던 숙자 가시나도 함께? 아무튼, 분교의 백양나무 그늘에서 조약돌을 가지고 ‘짜개받기’를 하고 있었던가, 아니면 사금파리를 다듬은 소주병 뚜껑 만한 말을 가운뎃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모아 조심스레 퉁기며 ‘땅따먹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우리가 노는 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무슨 자동차가 한 대 지나가다 어중간하게 저만치서 멈추었다.
‘찌푸(JEEP) 차’다!
찌푸는 다 검은색이었으니 그 차도 검고 조그맣고 상자처럼 각이 지고 반짝였다. 우리는 엉거주춤 일어섰는지 좀 다가갔는지 그냥 주저앉은 채로 보았는지 모르겠다만 찌푸 차의 앞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가 차에서 내렸다. 찌푸나 찌푸에 탄 사람이나 본래 좀 무섭다. 이런 건 안 가르쳐 줘도 안다.
‘순사’다!
땅딸막한 순사는 좀 나이가 들었고 얼굴이 붉었으며 역시 검은 제목에 검고 챙이 반짝이는 둥근 제모를 썼다. 순사는 찌푸의 뒷문 쪽으로 갔고 운전수도 내린 것 같았는데 확실하게는 기억에 없다. 아무튼, 그때 마을 사람 몇이 어디선가 어느새 나타나 차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럴 즈음에, 그 자리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은 모르겠고 적어도 나는 찌푸 차에 좀 더 가까이 가 있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주섬주섬 내 가까운 언저리에 모여들고 있었고 그러다 금방 더 빨리 모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풀어진 콩 자루가 쓰러져 쏟아지듯 수많은 마을 사람들의 머리가 찌푸 차를 에워싸며 빽빽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첨이다.
찌푸의 열린 뒷문 안에는 사람이 몇 타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보아하니 꿈지럭거리며 내리기 시작하는데 낯선 아저씨들 같았다. 순사 같은 제복은 아니고 ‘잠바’ 차림 비슷했던 것 같다.
그런데 내리는 것을 보니 그 가운데 한 사람은 가르마를 탄 하이칼라가 아니라 약간 굽슬거리는 긴 머리가 이마와 얼굴을 거의 덮은 데다 고개를 반쯤 숙였다. 잠바가 아닌 무슨 얇고 헌 와이셔츠 나부랭이를 걸쳤던 것 같다. 아무튼, 그들은 차에서 내려 이 긴 머리 사람을 가운데 두고 한 쪽씩 팔짱을 낀 채 몇 발자국 앞, 땅에 똑바로 섰다. 그런데 그때 내 옆의 누군가 어른이 내 귀에 들리게 나지막이 탄성을 질렀다.
준태네!
아직도 고개를 들지 않고 두 사람의 가운데에 끼어 땅을 내려다본 채 두 손을 아랫배께에 모으고 서 있는 저 사람이 준태인가 보다. 준태, 준태…, 얼핏 귀에 설지는 않은 이름 같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니다. 하기야 그때 내가 ‘아부지, 엄마, 외할매, 아재, 이모…’ 하는 것 말고 이름으로 아는 사람이 이 세상에 스물은 되었을까? 아니면 열 사람 남짓? 그도 아니면 ‘호부’ 다섯? ‘호부’ 셋?
그런데 그때 순사는 사람들을 다스렸다. 다스린다고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만 ‘엄마와 나, 누부야와 엄마’ 하는 일대일이 아니라 어떤 한 사람이 나머지 여러 사람하고 달리 그들 앞에서, 그들을 모두 움직이게 하고, 무얼 못하게 손짓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무엇에 짓눌린 듯 힘을 못 쓰고,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대충 따르고 참는 것을 처음 보았다. 나도 물론 내 멋대로 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마치 처음으로 물이라는 데를 들어간 것처럼 물이 몸에 젖어 들고 내 몸이 마치 물처럼 흐르는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면서, 지금 사람들이 함께 받아들이는 그 어떤 물결대로 그 속에 잠기거나 거기에 거저 떠 있었다. 그리고 곧 그에 휩쓸려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모든 것에 익숙해진 듯싶다.
순사가 무언가를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외쳤다. 나는 그것이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잘 들리게 하려는 것임을 바로 알았다. 이제는 마을 사람들이 거의 다 몰려온 듯 아줌마, 늙은네들, 동네 어른, 머슴, 조무래기, 청년들, 말 만한 처자들까지 빽빽이 둘러서서 눈이 빠지라 이 낯선 사람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같은 조무래기는 만약 조금 늦게 왔더라면 비집어 눈 새치기할 틈도 없을 뻔했다.
