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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2)
요한복음 19:28-36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우리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상태에서 육신의 친 어머니인 마리아를 그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맡기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하늘 아버지께서 부으시는 고난의 잔을 마시고 나면 그에게 맡기신 모든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이 됩니다.
우리 주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시는 순간까지 죄를 전혀 범하지 않은 완전한 의인이셨습니다. 또한 공생애 기간에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시기 위해 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마지막 유월절 만찬 때에는 십자가 고난 가운데 흘리실 보혈을 근거로 새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이사야 53장에 예언된 것처럼 ‘여호와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 흠없는 대속적 희생 제물로 십자가에서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이제 남은 마지막 한 가지 일은 죽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채 6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특히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는 무한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 27:45-46).
우리는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아버지로부터 진노의 잔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억만분지 일도 알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심판의 잔을 받으신 예수님은 이제 모든 메시야적 사명을 다 이루신 것을 아셨습니다.
이제 우리 예수님은 마지막 예언을 이루시려고 '내가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예언이 이루어지면 구약 성경에서 메시야를 알리는 예언들이 다 성취되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확인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목마르다”고 하셨을 때, 우리는 그분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과거에도, 지금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고난과 죽음 속에서 우리는 그분의 인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게 됩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서 한 인간으로 서 계셔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 결코 동물이나 어떤 무형의 영에게 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따라서 첫째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둘째 아담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십자가의 저주를 감당하셔야 했습니다.
이제 둘째 아담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내가 목 마르다" 하시며 시편 69편 21절을 이루십니다.
"그들이 ….(내가) 목마를 때에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시 69:21).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하시자 로마 군인들은 당장 우슬초에 해면을 매어 신 포도주가 담긴 그릇에 담급니다. 그리고 그 해면을 우리 주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그러자 우리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더니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여기서 신 포도주는 식초와 물을 섞어서 만든 음료였습니다. 그것은 식초로 변한 포도주에 물을 섞은 것인데 일반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음료였습니다. 그 음료는 시긴 했지만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에게 잠시 목마름을 해소하도록 하는데는 요긴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로마 군인들은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쓸개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시 69:21)
그 포도주는 마취 효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포도주를 맛보시고 거절하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처형의 고통을 온전히 겪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에게 속한 모든 백성들의 죄악을 고스란히 대속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쓸개(몰약을)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마 27:33-34; 막 5:22-23).
하지만 호흡을 거두기 직전에 "내가 목 마르다" 하신 후에는 로마 군인들이 준 신 포도주를 받아 마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 머리를 숙이며 돌아가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장면을 이렇게 진술합니다.
[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마 27:48, 50)
그러면 로마 군인들은 왜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준 것입니까?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도 로마 군인들이 신 포도주를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눅 23:36-38).
즉, 로마 군인이 신 포도주를 준 이유는 악한 의도로 준 것으로서 예수님의 목숨을 좀 더 유지시켜 십자가의 고통을 계속 겪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신 후 그들이 주는 마지막 신 포도주를 받으시고 자기 목숨을 아버지께 바치셨습니다. 그러므로 30절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고스란히 감당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이 마지막으로 하실 일은 죽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허파가 숨을 내쉬는 것을 멈춰야 했고, 심장은 더 이상 뛰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뇌의 신경세포도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을 멈춰야 했습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해 고통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죄에 대한 행위 언약의 결과인 죽음을 맛보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특별한 방식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그분은 심장마비로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죄가 되셨지만 실은 완전한 의인이기에 죽음에 삼킨 바 되어도 안 됩니다. 아버지께 버림 받는 십자가 고난까지 감당하신 그분은 모든 대속이 다 치러진 것을 아셨기에 더 이상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자신을 죽음에 던지셔야 했습니다. 이는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죽음에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으로 들어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죽음에서 일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에 우리 예수님은 이미 공사역 중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7-18).
더욱이 30절을 보면 "영혼이 떠나가시니라"고 개역개정이 번역해 놓았는데 원어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파레도켄 토 프뉴마). 이를 원어대로 번역하면 "그 영을 내어주셨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예수님의 마지막 죽음의 장면 외에 다른 곳에서 쓰인 곳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내어맡기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은 어쩔 수 없이 죽음의 권세에 삼킨 바 되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을 아버지께 내어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12절은 메시야의 죽음의 성격이 스스로 자기 영혼을 버리는 것으로 예언합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이러한 주의 죽음은 구약의 삼손처럼 삶의 마지막 순간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던진 죽음과 유사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삼손이 집을 버틴 두 기둥 가운데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삼손이 이르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들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삿 16:28-30).
