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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휼 시인의 첫 시집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는 따뜻하다. 넉넉한 마음에서 깃드는 편안한 웃음이 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묵직한 서정이 있다. 이야기와 인물이 어우러지면서 기억하고 반추하는 사유가 견고하나 딱딱하지 않고 말랑하나 터지지 않는다. 이것은 김휼 시인 안에 단단하면서도 부드럽게 내재되어 있는 특징이다. 형상화되고 사유화된 그 특질이 깊고 그윽한 인격적 내면을 구축한다.
이러한 내용은 김휼 시인의 시 세계를 형성하는 배경이나 소재들이 어려움 없이 좋은 부분만 포함하며 좋은 부분 안에서만 존재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고 미완적이며 미숙하다. 고통을 모르거나 이겨내지 못한 행복은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김휼 시집에는 상처도 있고 아픔도 있고 통증도 있고 울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휼 시인이 빚어내는 삶의 서정은 고맙고 미덥다. 다양한 것들과 마주할 때 각각의 것들이 주는 영향 아래 놓이기도 하고 공격에 시달리기도 하면서 때로 넘어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시선이 바뀌지 않고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다. 멘탈이 흔들리거나 눈빛이 흐려지지도 않는다.
어머니라는 그늘
떫고 단단한 불화를 그늘에 들여놓네
말랑말랑 분이 생겨 단맛을 더할 무렵
그늘을 즐겨 먹던 어머니는 그늘이 되었네
말이 없는 자리에서 나오는 숨 같은 그늘로
한없이 어루만져 주고 싶은
보드라운 것들이 몸을 맡겼네
다툼 없이 이룩해 놓은 살가운 영역으로
정처가 없는 구름도 제 몸을 부려왔네
그런 날은 괴이한 슬픔이 안쪽으로 고였네
잎이 넓어질수록 깊어지는 그늘에
어머니는 젖어 있던 웃음을 내어 말렸네
젖무덤 같기도 하였던 당신의 그늘
눈을 뜨니 그늘 밖에 내가 있네
‒「발효되는 그늘」 전문
“떫고 단단한 불화”는 오래 곱씹어볼만 하다. 불화인데 떫고 단단하다. 떫고 단단한데 불화다. 수식을 받는 명사 “불화”를 “떫고 단단한” 것으로 밝혀준다. 떫은 것이 금방 사라지면 좋은데 단단하게 유지된다. 단단해서 좋은데 떫어서 힘들다. 그런 성질이 불화다. 떫은 불화, 단단한 불화다. 떫은 불화여도 떫은맛이 엷어지면 좋은데 떫은맛이 단단해서 그럴 수 없다. 단단한 불화여도 공격하지 않으면 좋은데 그게 안 된다. 단단한 상태로 떫은맛을 계속 내기 때문이다.
“떫고 단단한 불화”를 모른 척하지 않고 “그늘에 들여놓”는다. 감을 깎아서 그늘에 걸어놓으면 “말랑말랑 분이 생겨 단맛을 더할 무렵”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처럼 “불화”도 “그늘에 들여놓”으면 그렇게 먹을 수 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무엇을 만들어 먹기 위해 그늘에 들여놓았다면 무엇을 먹는다고 해야 하는데도 ‘그늘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유는 ‘불화’ 때문이다. 불화는 먹는 음식이 아니라서 불화를 발효시켜 먹는다는 차원에서 ‘그늘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불화를 삭히고 발효시켜서 먹을 수 있게 만드는 그늘, 불화는 만지거나 볼 수 있는 사물이 아니어서 불화를 표상적으로 적시하는 그늘에 불화의 의미와 내용을 담아 그늘을 먹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늘을 아는 사람이 그렇게 표현한다. 감을 말리면서도 그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을 말리면서 그늘의 작용과 효과를 알게 되어 마음에 들어온 그늘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불화를 다스려본 사람만 이해할 수 있어서 불화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불화를 그늘에 말려 떫은맛도 삭이고 단단한 성질도 물렁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머니가 그런 분이셨다. “그늘 한 평 갖기 위”(「그늘 땅」)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늘에 말려 곶감을 만들 듯 불화를 먹을 수 있게 만드셨다. 어머니는 그늘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그늘을 즐겨 먹”다가 마침내 “그늘이 되”셨다. 어머니의 성품과 자세는 그늘 같았고 그늘의 특징을 한결같이 유지했다. 그늘에 들어오는 것을 품어주며 먹기 좋게 말리고 발효시키는 것처럼, 어머니도 다투는 자식들을 품에서 다독이며 불화를 먹기 좋게 바꿔 놓으셨다. 그 결과 “말이 없는 자리에서 나오는 숨 같은 그늘로/한없이 어루만져 주고 싶은/보드라운 것들이 몸을 맡”길 수 있었다.