그런데 그때 내가 알아차린 것은 그 준태라는 좀 야리야리하고 희멀끔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이 그저 서 있는 게 아니라, 알통이 있는 그의 양쪽 위 팔뚝과 가슴을 가로질러 무슨 굵은 끈으로 몸이 묶여 있다는 것이고, 모아져 있는 두 손의 손목에는 희게 반짝이는 쇠고랑이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도 처음 보는 광경이다. 물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몸이 풀려 있거나 다 같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사람들은 다 그대로인데 한 사람만 유난히 묶여 있는 모습으로서도 처음이다. 무언가 내 생각 속에서, 한 덩이가 저만치 따로 외톨이로 떨어져 나가 있는 느낌이었음은 뒷날의 조작된 상상이었을까? 아마도 세상은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고 갈라져 나감을 내 눈에 보인 몇 번째의 사례였겠지만, 내가 거기까지 일부러 챙기며 눈치챈 건 아니고 그냥 눈앞에서 필름이 그렇게 흘러갔다.
순사는 운전수인지 다른 누구한테서 무슨 장부 같은 것을 넘겨받아 들었다. 그는 침 바른 엄지 손가락으로 낱장을 넘겨 갔다. 글을 읽는 것인지 무엇을 짚어 가며 사람들을 휙 둘러보곤 했는데 이 절차가 제법 한참을 걸린 것 같다. 내 느낌에, 같은 일이 마냥 한참을 그러고 있다고 느꼈으니까.
이윽고 순사는 사람들로 둘러싸인 동그라미의 한 모퉁이를 찢어 길을 틔웠다. 그리고 이 낯선 사람들을 그 터진 틈으로 이끌고 나갔는데, 마을 사람들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랬는데 준태 청년은 눈에 띄게 걸음이 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떼기가 싫은 건지 힘들었는지, 아니면 발이나 다리가 아픈 건지 저벅저벅 걷지 않고 등이 떠밀려 조금 주춤거리며 걸었다. 다 큰 어른이 다른 사람에게 밀려 저러는 것도 처음 보았다.
여왕벌을 둘러싼 벌떼처럼 사람들이 무리 지어 날아가 이윽고 눌어붙은 곳은 아까 찌푸 차 자리에서 고개 돌리면 늘 눈에 빤히 보이는 똥돌이네 주막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왁자지껄 술꾼도 없는 데다 똥돌이 엄마마저 장사도 안 하는지, 손님맞이도 안 하고 부엌 설거지도 안 하고, 남들처럼 툇마루 아래 술집 마당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구경꾼이 됐던데, 물론 이런 똥돌이 엄마 보기도 처음이다. 나도 이번에는 요행인지, 그 사람들이 준태를 이끌고 앞서 올라선 툇마루에서 바로 마주 보이는 곳, 내 동무 판식인가 뭔가 하는 애 걔네 집 돌담 앞쪽, 둘러선 사람들의 맨앞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순사는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준태에게 ‘머라카는’ 것 같았다. 준태가 시키는 대로 얼른얼른 안 해서인가 보다. 그러자 순사가 잠바들을 불러 올려 그 중 한 사람에게는 준태의 팔을 붙잡게 하더니 거들어 허공에 무슨 삿대질 같은 것을 하게 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방바닥에 한 발을 펴고 앉아 벽에 기댄 채 준태를 올려다보는 시늉을 하게 했다. 그러다가 앉아 있는 사람이 잠깐 일어섰다 도로 앉으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준태는 옆방으로 끌려갔다가 도로 앞방으로 나와서는 앉은 사람을 한참 내려다보는 등, 그 방과 뒷방, 그리고 툇마루에서 왔다 갔다 하며 한참이나 시간을 끌었다. 나는 그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면서 툇마루를 올려보다가 사람들을 훔쳐보다가 하며 아무튼 그 자리에 끝까지 머물렀는데 나중에는 좀 심심해져서 내 동무들은 여기 없나? 하고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둘러보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이때 처음으로, 내가 비로소 무엇을 기다리고 억누르며, 지겨워도 자리를 못 뜨고 참을 줄을 알게 된 것 같다.