이는 한 어머니가 갓난 아기를 불속에서 살려내기 위해 자신을 던지는 그러한 사랑의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즉, 우리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죽음을 향해 자신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머리를 숙이고 영혼이 떠나가셨습니다. 이를 누가는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버지께 그의 영혼을 의탁한 것으로 진술하였습니다.
[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더라
](눅 23:46-47)
이처럼 우리 주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시며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께 내어맡기셨습니다. 즉,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사명을 다 이루신 후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의 죄악을 위한 희생 제사였고, 그분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영원한 희생 제사로 드리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이 그의 영을 내어주신 마지막 순간은 하나님의 어린양의 희생 제사의 정점이자 마지막 행위였습니다. 이에 히브리서 사도는 어마어마한 진리를 선포합니다.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 9:14-15).
이렇게 하여 우리 주님은 신 포도주를 마신 후 죽음으로 들어가심으로 그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고 그 몸은 잠시 땅에 장사되기 위해 시신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다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사명을 일부만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짊어지신 후에 “그래도 너희가 이루어야 할 몫이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죄사함과 칭의와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직 은혜입니다! 완전한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의롭다 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와 영원한 기업의 상속자가 된 것은 오직 은혜일 뿐 그 은혜에 더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저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것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받는 길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우리 주님의 선포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주님은 대속자로서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고 마침내 죽음과 함께 참된 속죄 제물이 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속량을 예표했던 구약의 모든 의식 율법은 종결되었습니다. 또한 메시야에 대한 수많은 구약 예언이 성취됨으로서 나사렛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인되셨습니다. 이제 아버지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아들 메시야를 죽음에서 일으키시고 약속대로 하나님 나라와 성령을 그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영원한 왕권과 권세를 주시며 하나님과 주의 백성 사이의 영원한 중보자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사역을 '다 이루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와 사탄에게 종노릇할 필요가 없으며, 율법의 정죄인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 주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이루시고, 다 치르시고, 다 성취하셨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주의 인성은 변함없습니다. 단지 그 인성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영광에 이르렀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여전이 영광의 우리 주님은 사람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힘든 시기를 겪을 때, 주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고난과 역경이 닥칠 때, 구주께서는 우리에게 공감하십니다.
"이는 확실히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6-18).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갖고 계신 만유의 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신 우리 예수님은 자기 목숨까지 바쳐 사랑한 우리를 지금도 더욱 소중히 여기시고 아껴주십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 주 예수께 나아가기 바랍니다. 그분께 기도하고 직접 대화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은 여러분을 완전하게 이해해 주시고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은 참 좋은 나의 친구입니다!”라고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맹세로 중보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복을 베풀기로 정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무한히 사랑하시므로, 아들과 연합하여 있는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또한 무한히 사랑하시기 떄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우리 구주 영광의 예수님을 믿고 하늘의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확인한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외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3-35).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현재 어떠한 영광의 상태에 있는지 알려주며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지도 알려줍니다.
[
9 그(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으니
12 (이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 2:9-1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9:31-32).
이렇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매우 특이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사형당한 자들을 야생 동물 및 독수리에게 먹히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그대로 방치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관습에 따르면, 예수님의 시신은 십자가에 그대로 남겨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은 나무에 처형한 시신을 밤새 매달아 두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 다음 날은 유월절과 겹친 큰 안식일이었기에 그들은 총독에게 청원하여 오후 6시 전에 십자가에 달린 죄수들을 치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려 그들의 죽음을 보장하라는 제안을 덧붙였습니다. 이는 고통의 시간을 줄이는 대신에 큰 고통을 가함으로 확실한 죽음을 보장 받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요청을 허락하였고 그 명령이 로마 군인들에게 하달되어 집행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병사들은 예수님 곁의 두 죄수는 호흡이 있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렸지만 우리 주님은 이미 숨을 거두신 상태였기에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군인 중 한 명은 우리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시신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완전하게 섭리하심으로 구약의 유월절 의식 규례와 모형과 예언이 다 성취되도록 하신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유월절 어린 양은 결코 “그 뼈 중 하나도 꺾이지 않아야 한다”고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규례는 이러하니라 … 각 사람이 ….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꺾지 말지니 이스라엘 회중이 다 이것을 지킬지니라"(출 12:43-47).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민 9:11-12).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시 34:20).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구약 시대의 유월절 양은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예표하였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양에 관한 율례는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인 우리 주 메시야께 반드시 성취되어야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예수께 이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면, 구약의 유월절 규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구약 예언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고,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메시아 되심도 확인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완전한 섭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하십니다. 악의 세력들은 여전히 어리석음 가운데 자기들이 할 일을 하고 있지만 완전하게 지혜로우시고 선하신 우리 하나님은 그 와중에 구약의 예언과 모형이 그리스도 예수께 완벽하게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자, 31절을 보니 이 날은 '준비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 전 날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안식일은 평범한 안식일이 아니라 그 해 유월절이 끼어 있는 '큰 날'이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 이 큰 날을 "유월절의 준비일"이라고 언급했습니다(요 19:14). 구약 율법에 따르면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밤새도록 그곳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2-23).
