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시편 100:1~5
이 시편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평이하게 쓰여졌기 때문에 누구나 이해하기가 쉽고 분명해서 예배시에 많이 읽혀지고 있는 시편입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이 시편 표제에도 쓰여 있는 대로 감사의 시입니다. 열방이 부르심을 받고 복음이 만민 중에 선포될 때 이와 같은 부르심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편을 읽으면서, 웅장한 성전의 정문 앞 광장에 예배하러 모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성전 문을 향하여 서 있는 광경을 상상하게 됩니다. 모든 고뇌와 질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하루하루의 육신의 생활을 위하여 애쓰고 피곤한 인생들이 그 얽히고 설킨 사슬을 벗어버리고 이 자리, 성전 문 앞 광장에 모였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어놓고, 그에게 바치고 그만을 바라보며 살길을 찾으려고 여기 이 장엄한 예식에 참여하러 모였습니다. 그러니 하늘도 땅도 떠나갈 듯이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문도 석사가야 (朝聞道 夕死可也)’란 공자 선생의 말도 있거니와, 아침에 도를 들어 그 심령이 깨우침을 받고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이 심정은 아마도 예배자의 공통된 심정일 것입니다.
내 주의 도 첨 받은 날 참 기쁜 날이 아닌가
그 기쁜 맘 못 이겨서 온 세계에 전하노라
위와 같은 찬송도 있지만, 인생의 외부적인 고뇌와 내부의 실존적 고뇌 속에서 허덕이고 애쓰다가 오직 한 길, 다시 말하면 인생의 사는 길이 여기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고, 은혜를 받아 이 성전 마당에 와 섰을 때, 바로 다음 시간에 죽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회한이 없는 감격이 있는 것이 예배 자들의 찬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찬양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입니다. 인생의 가장 존귀하고 떳떳한 일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 그 앞에 예배하는 일인 것을 아는 사람은, 이 길을 걸을 때 기쁨과 찬양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러 나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노래가 깃들고, 그 발걸음에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와 같은 감격이 없다면 이 저녁에 이렇게 많이 나오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 3절에는 찬양할 이유를 말합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찬양을 요구할 근거가 있으십니다.
1.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 참된 지식은 신앙심의 어머니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신성을 알고자 하는 것과, 그 분께서 하나님이시다 하고 의미를 깨닫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며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의 자세를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 가운데는 사람이 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가장 크고, 무겁고, 가장 의로운 이유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를 섬기며 찬양하면서 그 앞에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논쟁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행하는 것뿐입니다. 옛날 바로 왕의 세력이 얼마나 강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니 내 백성을 내어 보내라” 하실 때 바로가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9장 20절에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질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면 그것이 옳은 일이요, 훌륭한 일인 것입니다. 다른 논쟁이나 시비가 없다면 하나님의 신성을 받아들이도록 하셔야 합니다.
2. “그가 우리를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손들입니다. 이는 우리가 계시로 알게 된 하나의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며, 주님께 경배해야만 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목자가 그의 양 떼를 지켜보듯이, 우리 모두를 위하여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찬양으로 보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양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옷을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호흡하게 하시고 심장의 피가 뛰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이렇게 세밀하게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이 우리에게서 떠나시면 우리는 그 순간 죽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양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시시각각 예비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조건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 하나님의 성스러운 특성입니다.
“대저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치리로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는 정의로우시며, 진실되고, 친절하고, 자애로우신 분이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지 말라” 하시는 것은, 그것을 하면 안되겠기에 하지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어린애에게 하는 말은 어린애를 위한 어머니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대로 하지 아니하면 어린애에게는 손해가 막대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미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면 그 분께서는 틀림없이 이행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으시며 자신과 같이 영원 불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 왔습니까? 혹시 하나님께 반항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해 무시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시고 살아가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까? 이와 같은 일은 빚을 지고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채무독촉이 없다고 해서 평안히 지내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자기의 의무를 이행하기 전에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위 실제적 무신론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서도 세례를 받습니다.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성찬에 참예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주 안에서 믿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사랑에 바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생활이 따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행사에 가담하는 것은 조금도 싫어하지 아니합니다. 참된 복종보다는 피상적인 모습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형식적인 생활이요, 생명력이 없는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입술과 목소리만의 찬양이 아니라, 그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격의 노래가 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찬양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여 왔습니까?