나아가 어머니는 그늘 자체여서 무엇이든 그늘에 들 수 있었다.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늘 밖에서 정처 없이 떠돌았을지라도 아무 조건도 판단도 없이 받아주었다. 그늘은 의지할 수 있고 피할 수 있고 쉴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그늘과 어머니가 하나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어머니라는 그늘’은 어머니가 “다툼 없이 이룩해 놓은 살가운 영역”이었다.
그곳에 “정처가 없는 구름도 제 몸을 부려왔”다. “구름”은 밖으로 떠도는 가족이고 그가 파생시키는 감정이다. “그런 날은 괴이한 슬픔이 안쪽으로 고였”고 안쪽으로 고인 슬픔을 받아들인 결과를 겪었다. “한세월 울적한 그늘을 안고 살아/벽마다 금이 간 둥근 눈물의 집”(「눈 밑엔 붉은 알람브라 궁」)이었다.
그렇지만 그늘은 슬픔에 젖고 물드는 접촉과 해결 과정에서 그늘의 유연한 힘을 발휘했다. 가족을 품기 위해 손을 벌리는 것처럼 잎을 키우고 넓게 벌리면서 그늘을 넓고 깊게 만들었다. 그늘로 들어오는 대상의 감정을 다스리기도 하지만 잘 대처하기 위해서 자기 감정도 다스렸다. 그래야 그늘 속에 포근하게 품어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젖어 있던 웃음을 내어 말렸”고 “돌아앉아 찌그러진 그늘을”(「그늘 땅」) 폈다.
어머니는 그늘 속으로 달려온 자식들이 묻혀놓은 것들을 잘 회복하는 그늘의 속성을 발휘했다. 그늘 속에서 묵묵히 그늘의 정서를 드러냈다. 그늘의 특징을 통해 슬픔이나 아픔을 자신의 그늘에서 발효시키며 소화했다.
그때 그늘은 완성이나 초월이 아니어서 그늘도 슬픔에 젖었다. “젖은 슬픔의 옷을 말”(「물속의 검은 집」)리며 고통이 묻어있는 통증을 유발했다. “쉽게 부서지는 가슴을 가진 어머니”(「고등어 한 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늘의 특성을 발휘해 해결했다. 이것이 그늘이요, 그늘의 미학이다. “그늘만큼 좋은 땅이 없다”(「그늘 땅」)고 하는 이유다.
어머니의 그늘은 생래적이었다. 근원으로 회귀하고 싶은 생명의 누림이었다. 그리움의 본질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그늘을 지켜보며 그 그늘 속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그랬으니 “젖무덤 같기도 하였던 당신의 그늘”이라고 고백하는 생명의 숨결처럼 매사의 호흡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의 그늘에서 자식이 성장했을 때 그늘은 일을 마쳤으므로 어머니는 조용히 그늘을 거두셨다. 그늘이 사라졌으니 어머니도 볼 수 없었다. 그늘을 거두고 밖으로 내보낸 자식은 그때 그늘 밖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한다. “눈을 뜨니 그늘 밖에 내가 있”다는 깨달음이다.
그늘의 성장통
어머니의 그늘에도 통증이 있었다. 누군가 “제 몸을 부려”오게 되면 “그런 날은 괴이한 슬픔이 안쪽으로 고였”(「발효되는 그늘」)다. 어머니가 그늘의 특징을 익히고 체득해서 자기 것으로 삼았던 결과의 발현으로, 어머니의 그늘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어떤지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그늘의 품에 들어와 그늘을 힘들게 하는 것은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존재한다. 힘을 발휘해야 할 그늘을 위해 내적으로 완숙하게 외적으로도 완전하게 가꿔야 하는 것이 성장통의 배경이다. 그런 성장통의 과정을 통해 어머니 같은 그늘이 되어가고 어머니의 그늘을 구현하며 대대로 이어간다.
