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식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자기 고향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
딸을 끔찍이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일러 "딸 바보"라고....
고향을 끔찍히 사랑하는 사람은 "고향 바보" ?
우리 친구님들 중에서도 고향 "고성 바보"가 있지요.
서울 박 모회장님. 또 최 모 사장님.
왜냐면 ?
고성이라면 끔뻑 죽는 친구님들이니까 ,,,,ㅎㅎㅎㅎㅎㅎㅎㅎ
또 이런 "고성 바보" 분도 계시네요.
김 열규 교수님 (1932~2013.) 입니다.
오래 전에 고성 남산에 갔을 때 문학동산이라고 꾸며 놓은 곳에
많은 시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인 교수님의 시비(詩碑)입니다.(위 사진)
고성읍 덕선리에서 태어나 쭈~욱 서울쪽 대학 강단에 계시다
말년에 낙향하시어 하일면 송천리(송내) 자란만이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좌이산 자락에 계시다 작고하셨다는데......
(가 보지는 못했지만, 여기는 마산 張某 친구 고향마을인 듯 한데요 ?)
그 분의 낙향후 활동을 소개하는 글이 있기에 퍼 와서 소개합니다.
교수님의 저서 "빈 손으로 돌아와도 좋다" 라는 책.
서점에 들릴 일 있을때 한 권 업어 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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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나온 책 한 권을 읽는다.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열규 교수의 <빈손으로 돌아와도 좋다>라는 귀향기다.
91년 봄 회갑을 한 해 앞두고 40여 년간 살았던 서울과 30여 년간 몸담았던 대학을 홀연히 떠나
어릴 때 자란 고향땅에 정착한 뒤 아직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편지 쓰듯 쓴 글들의 모음이다.
이 책 속에는 영영 잃어버릴 뻔한 고향의 산천에 대한 절절한 애정과
너무도 잘했다 싶은 귀향의 뿌듯한 환희가 가득 들어 있다.
고향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으면서도
귀향할 줄 모름으로 버리고 마는 아까운 행복을 혼자 즐기기에 너무 과분해 하는 몸짓 소리가 들린다.
부러움 없이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는 사람뿐일 것이다.
김교수가 낙향해 자리 잡은 곳은 경남 고성군 하일면 송천리의 갯마을이다.
그는 매일 새벽 5시 반쯤 책상 앞에 앉는다.
책은 펴나마나 하고 휜히 트인 창 너머로 해돋이를 맞기 위해서다.
그래서 “어느 겨를엔가 책상 앞에 앉는다는 게 책 앞에 앉기보다는 바다 앞에 앉는 것이 되고 말았다”
글을 쓰다가 막히면 마당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붓방아 대신 호미방아”를 찧고
이따금 좌이산(左耳山) 숲에서 난을 캐거나 동화리의 물깃에서 돌을 줍기도 한다.
김교수는 이 포근한 귀소(歸巢)를 ‘과원(果園)의 가을맞이 같은 노년의 뜨락’이라 했다.
그 뜨락을 찾아가 본다
책이 안내한 대로,
“고성읍에서 우악스런 감티재를 넘고 또다시 기나긴 소슬한 장치를 넘어서 홀연 세상이 사라져버린 끝,
오직 모양한 자란만 물마루만이 트인 곳”에 김교수의 하얀 집이 있다.
20여 호 되는 부락의 맨 위쪽이다. 앞뜰 뒤뜰에 귀한 나무와 묘한 돌들이 올망졸망 늘어섰다.
모두 서울서 주인을 따라 이민 온 종자(從者)들이자.
아담한 2층짜리 건물은 한교수의 60평 온축(蘊蓄)을 담고 장고(藏庫)로서는 좁아 보인다.
위층에 오르면 동남쪽으로 난 유리창 틀 안으로 책에서 그토록 자랑하던 자란만이 가득 찬다.
길게 누운 자란만 너머로 여러 섬들이 겹겹이 만을 메웠다.
겨울 햇볕이 여기 다 모였는지 방안은 온실처럼 따뜻하다.
뒷밭에서 딴 누렁호박들이 탁자 옆에 쌓였고 수확한 유자가 찻잔에 담겨 나온다.
김교수의 낙향은 호사도 아니고 안일도 아니다.