마침내 순사가 무엇을 장부에 적더니 잠바에게 넘겨주고는 준태를 다그쳐서 툇마루를 내려서게 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들은 모두 신을 신은 채 마루와 방에 올라섰던 것이다. 놀랐다. 무슨 마루에서 똥 누는 아기 궁둥이 핥으려는 워~리, 똥개도 아니고…, 이것도 처음이다. 그런데 마당에 내려선 준태 일행이 바로 내 머리 꼭대기 비스듬히 위쪽을 스쳐서는 어디론가 향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준태를 올려다보니 이제는 아까까지만큼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갈라진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낯은 찡그리지도 않았고, 착각인지 환각인지, 마치 느린 동작처럼 어쩌면 희미하게 웃는 것 같게도 내 눈에 비쳤다. 그리고 나도 알아차렸다. 준태 맞다! 낯이 아주 설지는 않은 우리 동네 사람이다!
사람들이 입을 거의 다문 채 우르르 몰려간 곳은 아까 분교의 운동장 한쪽 끝, 야트막한 돌담을 사이로 그 너머에 있는 동사무소 마당이었는데 우리는 거기를 그냥 ‘동사’라고 불렀다. 납작한 단층 기와집이었는데 가운데 칸이 대청마루이고 양쪽엔 툇마루가 달린 작은 구들방이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 동사는 우리 조무래기의 놀이터이기도 했는데, 방에는 영감들이나 머슴들이 목침을 베고 낮잠을 자거나 풍년초를 말아 피며 육자배기를 뽑던가 하고 있어 우리가 함부로 들락거리다가는 야단을 맞고 내몰리기도 했지만, 그것만 아니라면 나무랄 데가 없었다. 대청마루나 그 깊숙한 밑, 아니면 좁은 툇마루나 그 아래 공간, 그리고 뒤쪽으로 돌아가면 들쭉날쭉 숨을 데 많게 내밀고 있는 굴뚝대며 구석들, 그리고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 늙은 감나무 둥치며 큰 쇠동태가 달린 달구지를 놓아둔 곳 등, 숨을 곳 많고 찾아낼 곳 많아 숨바꼭질하기에는 천하절경, 아니 천하 최상승지였다 이 말이다. 단, 그때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맞은편 분교에, – 그것도 단층 기와집이었고 좀 더 컸다 - 내가 아마 그 분교의 1학년에 다니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면 아직 들어가기 직전이었는지 지금도 좀 아리송하지만, 그때 이 마을의 동사라는 곳이 내 눈에는 더 없이 그랬다 이 말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남보다 좀 재빨랐는지 아니면 무슨 이상한 취미에 심취할 싹수가 일찌감치 드러나 보였는지, 나는 이번에도 이 모든 광경을 가까이서 바라보기 딱 좋은 목에 바투 서서 내 눈을 자리 잡았다. 준태의 무리가 어서 채비를 차리고 다음 연출을 하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때 무슨 사달이 벌어졌다.
갑자기 사람들의 눈이 대청마루 쪽 무대가 아니라 거기서 90도 꺾어 오른쪽, 분교의 사택이 있는 골목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느닷없이 여자의 엄청나게 앙칼지고 큰 외침이 공간을 가르며 들려왔다.
‘이눔아~~~!!’
나도 순간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음은 물론이다.
거기엔 어떤 여자가, 내 기억엔 키가 컸고, 노인도 처녀도 아니고 아는 얼굴도 아니고, 내가 어른이 돼서 쓰게 된 말로 하자면 어느 날씬한 중년의 여인이 한사코 무대 쪽으로, 사람들 사이를 두 팔을 휘저어 헤쳐 나오려 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처음부터 따라온 건지 아니면 그때 거기에 서 있었던 마을 사람인지, 몇 사람이 몸부림치는 그 여인의 팔과 허리를 잡고 막아서며 갈길을 막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치며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려 고함을 지르고 엄청난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다른 건 순간에 다 지워지고 그 여인에게, 요즘 속된 말로 한순간에 꽂혔다고나 할까, 그 여인의 좁고 핼쑥한 얼굴에, 그 이글거리며 번득이는 눈길에, 흰 이빨이 가지런한 크게 벌어진 입의 깊은 아궁이에, 헐떡거리는 가슴과 양어깨에 송두리째 함몰되었다. 전율이었다!