자식이 물려받아 완성해가는 그늘의 성장통에 대한 서사는 자식의 그늘을 탐구하는 차원 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그늘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유추하는 단서의 실증적 제시가 된다. 완성된 그늘의 발현을 체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자식이 보여주는 그늘의 성장과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늘의 성장통은 앞선 그늘의 역사를 복기하는 자료가 된다.
갈색 소용돌이에 갇힌 오후
빈 기억을 감고 덧없이 맴돌다 굳어진 옹이를 들여다봅니다
왕버들 옆구리에 집을 지었는지 벌들이 들락거리네요 대바늘 구멍만 한 틈만 허락했을 뿐인데 빛을 물어 나르고 있어요 멍든 속살 같은 옹이 속에 벌들이 살듯
나의 흉터는 누군가 머물고 있는 집이라고 생각돼요
‒「흉터」 부분
「흉터」는 그늘이 자라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통증의 근원으로써 성장통의 전형을 보여준다. “갈색 소용돌이에 갇힌 오후”에 “빈 기억을 감고 덧없이 맴돌다 굳어진 옹이를 들여다”본다. 진정한 그늘의 배경에는 “소용돌이”와 “굳어진 옹이”가 있다. 그 옹이에 “대바늘 구멍만 한 틈”이 있다. 그 정도만 “허락했을 뿐인데” “벌들이 들락거”린다. 그렇게 “속살 같은 옹이 속에 벌들이 살 듯” 자신의 “흉터는 누군가 머물고 있는 집이라고 생각”했다. 그 집에서 “몸 안 가득 소용돌이를 키우”며 “허기진 저녁처럼 앉아 발자국을 세고 있”(「구멍」)었다. “빈 가슴에 가두고 졸여야 했던 것들”(「소금꽃의 시간」)로 인해 “허락 없이 내 안에서 지는 것들 앞에/두 눈을 감는 것 외엔 달리 무얼 할 수 없었던”(「라떼는 말이야」) 시절이었다.
그 흉터의 집에 누군가 머물고 있다. 흉터는 누군가와 관계있고, 누군가가 흉터를 만들었다. 누군가가 여전히 흉터의 집에 머무는 것은 흉터가 아물지 않았고, 흉터의 유발자에 대한 감정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흉터가 아문 것처럼 보여도 누군가 흉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 그때마다 아프고 힘들다. 남들은 아문 흉터를 보면서 다 끝난 일이라고 짐작하겠지만, 흉터를 가진 당사자는 그 속에 있는 누군가로 인해 통증처럼 신음의 진물을 내뱉는다. 흉터의 집이나 “메아리도 사라져 버린 헌 집”(「플라잉 타임」)에서.
“슬픔의 유역을 쓸어내리던”(「검은 꼬리지느러미 심해어」) “빈 기억을 감고 덧없이 맴돌다 굳어진 옹이를 들여다”보는 일은 “아주 오래전의 한 밤을 생각해 보”(「슬픔의 속도」)는 것으로 시작한다. 슬픔은 흉터의 집에 머물고 있는 누군가로 인해 생긴 감정이어서 “속도를 앞세우고 불안을 달래 보는”(「사라지는 간격」) 날들이 많았다. “누가 또 슬픔을 켜 두고”(「귀뚜라미」) 간 그 “슬픔의 간격을 메우”(「장군의 섬」)는 일이었다. “잘려나간 내 오른쪽 상처”(「도비니의 뜰을 거닐며」)에 대해 또는 그 상처에 대한 “의혹을 끊임없이 재생하는 사람들”과 “가벼운 질문에도 떠밀려 다니는 무리”(「떠도는 군중」)들과 “묘연한 행방을 묻는 사람들”(「소문」) 때문이었다.
그 감정에 쌓인 먼지는 “슬픔이 풍화되는 속도”였다. “둥글게 쌓아 올린 아늑한 곡선이” 보였고 “잊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또렷해”졌다. 그때 “달빛이 내 흉터를 핥고 있었”다. “물이랑 따라 파란의 생을 연주하는 달빛”(「지느러피 테라피」)이 흉터를 어루만져줄 때 “오래전 오늘, 붉은 산도를 빠져나온 아이”가 “그 밤, 젖은 시간 속으로 흐르는 강물 소리를” 듣는 장면이 떠올랐다.
