與猶堂吟(여유당을읊다)
與兮涉川猶畏人-조심하기를 내를 건너듯, 삼가기를 옆사람을 두려워하듯.
世路崎嶇知其眞-세상살이 험난함을 그 진실로 아네.
一十八載江上謫-열여덟 해 동안 강진(江上)에서 귀양살이 하며,
萬卷經綸筆下新-만 권의 경륜(經綸)이 붓 아래 새로워졌네.
民生疾苦心所繫-백성의 괴로움과 고통에 마음이 매여,
學術大成繼後學-학문을 크게 이루어 후학들이 계승했네.
茶山舊宅今猶在-다산의 옛집이 지금도 남아 있으니,
與猶精神櫟社靑-여유당의 정신은 역사에 길이 푸르네.
농월(弄月)
세상을 “여(與)” “유(猶)”처럼 살면 안전하리라!!
먼저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15장 불영(不盈)을 읽어본다
※불영(不盈)-넘치지 않는다. 과하게 욕심내지 않는다.
古之善爲士者 微妙玄通 深不可識
夫唯不可識 故强爲之容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儼兮其若容 渙兮若氷之將釋 敦兮其若樸 曠兮其若谷
混兮其若濁 孰能濁以靜之徐淸 孰能安以久動之徐生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도(道)를 몸소 체험하여 알게 된 훌륭한 옛사람은
미묘(微妙)하고 그윽이 깨달았으나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규정지을 수 없게 뚜렷하지 않고 야릇하다.
아름답고 묘하다.
드러난 모습을 가지고 억지로 표현을 하라 한다면
겨울에 강을 건너듯 머뭇거리고
사방의 이웃을 대하듯 주저하고
손님처럼 어려워하고
얼음이 녹으려는 듯 풀어지며
다듬지 않은 통나무처럼 소박하고
계곡물처럼 트이고 흙탕물처럼 탁하다.
누가 탁한 것을 고요히 하여 점점 맑아지게 할 수 있는가
누가 능히 가만히 있던 것을 움직여 점점 생동하게 할 수 있는가
도(道)를 체험하여 알게 된 사람은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채워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滅亡)하지 않고 영원히 새로워진다.
▶여유당(與猶堂) 당호(堂號)의 뜻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生家)인 여유당(與猶堂)은 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옛날에는 이곳을 소내(苕川) 또는 두릉(杜陵)이라고 했다.
다산의 5대조부터 살던 곳이다.
※소내(苕川)-가마우지가 서식하는 강
※두릉(杜陵)-팥배나무가 있는 언덕
당호(堂號)인 “여유당(與猶堂)”은 지극히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위에 있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15장에 나오는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글에서 따온 것이다.
필자도 약 40여 년 전에 여유당(與猶堂)을 답사했을 때 마침 방문객을 위한
몇 자 글을 쓸 붓과 종이가 있어서 아래의 글을 남겼다
與猶堂 日常之心中持之(여유당 일상지심중지지)
“여유당(與猶堂)을 일상(日常)에 마음에 지니면서”
▷여(與)의미-여(與)는 “신중하다, 머뭇거리다, 조심하다의 뜻이다
위의 도덕경 원문에 “여혜(與兮) 약동섭천(若冬涉川)” 이라는 구절로,
“신중하기를 마치 겨울에 강을 건너는 듯이 한다”는 의미다.
겨울에 냇물을 건널 때 살얼음이 깨질까 극도로 조심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비유한다.
일부 해석에서는 “여(與)”를 “큰 코끼리”를 뜻하거나 “의심이 많은 짐승”의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유(猶)의미-삼가하다, 두려워하다, 경계하다의 뜻으로 쓰였다.
위의 도덕경 원문에 “유혜(猶兮) 약외사린(若畏四鄰)” 이라는 구절로,
“삼가 조심하기를 마치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듯이 한다”는 의미다.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엿보지 않을까 염려하며 경계하고
몸을 사리는 태도를 비유다.