많은 경우 우리의 창조자요, 우리의 소유주요, 우리의 목자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지만 중심으로의 찬양이 아니라 형식적인 찬양이었고,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하지만 입술만의 헌신이 많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하여 “너희가 입술로는 나를 섬기는데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처럼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지 못하기에 다행이지, 만일 상대방의 마음을 안다면 아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증스러운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입술로는 사랑하고 존경하고 위한다고 하지만, 마음에는 칼을 품고 그 혀에 독이 가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무리인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지만, 사실이 그런 것을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인간 세계의 비극이 아닙니까?
빚을 진 사람이 빚 갚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면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정말 정직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의 책임을 다하기 전에는 마음에 평화가 없을 것입니다. 요사이 문제가 되고 있는 기업체들이 나라에서 돈을 빌려서 사업을 하지는 않고 많은 땅을 사가지고 부동산 투기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엄격히 따지면 나라를 파괴하는 몰염치한 일들입니다.
참된 성도의 심정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이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는 자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그 크신 은혜에 만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헌신과 봉사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라는 사실을 믿는다고 하면, 형식을 떠나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악된 생활에서 떠나지 않으면서 세례 받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를 떡 먹듯이 범하면서,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면서, 형제의 마음을 괴롭히면서 성찬에 참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너무 형식적입니다. 습관적입니다. 금을 바치는 대신 동을 바치고, 참된 복종이 아니라 피상적입니다. 이사야 1장 1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곳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이와 같은 헌신 봉사 예배는 아무리 드려도 헛된 것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며, 목자 되시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에 사도 바울이 세례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12-13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피로 값을 지불하고 사신 바 된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그만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교만하다면 아직 그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감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마음 속에 감사가 없이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도, 하나님의 자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이니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 심령이 자라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나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심령이 자라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심령이 자라기 위해서는 성경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고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세례문답을 하는데, 문답을 하러 온 사람들이 목사님 앞에 앉았습니다. 20명 정도가 같이 앉아서 문답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고등학생들, 청년들, 장년들이 같이 앉아 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 학생들은 목사님이 묻는 대로 잘 대답했습니다. 주기도문도 잘 외우고, 사도신경도, 십계명도 척척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서 교수로 계시는 분이 문답을 하게 되었는데, 가만히 보니 자신이 없어서 얼굴이 붉어져 다른 사람에게 묻는데도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목사가 눈치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망신시키면 안되겠다 생각하고 아주 쉬운 것을 물으려 하였습니다.
“교수님, 예수님의 제자가 몇 사람이었죠?” 이때 이 교수님은 머리를 푹 숙이면서 아주 난처해하면서 “글쎄요.” 하고 어물거리는데, 옆에 앉아 있던 여자 고등학생들이 “열둘, 열둘” 하면서 소곤대니까 이 말을 듣고, “열둘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그 분들의 이름을 기억하시겠습니까?” “글쎄요.” 하고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두 사람밖에는 모르겠는데요.”
“예, 좋습니다. 기억나시는 대로 대답해 보시지요.” 그랬더니 이 교수님 대답이, “한 사람은 모세고‧‧‧‧‧‧”라고 하니, 옆에서 이 대답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킥킥거리며 웃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그 다음이 생각나지 않아 애쓰다가,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엘리야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설교시간에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화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었다는 말이 어렴풋이 생각났는데, 그 분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줄 착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같이 문답하던 사람들이 “와”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당황한 교수님 말씀이 “그러기에 제가 두 사람밖에 모른다고 하지 않았어요?” 했다고 합니다. 대학 교수님도 성경을 배워야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합시다. 불평과 불만으로 싸여 있던 우리 죄를 회개합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세상을 사랑하던 것도 회개합시다. 우리 심령이 자라지 못한 것도 회개합시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의 비밀
(시 100:1-5)
찬송 19장
시편 100편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찬양하는 95편부터 100편의 결론과 같은 신정시오, 감사의 시입니다.
본 시편은 성전에서 감사제에 사용되었고 지금도 유대인의 회당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 때 찬양할 수 있다면서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나아가라고 권합니다.
이처럼 찬송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주는 은사입니다.
기도가 나오지 않으면 찬송하세요.
찬송은 방언과 같이 우리 마음의 문을 열어주는 귀한 은사입니다.
한국강해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