“함성을 머금은 둘레는 기억의 먼 곳으로 길을 내어주는데/애잔한 풍경 하나 기운 오후의 틈으로 끼어”(「곡선의 문장을 걷다」)든다. 그 시절은 “디딜수록 발밑에 길 하나씩 늘어”났고 “불완전한 내 청춘의 뜰에는 비틀린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 나무를 지키려고 “소진한 생의 마디를 연잎 위에 풀어버린 어머니”는 “멈춰버린 반쪽의 몸으로 캄캄한 내 문맹의 시간을 비춰주었”다. 나와 어머니는 그렇게 관계하면서 “당신의 안과 나의 바깥이 둥근 세상을 만들어가는 계절”을 함께 살다가, “나는 먼 곳의 기억을 향해 걸어”(「곡선의 문장을 걷다」)갔다. “당신을 앓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채로 “쭈그러진 그늘을 먹고 자란 아이”(「그늘 땅」)가 “슬픔의 최소화를 위해 손풍금 선율로 깊고 푸른 상처를 길들이”(「지느러미 테라피」)면서. 무엇을 “지나온 후”의 “무늬란 내 안의 것이라는”(「섬」) 사실을 깨달으면서.
나는 가볍게 살아남았다
피어나던 것들은 그림자로 접히고
치명적인 배후는 목이 꺾였다
좁은 산도를 통과하여 한 방울 요약된 생으로 남기까지
바람 불어 가는 쪽으로 감아 도는 것들의 비기祕技
불안을 달래듯 탕진한 꽃의 시간을 투여한다
느리게 심장을 파고드는 백색 통증
몸에 고인 향기를 따라 곡면을 넘는다
안으로 머물던 기억 어디쯤 부끄러운 고백 같은
허방의 무늬가 어룽대다 사라진다
말로 할 수 없는 비극 속에서도
장밋빛 인생을 추출해 내고야 마는 향기의 노고가
하르르 무취의 결계를 풀어내고 있다
갈데없이 가벼워지고 있는 저 꽃잎들
다다르고픈 기착지는 어디일까
제 몸 가장 깊은 그곳에서
안간힘으로 끌어올린 물기를 향기로 푸는 꽃의 방식에
지상의 모든 눈물은 뿌리를 얻지 못할 것이니
바람이 분다,
기척 없는 한 생이 나를 통과하고 있다
‒「샤넬 넘버5」 전문
누군가가 만든 그 안에 계속 누군가가 살고 있는 「흉터」는 풍화를 통해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모하는 「슬픔의 속도」를 보여준다. 나아가 “세상 모든 직선은 곡선의 완성을 위한 받침인 거라”는 깨달음을 얻으며 「곡선의 문장을 걷다」라는 자세를 보여준다.
이런 과정을 통해 “나는 가볍게 살아남았”고 “피어나던 것들은 그림자로 접히고/치명적인 배후는 목이 꺾”였다. 흉터의 배후로 지금까지 존재한 “치명적인 배후”가 사라졌다. “오래전 오늘, 붉은 산도를 빠져나온 아이”(「슬픔의 속도」)가 “좁은 산도를 통과하여 한 방울 요약된 생으로 남기까지” 그렇게 버티고 견디며 주저앉아 울다가 때로는 고통을 참으며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바람 불어 가는 쪽으로 감아 도는 것들의 비기祕技” 때문이었다. 물론 “어느 때부턴가 나를 놓칠 것만 같”(「사라지는 간격」)았으나 그 비기의 힘 때문에 “불안을 달래듯 탕진한 꽃의 시간을 투여”할 수 있었다. 때로 “느리게 심장을 파고드는 백색 통증”을 느껴도 “몸에 고인 향기를 따라 곡면을 넘”었고 “안으로 머물던 기억 어디쯤 부끄러운 고백 같은/허방의 무늬가 어룽대다 사라”졌다.