“유(猶)”는 본래 짐승을 의미한다
겁이 많아 무슨 소리만 나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서 내려오지도
못하는 짐승, 또는 “원숭이”를 뜻하는 글자다.
여기서는 그 짐승처럼 극도로 겁내고 경계하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정치적 탄압과 시련 속에서 자신의 경솔함과 두려워할 줄
모르는 성품이 화를 불렀다고 생각하고, 다시는 경거망동하지 않겠다는 조심과
경계의 뜻을 담아 이 “여유당(與猶堂)”을 당호(堂號)로 삼았다.
여유당(與猶堂)의 전체적 의미는
“겨울에 코끼리가 살얼음 밟듯 신중하게 행동하고,
사방의 가까운 사람을 두려워하고 항상 조심하며 경계하는 집”
이라는 뜻이다.
필자는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의 유적지를 모두 답사하였다
“강진 사의재(康津 四宜齋)”는 전남 강진읍 동성리에 있다.
다산 정약용 산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갔을 때 최초로 머물렀던 조선시대
주막집이다.
강진사람들이 죄인(罪人) 다산을 기피하였으나 유일하게 다산의 사정을 알게 된
주막 노파가 호의를 베풀어 이 곳 주막에 방을 하나 내어줘 머물도록 주선해주었고
다산은 이곳에서 4년 동안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지내왔다.
다산은 자신을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내 병은 내가 알고 있다. 용기는 있지만 지모(智謀)가 없으며,
선(善)을 좋아하지만 가릴 줄을 모르며, 마음에 따라 곧바로 행하고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만 둘 수 있는 일이지만 진실로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면
그만두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았지만 진실로 마음에 걸리거나 통쾌하지 않으면
반드시 그만두지 않았다
그래서 어려서는 일찍이 세속을 초월함(方外-천주교를 가리킴)에 치달리면서도
의심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는 과거공부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않았다.
서른 살이 넘어서는 지난 일에 대한 후회를 깊이 진술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善)을 좋아하여 싫어할 줄을 몰랐으나 홀로 비방을 많이 받았다.
아! 이것 또한 운명인가?
성품이 이에 있으니 어찌 감히 운명이라고 말하겠는가?”
(여유당기(與猶堂記)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이렇게 두렵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여(與)와 유(猶)라는 글자를 끌어다가
당호를 삼았으니, 그가 당시의 조선 사회를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瞋學游家戒(진학유가계)”는
뒷날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아들 정학유(丁學游)에게 훈계하는 말속에
말과 행동을 의심받지 않도록 간곡하게 당부하는 글이다.
숨김이 없게 하여 근신함으로써만 하늘을 섬기고 집안을 보존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천하의 재앙과 우환이나 하늘을 들어 올리고 땅을 뒤흔들며 자신을 죽이고
가문을 뒤엎는 죄악은 모두 비밀리에 하는 일에서 생기는 것이니
일을 할 때와 말을 할 때에는 부디 깊이 성찰해야 한다.
(다산(茶山)의 진학유가계(瞋學游家戒) 기록)
“어떤 일을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싶으면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고,
남이 듣지 못하게 하고 싶으면
말하지 않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 두 문장을 평생 몸에 지니고 왼다면 위로 하늘을 섬길 수 있고
아래로 집안을 보존할 수 있다고 했다.
말과 행동은 항상 조심해야 하며, 의심을 살 만한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편지 한 장을 쓸 때도,
“이 편지가 번화가에 떨어져 원수에게 읽혀도 죄를 입지 않게 하소서”라는
마음으로 써야 한다.
수백 년 뒤에도 비난받지 않도록, 항상 되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
집안에 있는 여러 종류의 문서도 열흘마다 점검하여, 문제가 될 만한 것은
태우거나 없애야 한다.
이 표현은 단순한 훈계가 아니라, 위태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자기 성찰과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이 담긴 유훈이라 할 수 있다.
다산의 철학과 삶의 태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문구다.
복잡한 IT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