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치니의 유명한 오페라 <라 보엠>의 원작은 앙리 뮈르제의 소설 <보헤미안이 사는 모습>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를 무대로 시작되는 이 오페라는 가난한 젊은 예술가들의 순수하고 애절한 사랑을 그렸습니다. 동시에 강한 사회적 고발의 메시지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페라 대본을 쓴 주세페 자코사와 루이지 일리카는 사회 고발성이 강한 이 사실주의 원작에 젊은이들의 로맨틱하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버무려 넣었는데, 이에 대하여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가미하고자 했던 작곡가 푸치니는 무척 만족해 했습니다.
오페라가 시작되면 1830년대 주로 대학생들이 모여 사는 파리의 라탱 지구(소르본느 대학이 있는 곳)의 낡은 아파트 다락방 무대가 등장합니다. 그 다락방에는 시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 철학자 콜리네와 음악가 쇼나르가 모여 살고, 바로 이웃 방에는 가난한 시골 처녀 미미와 뮤제타가 삽니다. 이들은 모두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텨내고 있습니다.
흔히 떠돌이 예술가라는 의미인, 보헤미안이라 불리는 위의 4명의 젊은 예술가들이 주인공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제목인 <라 보엠>은 ‘보헤미안 여자’를 뜻합니다. <La Boem>의 La는 여성 단수를 나타내는 인칭대명사입니다. 따라서 진짜 주인공은 4명의 예술가가 아닌 시골 처녀 미미입니다. 이 작품은 극단적인 빈부 격차라는 아픈 사회 현실을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시대 배경인 프랑스의 1830년대는 7월 혁명으로 왕위에 올랐다가 2월 혁명으로 쫓겨난 루이 필리프 국왕이 통치하던 시대였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지향했던 입헌군주제가 프랑스에 처음 도입되었던 그 시절, 필리프 국왕은 처음에는 ‘시민의 왕’으로 불렸습니다.
핍박받던 서민들은 절대왕정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습니다. 입헌군주제의 도입으로 프랑스 혁명 정신이 이루어지는 듯했지만, 실제론 오로지 부자들, 즉 부르주아 계층만이 부를 향유하는 시대가 펼쳐진 것입니다.
오페라 1막에서 미미는 빈곤의 극한을 보여주는 다락방에서 로돌포를 처음 만납니다. 이때 로돌포는 그녀의 손을 잡고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을 부릅니다. 그녀 또한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를 부릅니다. 이 아리아에는 미미가 자신의 본명이 아님을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녀는 이름을 숨긴 채로 ‘후원자(파트롱)’를 찾아 나서야 하는 가난한 시골 출신 아가씨입니다. 루이 필리프 시대에는 초기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붕괴되는 농촌에서 시골 처녀들이 파리로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그들이 파리에서 가장 손쉽게 일을 할 수 있는 일은 의류공장 직공 일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개발산업시대의 구로공단이나 청계천 의류 상가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녀들의 수입으로는 월세는커녕 목구멍에 간신히 풀칠만 하고 빚만 걸머지는 형편으로 전락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희망이라곤 빚을 갚아줄 후원자를 찾는 일 뿐이었습니다. 후원자가 없다면 집세 절약을 위해서 가난한 대학생들한테라도 얹혀살아야 했습니다. 가난하고 병약한 미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후원자’라는 말은 다소 고상하게 들리지만 매춘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후원자가 유부남이라면 후원 행위는 간통이 될 소지가 높았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간통죄가 있긴 있었으나 유명무실했습니다.
후원자라고 해서 다 같지는 않았습니다. 급수가 있었던 겁니다. 후원자가 엄청난 부자이거나 고위 귀족 또는 권력층인 경우 후원받는 아가씨는 이른바 ‘코르티잔’으로 불리며 사교계의 꽃이 될 수 있었습니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인 비올레타가 바로 코르티잔입니다. 20세기 초 유명했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스스로가 파리의 마지막 코르티잔이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첩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에 비해 갑자기 돈을 번 졸부를 후원자로 두고 있는 여성은 ‘롤레트’로 불렸습니다. 롤레트들은 성공의 상징인 이륜마차를 탄 남자를 붙잡기 위해 마차가 다니는 대로를 왔다 갔다를 반복했습니다. <라 보엠> 2막에서 <카페 모뮈스> 앞으로 이륜마차를 타고 나타난 뮤제타가 바로 롤레타입니다.