흉터가 풍화되면서 변모된 곡선은 겉으론 자연스러웠지만 “말로 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그러나 그 “비극 속에서도/장밋빛 인생을 추출해 내고야 마는 향기의 노고”를 터득했고 그 노고가 힘을 발휘해 “하르르 무취의 결계를 풀어내”면서 “갈데없이 가벼워지고 있는 저 꽃잎들”의 결말을 보여주었다. 가볍게 살아남은 존재로서 “다다르고픈 기착지”는 미완성이었음에도 “아이들은 숙성되고 발효되어 큼큼하게 피어”(「사라지는 간격」)났다.
그래서 “제 몸 가장 깊은 그곳에서/안간힘으로 끌어올린 물기를 향기로 푸는 꽃의 방식”을 터득했고, 수고로웠던 “지상의 모든 눈물은 뿌리를 얻지 못할”지라도 눈물을 탓하지도 불신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기척 없는 한 생이 나를 통과하고 있”는 시절을 온몸으로 지나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남기는 과정이 “기착지”로 가는 길이었다. “가볍게 살아남”아 “어떤 향기도 통증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샛노란 순간을 미분하다」)게 된 이상 “빗장 걸린 향기를 두드”려 “비틀거리는 걸음 들이는 저녁, 지지 않는 향기로 맞아주는 일”(「꽃살문 아래」)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젠, 그림자를 내려놓”(「레테의 만찬」)아야 하니까.
통증을 식히는 저녁
긍정 부정의 무엇은 나타나는 감정이나 현상들을 감내한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 잡다한 뒤처리를 감당한다. 그런 것 없이는 치유와 성숙이 없다. 그런 일을 통해 흉터의 집에 살고 있는 누군가를 밖으로 꺼내 흉터를 풍화시킨다. 흉터의 날카로운 선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변모시킨다. 그런 현상에 굉음과 열기가 수반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함께.
여러 날 계속하여 비가 내렸다
젖은 마음으로 길을 잃고 흐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한 길을 만났다
집으로 가려면 조금은 더 돌아서 가야 했지만
얼마간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으므로
그날 이후 먼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강물은 흘러 누군가의 마음에 닿으려 하고
몇몇 사람들 둑을 따라 걸었다
파랑 치는 물결을 잠재우는 물오리들
강 건넛마을 외딴집에서는
잊혀진 기억 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울음을 다 뱉어낸 갈대의 빈 울대 사이에서
노을은 붉게 흔들렸다
저녁은 물 식힘 그릇 같다 했던가
허공 가득 끓어올랐던 하루가 가라앉고 있다
마음자리를 닦고 강을 벗 삼아 마주 앉는다
알맞게 식은 잔을 강 건어 산이 먼저 들이마신다
* 끓인 물을 식히는 대접.
‒「저녁은 숙우*」 전문
“집으로 가려면 조금은 더 돌아서 가야 했지만/얼마간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으므로/그날 이후 먼 길은 집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는 말은 따뜻하다. “나의 흉터는 누군가가 머물고 있는 집”이었고 그 집은 “갈비뼈가 부러진 폐가”(「흉터」)였는데, 이제 그 흉물스러운 집에서 나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집으로 가게 되었다. 흉터의 집을 의식하거나 기웃거릴 때는 ‘집으로 가는 먼 길’이 보이지 않았고 보여도 그 길을 갈 엄두가 나지 않았는데, 이제 “따뜻한 위로”를 찾아 “먼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것이다.
그 마음을 “강물은 흘러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것으로 표현했으며 “몇몇 사람들 둑을 따라 걸었다”고 묘사했다. “파랑 치는 물결을 잠재우는 물오리들”도 그랬다. “강 건넛마을 외딴집에서는/잊혀진 기억 같은 연기가 피”었다. “빈 기억을 감고 덧없이 맴돌다 굳어진 옹이”(「흉터」)가 훈훈하게 피어올랐다. 흉터가 만들어지고 굳어지는 동안에 고이기만 했던 “울음을 다 뱉어낸 갈대의 빈 울대 사이에서/노을은 붉게 흔들”리는 배경이 되었다.