이 규정은 안식일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단지 일반적인 원칙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유월절 큰 날에 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세 사람을 밤새도록, 그리고 다음 날까지 나무에 매달아 두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큰 죄에 해당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몸이 더럽혀지면 유월절 잔치를 먹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며 이방인인 빌라도의 관저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세심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이 유월절 큰 날에 율법 규정을 어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당장 수많은 바리새인들과 함께 또 다시 금요일 오후 4시 경에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몇 시간 전에도 빌라도를 찾아가서 그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머리 푯말에 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을 "자칭 유대인의 왕"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또 빌라도를 찾아가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 요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한 요구로서 당장 그를 죽여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이는 다리를 부러뜨리면 십자가의 받침대를 딛고 있던 다리가 부러지면서 몸 무게로 인해 허파와 심장이 곧바로 멈추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 두 시간 내로 금요일 저녁 6시부터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을 비롯한 죄수들의 다리를 부러뜨려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실,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확실하게 죽이기 위한 확인사살이었습니다.
오, 인간의 부패는 어디까지 달려갈 수 있는지 무섭기만 합니다. 시기심 때문에 마귀에게 사로잡힌 마음은 그 악날함이 끝이 없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에 대해 아무런 아픔도 없고 회개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시신을 십자가에 두면 안식일을 더럽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견디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무서운 무지이며 마비된 양심이며 얼마나 끔찍한 위선입니까! 이는 실로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 것과 다름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비된 양심에서 나온 그들의 악행이 오히려 유월절 어린양이신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이루고 있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섭리와 지혜 앞에 무릎을 조아릴 수 밖에 없습니다.
자,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리자는 유대인들의 제안은 예수님의 메시아 자격을 얼마나 위태롭게 한 것입니까? 하지만 이미 예수님은 신 포도주를 마신 후 "다 이루었다" 하시며 그 영혼을 아버지께 바치시고 죽으신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이 골고다에 가 보니 십자가에 못 박힌 두 죄수는 호흡이 살아있기에 그들의 다리는 부러뜨렸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은 상태였기에 그의 다리는 부러뜨리지 않았습니다. 이때 신기한 것은 다리를 부러뜨리는 이유는 십자가에 살아있는 죄수를 신속히 죽이기 위함이었지만 빌라도의 지시는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한 후 살아있는 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곧 안식일이 시작되니 십자가에 달린 자들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죽게 한 후 그 시체를 치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의 다리를 꺽지 않은 병사는 총독의 명에 불복종한 것입니다. 누가 그에게 죽은 예수님의 다리를 꺾지 않는 그런 재량권을 허락했습니까? 그가 평소처럼 총독의 명에 순종했다면 예수님의 시신의 다리도 꺾었을 것입니다. 그러했다면 유월절 양의 실체인 메시아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그 군인을 주장하고 다스리심으로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한 것입니다. 이에 성령께서는 36절에서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다리가 꺾이지 않은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이 예표한 바를 성취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요한복음 앞부분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고 외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어린 양은 유월절에 죽으셨고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때에 뼈가 꺾이지 않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멸망의 천사가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유월한 것처럼, 최후의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신기한 사건 하나는 로마 군인 중 하나가 자기 생각에 따라 창으로 예수님의 시신의 옆구리를 찌른 것입니다. 그러자 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매우 사소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에게는 많은 영적 교훈을 남깁니다.