뮤제타에게 처음엔 관심을 두지 않는 척했던 화가 마르첼로는 그녀가 <뮤제타의 왈츠>를 부르자, 자신도 노래를 따라 부릅니다. 이런 식으로 가난한 마르첼로는 롤레트 뮤제타와 끊임없이 서로 밀당을 반복합니다.
루이 필리프 왕은 ‘시민의 왕’이라 불렸는데, 여기서 시민이란 서민이 아닌 부르주아만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부르주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통치를 한 끝에 결국 필리프는 1848년 7월 혁명으로 18년만에 서민들에게 쫓겨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 시대가 도래합니다. 이어서 프랑스도 본격적인 산업화시대에 접어들면서 도덕적 해이와 함께 생계형 매춘이 득세하고 이것이 사회 문제로 대두됩니다.
당시 파리에서는 ‘진입세’라는 걸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고속도로 통행료와 같은 것으로, 당시에는 마차뿐만 아니라 일반 보행자에게도 부과되었습니다. 3막을 보면 이른 새벽 파리시의 관문이자 진입세를 받는 곳인 <앙페르 문>, 일명 ‘지옥의 문으로 불리는 곳에 시골에서 온 뜨내기 노동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근처 술집에 방을 얻어 함께 살고 있는 뮤제타와 마르첼로에게 병색이 완연한 미미가 찾아옵니다. 미미가 로돌포의 질투심 때문에 헤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하자, 로돌포도 마르첼로를 찾아와 미미가 바람기가 있어 헤어져야겠다고 말합니다. 마르첼로가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한다고 핀잔을 주자 그제야 로돌포는 진실을 밝힙니다.
사실은 자기와 함께 사는 미미의 폐병이 악화되고 있는데도, 자신은 땔감을 살 돈조차 벌지 못하고 있어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는 로돌포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으며 미미는 조용히 이별의 노래 <기쁨은 어디에 있지>를 부릅니다. 노래 가운데 “당신의 사랑이 나를 외로운 삶에서 불러냈어요”라는 가사는 듣는 이의 가슴을 사무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런 와중에도 뮤제타가 다른 남자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자 마르첼로 역시 좌절합니다. 결국 연인들은 앙페르 문 앞에서 이별합니다. 이렇게 가난은 연인들의 이별을 가져오고 종국에는 세상과의 이별도 가져옵니다. 미미가 깊어가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미미의 약값을 마련하기 위해 철학도 콜리네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오버 코트, 즉 커다란 주머니가 있어 일종의 이동식 책장 역할을 했던 코트를 팔기로 합니다. 이때 그가 부르는 아리아 <안녕, 낡은 외투여>는 슬픔을 넘어 처절한 느낌마저 자아냅니다. 죽어가는 미미는 행복했던 시절을 힘겹게 떠올리면서 <아, 그대는 나를 기억하시나요>를 부르며 영원히 이승을 하직합니다.
이렇게 미미는 사랑하는 루돌포와 이별하고 그렇게 고달펐던 이 세상과도 이별합니다. 오페라 <라 보엠>은 초기 자본주의의 모순된 사회 구조가 빚어낸 사랑의 비극과 죽음을 통한 안식을 보여주는 안타깝고 애절한 멜로드라마입니다.
<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 >
<라 보엠>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이탈리아 최후의 *벨칸토 작곡가이자 베르디의 후계자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푸치니는 4대째 오르가니스트인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한테 오르간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곧 아버지를 여의지만 교육열이 남다른 어머니의 뒷바라지로 장학금을 얻어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푸치니는 화려한 도시 밀라노에서 동창생 마스카니와 레온카발로 등과 함께 자유로운 보헤미안의 삶을 살았습니다. 말이 자유롭지, 보헤미안의 삶이란 사실 가난과 굶주림의 고통에 시달리는 생활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가 <라 보엠>에서 파리의 현실을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학생 시절에 겪은 이런 경험 덕분이었을 겁니다.
* 벨칸토 창법
벨칸토(bel canto)’란 ‘아름다운(bel) 노래(canto)’라는 뜻입니다. 달리 말하면 ‘아름답게 노래하는 가창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성악가들은 아름답게 노래해 청중에게 감동을 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왜 굳이 ‘벨칸토 창법’, ‘벨칸토 오페라’, 혹은 ‘벨칸토 가수’라는 용어들을 만들어내게 되었을까요?
‘벨칸토’는 주로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오페라에 쓰였던 화려하고 기교적인 창법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냥 우아하고 서정적으로만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성악가가 발휘할 수 있는 극한의 기교를 총동원해 노래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기교적인 면에 주안점을 두고 부르는 노래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