흉터의 집에서는 “누군가”의 인기척도 힘들었는데, 이제는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었다. “끓인 물을 식히는 대접”인 “숙우”처럼 “저녁”을 “물 식힘 그릇”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저녁마다 “허공 가득 끓어올랐던 하루가 가라앉”는 것을 보며 “마음자리를 닦고 강을 벗 삼아 마주 앉”았다. 강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알맞게 식은 잔을 강 건너 산이 먼저 들이마”셨다. “내 안의 얼어붙은 아홉 살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시린 상처에 갇힌 채 울고 있던 아이라 불리는 얼음이 녹”(「얼음땡」)아 흐르는 강이었다. 빈 그릇인 숙우가 뜨거운 물을 받아 식히듯 “고이는 그 눈물로/반짝이는 것들을 키워 그늘을 메우”(「보칼리제」)는 그늘의 풍경이었다.
치유하는 호수
「저녁은 숙우」에서 보여준 편안한 해결과 마무리는 흉터가 커지지 않도록 식히면서 다스린 과정을 보여주었고, 흉터의 통증에서 나오는 울음을 식혀서 상처의 울음이 아닌 회복의 울음으로 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행위가 ‘저녁’이라는 시공간을 통해 반복되면서 ‘그늘의 성장통’이 ‘그늘의 성장’으로 변화되었다.
그늘의 성장통이 일련의 연속된 흐름이었다면, 성장통의 예후와 징후들을 식히고 다스리는 “숙우”라는 저녁의 역할도 날마다 반복되는 연속 과정이었다. 그런 ‘숙우의 저녁’을 자연스럽게 맞이한 또는 의도적으로 맞이한 결과를 보자.
숲쟁이 지나 여기쯤에 그가 산다고 했어
공감 능력이 지상 최고라는데
맑은 눈빛과 마주하게 되면
어떤 소요도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데
낯선 내게 물 방석을 내어놓는 마음이라니
작은 새 신음도 아파하며 물결체로 새기는 그를 보았어
하늘이 일생 떠나지 못하는 이유일 거라 생각했어
명지바람 숨결을 고르는 사이였을까
어쩌다 퍼런 가슴속을 들여다보게 되었지 뭐야
가끔, 안개는 호수의 한숨일까, 허밍일까, 궁금했던 나는
어루만지는 자의 깊이를 물었지
잠시 파랑이 일었어, 근심은 수생식물 같은 것
물 그늘도 순리에 맡기다 보면
주름살은 곧잘 비단결이 되어 흐르게 된다고
방대한 눈물샘은 고이는 것을 풀어내는 키워드라고
익명을 원하는 이들이 벤치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어
‒「호수라 불리는 카운슬러」 전문
카운슬러의 뜻은 ‘개인의 생활이나 적응 문제에 관해 지도하고 조언하는 사람. 임상 심리학 기술로 상황을 분석해 자기 이해를 돕고 자기 지도력을 높이는 것이 임무’다. 그렇다면 어머니도 카운슬러다. 어머니는 상담을 배우지 못해 상담학과 관련된 표현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상담의 본류 같은 일을 했기에 상담학의 카운슬러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담에 카운슬러가 있다면 어머니에게는 그늘이 있다. 그렇다면 상담은 그늘이라고 할 수 있어서, 어머니의 그늘은 자식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충분한 상담 역할로 존재하고 기능했다. 그로 인해 그늘의 성장통을 겪으며 자라는 동안 경험했던 일들을 통해 진정한 그늘로 거듭났다. 그래서 자식이 이렇게 잘 갖춰진 카운슬러가 되었다. 편안한 그늘을 넓게 드리워 들어오는 것들을 품어주는 그늘의 카운슬러다.
그늘은 호수로 확장된다. 호수를 통해 그늘의 이미지와 의미가 완성되고 그늘의 특성이 최적화되면서 최고조에 이른다. 어머니와 그늘이 일치했던 것처럼, 호수도 한 사람의 상담자인 ‘그’가 된다. 그의 “공감 능력이 지상 최고라는” 것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상담자에게 공감 능력이 없다면 상담을 할 수 없거나 피상적으로 끝난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여서 자식의 아픔과 처지를 공감하지 못한다면 어머니의 그늘은 없으며 자식 또한 그런 어머니를 찾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머니는 “공감 능력이 지상 최고”였기 때문에 자식이 어머니의 그늘에서 치유되고 회복되는 진정한 성장을 했다.
