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7/ 호남인의 혼 찾기
부제목 : 약무호남 시무고려(若無湖南 是無高麗)인 것을
글/나천수
나주를 중심으로 호남의 세력과 호남의 땅이 고려 개국의 산실이라 하였다.
호남인의 혼과 호남 땅이 고려라는 나라를 세우는 산파역을 했기 때문이다.
궁예의 휘하 장군 왕건이 통산 4번에 걸쳐 나주 지역에 출진하면서 통산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호남지역에서 왕업을 닦아 호남 세력의 지지로 드디어 왕으로 추대 된 것이다.
호족이던 귀족이던 간에 왕재가 되어 왕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시운이 있어야 하고, 힘이 되어줄
사람과의 만남이라 하겠다 신라 말에 지방마다 성주가 대두하여 신라에 대항하는 세력이 나타났으니 견훤과 궁예이었다.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나라를 세웠으므로 후삼국이라 한다. 견훤은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고, 궁예도 901년에 후고구려(태봉국)를 건립하였다. 왕건은 그의 나이 20세에 궁예에 귀부하였으며, 42세에
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기까지 궁예 밑에서 20여 년 동안 장군 또는 시중(侍中/오늘날 총리 격)에 있었다.
왕건은 궁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야심과 권력욕은 그의 나이 30세에 꾸었다는 꿈에서 잘 알 수 있다. 그 당시
궁예의 명에 따라 나주에 주둔하면서 나주 일대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왕건이 나주에서 주둔하면서 삼한 통일의 꿈을 꾼 것이다.
왕건을 역사의 승자로 만들 수 있었던 시운은 무엇인가.
궁예의 폭정이었다. 궁예가 처음부터 포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의 승자가 패자를 왜곡 시켰는지 모른다.
누차의 전승에 교만해지고 누구도 궁예의 분부를 거슬리지 못했으며, 설령 측근이라도 승려건 장졸이건 용서 없이 극형에
처해 참하는 것이다. 날로 포악해진 그는 그 처자 강씨와 두 아들까지 참살한다. 민심은 점점 멀어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 왕건 지지파가 늘어 난지도 모른다. 그것이 두 번째의 운이었다.
특히 나주지역의 호족 오다련의 딸을 만난 것과 장인 오다련, 곡성의 신숭겸, 순천의 박영규, 영암의
최지몽, 광산의 김길 등 호남세력과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 충신은 고려 개국의 초석이 된 것이다.
왕건이 나주에 주둔하던 시절 오씨 부인을 만나는 로맨스가 동국여지승람 나주목편이나 나주읍지 흥룡사 편에 소개되어 있다.
내용인즉, 나주의 목포나루(현 나주시청 부근) 인근에 살았던 호족 오다련(吳多憐)의 딸이 꿈을 꾸었는데,
바다에서 용이 나와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태봉국의 수군장 왕건이 나주에 출진하여
주둔하던 중 어느 날 목포 상류에 오색구름이 서려있어 찾아가보니 샘가에서 미모의 처녀가 베를 빨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왕건의 숨결이 거침을 보고 급하게 마시면 체하기 쉽다면서 버들잎을 물바가지에 띄워서 권하였다.
왕건은 미인이 기지까지 겸비하여 처녀의 아버지를 만나 딸을 달라고 요구하자, 며칠 전의 딸의 꿈을 생각하고 딸을 왕건에게 보낸다.
이 샘은 후에 완사천(浣紗泉)으로 명명되고 오씨처녀는 왕건 사이에 911년 큰아들 무(武)를 낳았으며, 이 아들이 고려 제2대왕 혜종이다.
왕건이 시중 벼슬하면서 호남지역으로 출진하지 않았다면 삼한통일의 꿈을 꾸었겠는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은 거의 죽은 목숨인데 곡성의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옷을 바꾸어 입고
왕건을 피신시키면서 본인은 왕건으로 위장 전사하지 않았다면 고려가 있었겠는가.
이순신의 말처럼 약무호남 시무고려(若無湖南 是無高麗)인 것을...........
첫댓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거의 죽어가는 왕건의 목숨을 신숭겸 장군이 왕건과 옷을 바꿔입고 왕건을 피신시키면서 본인은 왕건으로 위장 전사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전라도 곡성 사람인 것은 몰랐네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