창밖으로 장려한 일출을 바라보며 브람스의 교향곡 제1번을 듣는 사치는
출향관(出鄕關)하여 입신하고 돌아온 향인에 대한 고향의 답례다.
활동무대에서의 퇴장일 수도 없다.
"이제 나는 원점에서 돌아와 비로소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것은 다시는 더없을 최후의 시작이 아니던가“
김교수는 “최후의 시작”을 시작했다.
차를 몰고 2시간 거리인 김해의 인제대학에 출강을 한다. 지방대학에의 봉사다.
읍에 고성문화사랑모임을 만들었다.
서예인, 약국주인, 돌담 쌓는 사람 등 각종 직업인이 모인 이 모임이 매달 문화강좌를 연다.
주부 등 각층의 주민들이 수강을 한다.
강의는 문학 뿐 아니라 건축, 농사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집에서 바라다 보이는 자란도를 조그만 문화기지로 만들 생각이다.
10여 가구가 사는 이 섬에 교실 3개의 초등학교 분교가 있어서
여기서 매년 무형문화재인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등 탈춤의 심포지엄을 열겠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본시 민속학의 권위자라 어쩌면 자란도는 우리나라 탈춤 연구의 본산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또 고향의 자연계에도 관심이 많다.
곤충이나 새의 분포 등을 조사하여 문화자연지도를 제작하고 싶어 한다.
김교수의 이런 귀향정신에 감화되어,
이미 서울의 어느 사회학교수와 인근 삼천포의 음악가, 마산의 화가 등이 송천리에 이사 올 터를 잡아 놓았다.
이렇게 되면 자란만의 고즈녁한 포구는 쩌렁쩌렁한 문화인촌으로 고명해질 것이다.
한 문인학자의 귀향이 이렇게 지역문화의 구조를 바꾸어 놓는다.
한 문화인의 귀향이라기 보다 한 문화의 귀향이다.
그것이 구심점이 되어 문화적 위성을 이룬다.
이런 위성들이 전국에 산재할 때 우리나라는 문화대국이 된다.
김교수의 말대로 돌아오는 것은 만선(滿船)의 귀향(歸鄕)이다.
지적(知的)축재를 그를 키운 고향에 환원 시켜야 한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는,
“돌아가자. 전원이 장차 묵으려 하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로 시작된다.
황폐한 것이 전원의 논밭뿐이랴. 지금 우리가 경작해야 할 것은 시골의 문화적 황무지다.
김교수가 귀향을 재촉하게 된 것은,
정년을 넘긴 존경할 만한 노교수 한 분이 서울 거리의 버스정류장에서 허둥대는 것을 보고서 였다고 한다.
"길거리의 지식인들아, 고향으로 돌아가자. 가서 향토문화를 일구자."
김교수의 귀향은 이 외침의 선창이다.
(1993. 12. 13. 한국일보 칼럼 글쓴이 김 성우 선생님)
첫댓글 김열규 교수.. 1980년대 서울에 있을때 종친회에서 옛날에 자주 뵙던 분이다..우리 집안의 종친이지 나와는 같은 김녕김씨 충의공파로 같은 규자 항열이지..노후에 고향에 귀향하여 고성 문학인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지. 인제대학 강의도 나가고..
김교수님 존함은 정 정배 친구의 문담집에서 접한 것 같네.
우리의 꿈도 귀향이 아니든가? 현실에 안주해서 결행을 못하는 미련때문에 차마 떨치지 못하니...
가보면 "참 좋은 곳에 안착하셨구나" 라는 생각이 들지., 정말 경치가 좋은 곳이야 송천리 회룡부락에 저택이 있다네.,
기회가 되면 안내 해 드리지요. 희망자들은 줄을 서시오~~~~
가보고싶다.
고향사랑이 대단하신 분이네요.좀 더 오래 사셨으면 자란만에 문인과 예술가가 몰려 왔을 건데 안타갑네요.
선동보단 역시 바다가 보이는 바닷가가 좋은가 봐.
오랜간만 입니다.
년초에 어머니 제우로 서울 .대전다녀 왔슴다.
고향은 언제나 포근 하잖아요.
외지에서 학교 다닐때 고성가는 버스만 봐도 가슴이 두근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