“맑은 눈빛과 마주하게 되면/어떤 소요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어머니의 그늘이 그랬고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난 자식의 그늘을 완성해나가는 일련의 과정도 그랬다. 호수의 눈빛이 맑은 것처럼 어머니의 눈빛도 맑았고 따라서 그늘도 맑았다. 그런 맑은 눈빛을 바라보면 “어떤 소요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머니의 그늘 속에서였다.
호수는 맑은 눈만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잘 들어주는 귀도 있었다.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까지 있었다. “작은 새 신음도 아파하며 물결체로 새기는 그”였기 때문이다. 작은 새를 무시하기 쉽고 작은 새를 마주본다 할지라도 이야기를 대충 듣기 쉬운 세상인데 그는 작은 새 신음을 들을 때마다 마음 깊이 아파하며 그 마음에 물결체로 새겨두었다.
그런 마음과 자세를 품고 있으니, “하늘이 일생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지상에 하늘이 지켜보는 것이 있다면, 그리하여 하늘을 우러르거나 하늘을 품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호수라는 그’ 또는 ‘그라는 호수’다. 호수도 하늘도 같은 마음과 자세를 가졌는지, 아니면 온 세상을 품고 있는 하늘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를 닮은 호수를 바라보며 그 호수에 하늘의 마음을 담아서 그랬는지, 호수와 하늘은 같은 “퍼런 가슴”을 지녔다.
하늘에 구름이 끼는 것처럼 호수에도 “가끔, 안개”가 끼었다. 마치 그늘에 성장통이 있듯이 호수도 그런 셈인데, 그렇다면 호수의 안개는 “호수의 한숨일까, 허밍일까”. 그때 호수는 대답 대신 “잠시 파랑”을 보여주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만 가지 풍경을 가지에 달고 자라나는 근심들”(「불면의 숲으로 새들은 날고」)이었기에 “근심은 수생식물 같은 것”이라는 말도 자근자근 들려주었다.
어머니에게 “근심이 매달리기 시작”(「호주머니 속의 하늘」)했듯, 그늘의 성장통을 겪는 동안에도 파랑이 일고 근심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그늘의 성장통을 잘 감당하며 회복했던 것처럼 호수도 그런 길을 걸으며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 그늘도 순리에 맡기다 보면/주름살은 곧잘 비단결이 되어 흐르게 된다”는 이치였다. “계절은 그늘을 거두어 가고 주머니 속의 하늘도 저물어”(「호주머니 속의 하늘」)갈 때마다 눈물이 한번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이 흐르는 “방대한 눈물샘”조차도 “고이는 것을 풀어”낸다는 말씀이었다.
그늘 종족에게 바치는 헌사
누군가 살고 있던 흉터의 집처럼 호수 안에도 근심이 고여 깊고 무거운 부담감이 쌓이기만 했는데, 이제 그 모든 것들을 비단결로 흐르게 하는 동시에 고이는 것까지 풀어냈다. “큰 품을 이”루게 하는 “그늘의 힘” 덕분이었고, 그동안 “거둬들인 수만 평 그늘”(「그늘나무」)의 넉넉한 품 때문이었다. 이 땅의 모든 그늘 종족에게 바치는 헌사가 여기에 있다.
그늘도 때론 나무의 종족입니다
두 개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야릇한 밤을 가진 저녁
그늘의 힘으로 나무의 자세는 큰 품을 이룹니다
나무 이상의 포즈를 취할 수 없는 그늘은
아름다운 불구의 자유
마주 보는 만큼이 허용된 거리지만
알고 보면 나무를 키우는 것은 그늘
거센 바람을 견디게 하는 뿌리의 배후입니다
나무에게 하늘은 열 마지기 아름다운 목화밭
그늘 또한 나무가 경작해온 지상의 경작지
여름이면 거둬들인 수만 평 그늘로
평상 가득 고단한 사람들을 들이고도 남습니다
가끔, 나무는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바람을 훔치고
그늘은 나무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햇빛을 숨기지만
종내에는 서로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들어서는
그늘은 나무의 집
등이 휘도록 한자리에서 계절을 지켜온 아버지 그늘나무
세상 모든 틈을 돌아 나온 바람을 맞으며
어긋난 뼈들을 맞추고 있습니다
* 정자나무의 다른 이름.
‒「그늘나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