그때 아무 다른 소리도 내 귀에 들리지 않은 것을 보면 순사도 잠깐은 그 여인을 그대로 보고만 있은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어느 순간 그 함몰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내가 선 자리의 둘레를 몸으로 느끼자 이제야 순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왠지 아까 준태를 으를 때만치 우렁차 보이진 않았다. 아니면 워낙 날카로운 그 여인의 바락바락하는 소리에 기가 밀려 그리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순사의 다스림이라는 것도 씨가 먹히지 않는 상대가 있음을 본 것도 따지자면 그때가 처음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건장한 남정네 두엇이 한사코 그 여인을 붙잡고 가로막으며 땅바닥 쪽으로 주저앉히고 있었다. 그때 내 머리에, 저 말리는 사람들은 여인네 아는 사람일까, 같은 편일까 아님 다른 편일까 하는 생각이 스친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순사의 다스림엔 요새 말로 노하우가 있었나 보다.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찾듯, 방식을 바꾼 순사는 이쪽 하던 일을 둔 채로 천천히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너무 높거나 크지 않은 소리로, 하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게 뚜벅뚜벅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대충 이랬던 것 같다.
‘이 보소! 사정은 아는데, 자꼬 이라머 공무 방해시더. 어이 박 경사! 저~짜아로, 까라앉히시게 모셔 가라카이!’
어쨌든 이 순간 이후로는 여인의 움직임과 모든 것, 이른바 모드가 달라졌다. 아니면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본래 그만큼 했으니까 그때쯤은 지쳐서, 마침 고비라도 넘어서 이때까지처럼은 길길이 내쳐 날뛸 수가 없었는지도 모르지만, 여인은 갑자기 팔다리가 축 늘어지더니 다시 힘을 모아 땅을 치고 가슴을 치며 숨넘어가듯 통곡을 했다.
‘이눔아~~~ 우리 남편 살려내라~~~ 우리 만도 아부지 살려내라 이눔아~~~~ 살려내라 이눔아~~~ 하이고오 만도 아부지이~~~’
그 순간,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준태 쪽으로 고개가 돌아가 있었다. 대청마루 앞에 선 그는 단박에, 아까보다 좀 더 깊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아까 그 여인만큼이나 핏기가 없었는데, 아마 나에게 있어 사람의 얼굴에 지금의 준태 같은 그런 얼굴도 있음이 그 순간 맘속에 새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준태 얼굴과 꼭 같은 얼굴을 나는 그 후 한평생 실물로는 본 적이 없었을 성싶다.
그 여인은 몇 사람의 남정네들에게 몸이 통째로 들린 채 ‘살려내라, 살려내라’ 라는 큰 흐느낌과 함께 달려왔던 그 골목길로 되돌아 멀어져 잦아졌지만, 한 얼굴에 다른 얼굴이 왠지 떨어져서도 화답하며, 핏기에 핏기가 어떻게든 반응하는 원리도 함께 각인되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을 말로 풀고 이론으로 확인하기에는, 만약 시도했더라도 여러 해가 더 걸렸을 테지만 말이다.
여인의 소동이 잦아들자 순사는 잃어버린 무엇을 곧바로 되채우려는 듯, 이제는 만사를 서두르는 듯함이 내 눈에도 보였다. 그는 준태를 윽박질러 마루로 끌어올리더니 한두 번 무슨 몸짓, 나중에 생각하니 그것은 사람을 죽게 만든 동작인 것 같았다. 그는 그 시연을 시키다 마음에 안 찼는지 아예 쇠고랑을 풀어주며 점잔도 빼지 않고 큰 소리로 을러대었고, 대역인 잠바에게도 큰 소리로 연거푸 지시했다. 준태는 이제야 고랑이 풀린 두 손을 뻗어 바닥에서 일어서려는 대역의 목덜미를 직선으로 밀쳤고, 대역은 일부러 마루 아래로 굴러떨어져 꼼짝 않고 먼지 바닥에 엎어져 있다. 그걸 보더니 순사는 장부에 무엇을 쓱싹, 그려 적고는 무어라고 큰소리로 선포를 하니 바닥에 엎드렸던 잠바는 일어나 옷자락부터 털었다. 금방 다시 쇠고랑이 채워진 준태는 분교 운동장에 세워져 있던 찌푸 차 쪽으로 다시 이끌려 갔다.