첫째,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쏟아져 나온 것은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참으로 전혀 생명이 남아 있지 않은 죽은 시체였습니다. 그 증거가 물과 피가 쏟아져 나온 현상입니다. 그분의 심장은 실제로 멈춘 상태에 있었고 허파는 더 이상 뛰지 않았으며 그분의 뇌 활동도 완전히 멈춘 상태였습니다. 즉, 우리 주님은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 신자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죽음이 없이는 진정한 희생 제물이 있을 수 없으며, 진정한 죽음이 없이는 진정한 부활도 있을 수 없고, 진정한 죽음과 진정한 부활 없이는 기독교 전체가 아무런 반석이 없는 죽은 종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모한 어떤 로마 병사가 주님의 옆구리에 창을 찔러 넣음으로 그는 우리 주님의 '히스토리아 살루티스', 즉 '구원사'가 이루어진 것을 증거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에 달리신 구세주는 참 사람이었음을 우리에게 확증시켜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기꺼이 아버지께 내어준 사실을 여러 차례 확인하였습니다. 즉, 그분은 죽을 수 있었고,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의인으로서 참 사람이었기에 우리를 위해 흠없는 목숨을 내어줄 수 있었고 그리고 실제로 죽으셨습니다. 이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죄값을 주께서 친히 대신 치르셨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도다"(고전 15:3).
셋째는, 사도요한은 그의 요한일서에서 물과 피에 대해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참 사람이셨고 또한 완전한 의인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효력이 성령을 통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속량이 완성된 후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터져나온 피와 물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스가랴의 유명한 예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슥 13:1).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함께 이제 그분의 허리에서 피와 물이 터졌습니다. 피와 물은 성령의 진리 안에서 속죄와 정화의 상징입니다. 즉, 우리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죄를 씻어 줄 참된 샘으로서 주를 믿는 자에게 주어질 죄사함과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은 복음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량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죄 사함을 얻고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영원한 대제사장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과 피의 효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 나라의 평강이요, 계속 깨끗한 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며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며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으로 십자가 속량을 마치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진리입니다. 즉, 예수님 그분은 죽을 수 있고 실제로 죽으신 둘째 아담으로서 의인이시며, 유월절 어린 양의 성취이며 또한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하십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를 감당하실 수 있었기에, 독생하신 하나님이 친히 사람으로 오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참된 의인이자 참된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속량하신 우리의 구주,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이 모든 것을 글로 기록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35절은 그가 그 장면을 목격했다고 말합니다.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요 19:35).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터져나오는 피와 물을 본 사람은 사도 요한이었고 이를 증언하는 이유는 우리로 믿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로마 군인이 창으로 주의 옆구리를 찌른 사건을 스가랴서와 연결합니다.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요 19:37).
사도 요한이 인용한 '또 다른 성경'은 스가랴 12장 10절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외아들)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슥 12:10).
이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약 530년 전에 기록된 예언입니다. 선지자 스가랴는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 구절은 스룹바벨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회복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나 그 예언의 실체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속량 및 부활로 인한 주의 백성의 회복입니다. 이를 위해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께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참된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이 예언의 실현은 성령 강림과 함께 베드로가 외친 설교에서 곧바로 나타났습니다.
[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32-41)
오,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우리의 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우리의 악독함이 어떻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는지 보게 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우리의 악독함과 패역함과 반역의 죄악을 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과 피 흘리심이 나의 죄를 사해주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되면서 회개하고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찌른 자를 보리라는 것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바르게 알게 되어 회개하게 되면서 믿고 구원 얻을 것을 알려준 예언입니다.
오늘도 사도 요한의 기록은 우리를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왜 십자가에서 그러한 무자비한 대우를 당하셨는지 알게 하심으로 우리로 회개하게 하며 주를 사랑하고 감사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우리의 남은 삶은 진심으로 주를 따르는 삶을 살게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기 바랍니다. 중보자 예수님을 나의 맏형으로, 왕으로, 대제사장으로, 마지막 영원한 선지자로 인정하시고 그분을 영접하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내주하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자원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바랍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남은 삶을 사는 거듭난 신자들은 아직 구원 받지 못한 가족들과 주변의 영혼들을 위해 계속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들을 향해 복음의 향기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우리의 슬픔을 대신 감당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분이 우리에게 남기신 영광스런 고난에 동참하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믿음뿐만 아니라 우리의 헌신도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헌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찬양과 사랑의 고백도 한없이 받으셔야 마땅합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듣고 나의 영원한 친구이신 예수님을 더욱 감사하고 사랑하며 더욱 순종하는 삶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스데반 황 목사, 그리스도의 보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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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쁘지 않은 꽃이 없듯이 예쁘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예쁜 구석 하나쯤은 반드시 가지고 태어나기 마련 입니다.
남이 가진 아름다움을 탐내지 말고 내가 가진 아름다움을 빛내는 그런 사람이 됩시다.
오늘도 힘들때 서로가 손잡아 주는 아름다운 미덕의 마음으로 다같이 기쁨을 나누며
맑고 고운 햇살처럼 해맑은 미소 지으며 즐겁고 행복하게 기분 좋은 날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잠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