사람들은 반쯤은 벌써 흩어졌고, 주로 청년들이나 조무래기들인 나머지 반쯤은 찌푸 언저리까지 준태 무리를 따라붙었다. 나도 물론 눈이 보배라고, 찌푸 쪽으로 끝까지 따라붙었기에, 부르릉거리며 떠나가는 찌푸 차의 휘발유 냄새를 여태껏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나는 찌푸가 큰못 가를 돌아 머리꼭지를 감춘 그제사, 우리 아부지 하고 엄마를 똥돌이네나 동사 마당에서나 못 본 것 같아서, 아마 그날 저녁밥 먹을 때였겠지, 나 오늘 순사 봤다~ 하고 밥상머리에서 어린애다운 관심 초청의 미끼를 던졌다. 그래서 대화가 이어진 것 같은데 아부지는 외할매가 늘상 겁주던 순사가 아니라 자꾸 순경이라고 해서, 그 뒤로 나도 순경이란 말을 대신 배운 것 같다. 아무튼, 엄마도 이야기를 거들었는데, 오래도록 내가 이를 안 잊어 먹기에는 이야기의 줄거리가 너무 복잡하지는 않았던 까닭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똥돌이네 주막에 우연히 무슨 일로 들렀던 준태가, 만도 아부지가 몇 사람과 방에서 술 마시는 데를 지나갔는데 버릇없이 다리를 타넘고 갔다고 핀잔을 듣고 약간 시비가 있었다는데, 그날 저녁 동사에서 또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본래 사 에이치(4H) 단의 모범 청년으로 동네에서 인정받던 준태가 얼마 전부터, 저녁마다 마을의 처녀, 총각들을 모아 농촌 계몽을 주제로 한 연극 연습을 동사에서 해 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만도 아부지하고 마을 늙은이 몇이 동사 방에서 장기를 두며 곗날 뒤풀이를 하는데, 연극할 청년들이 들락거리며 방해가 되니까 오늘 그만하라고 했단다. 하지만 청년들은 청년들 대로 내일모레가 공연이라 연습을 미룰 수 없었고, 연습할 다른 장소도 없어서 말을 안 듣고는 거꾸로 계꾼들더러 장소를 옮겨 주십사 했다 한다. 이에 낮부터 준태 때문에 심사가 꼬인 만도 아부지가 술김이었는지 버럭 역정을 내며 다짜고짜 준태 멱살을 잡고는 버릇없는 쌍놈의 자식이라고 욕을 했단다. 사람들이 뜯어말렸는데도 다시 달려들어 싸우다가 어느 순간 준태가 밀치고, 그 바람에 만도 아부지가 마루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필 댓돌 모서리에 머리가 부딪쳐 그만 피를 흘리며 죽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이건 물론 그 당시에 이렇게 자세히 내가 구체적으로 죄다 기억한 것은 아니다. 알맹이가 되는 낱말과 이미지를 한 꾸러미로 기억의 창고 속에 꾸려 놓았던 것인데, 크면서 가끔 기억을 되살려 염주 꿰듯 이들을 꿰고 이어서 그림을 그려 보니 거의 틀림없이 이런 이야기가 됨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생각해 보니 - 물론 요즘은 아니고 어린애를 벗어난 어느 날에 - 그 모범 청년이라던 준태가 못 참고 파르르 어른을 맞대거리 한 것은, 아마도 쌍놈이라고, 쌍놈의 자식이라고 욕 들은 것에 무슨 곡절이 있지 않았나 싶은 적도 있다.
이렇듯 다들 이제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입은 집에 두고 눈만 가지고 스르르 일시에 몰려와 차올랐던 마을 사람들과 함께, 이제는 그 자취를 잊어버리고 놓쳐버린 준태 청년이고 그 여인이지만, 그의 현장검증은 오래전 내 고향 마을에서 한나절에 어찌 됐든 마감이 되었다. 하지만 너무 일찍 우연히 남의 현장검증을 본 탓인지 나 자신의 현장검증은 여태 마무리는커녕 시작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이때껏 살아오면서 무슨 일을 죄다 저질렀는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목록도 대충으로나마 만들지를 못하였다. 잊어버린 이름도 많고 놓쳐 버린 사연도 많다. 필연인지 우연인지도 긴가민가, 갚을 빚은 얼마인지 받을 길미는 얼마인지도 알 수 없다. 간추림도 떠나보냄도 없이 빛이 바래 갈 뿐이다. 다만 이 순간에도 떠오르는 것은, 몸부림치다 넋을 놓던 그 여인의 몸사위와 눈빛의 서슬, 그리고 굽슬거리며 갈라져 드리우던 그 젊은이의 머리칼과 내리깐 두 눈꺼풀 사이, 땅바닥으로 곧바로 흘러내리던 처연한 그 콧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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