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연습이 끝날 즈음이 되자 새벽의 찬 공기가 뼈를 에일듯 하였다. 엘리아는 숄을 몸쪽으로 바싹 끌어당기었다. 샤론은 언제나와 같이 24시간 베로니카 극장앞에 대기해있던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엘리아, 조심히 들어가. 새벽길은 여자 혼자선 너무 위험하니까. 게다가 베리안 거리라면 더더욱..."
"걱정마, 내일 연습이나 늦지 않게 일찍 자도록해"
엘리아는 조금이라도 빨리 찬바람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샤론의 마차가 먼저 출발하고 엘리아도 이제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 순간, 마차가 잠시 서더니, 샤론이 엘리아를 향해 오고있었다.
"샤론?"
"아무래도 여자 혼자는 너무 위험해. 그치?"
샤론의 눈이 엘리아의 어깨너머를 훑는가 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밝게 미소지었다. 엘리아도 고개를 돌려 샤론의 시선에 닿는 누군가를 보는 순간 표정이 확 일그러질 수 밖에 없었다.
"반!"
오, 젠장. 어깨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반이 샤론의 목소리에 기쁜듯 뛰어왔다.
"반, 부탁이 있어. 들어 줄 수 있어?"
"니가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지"
웩, 반이 자연스럽게 샤론의 손등에 키스하고 그윽한 시선으로 샤론을 내려다 보았다.
"밤이 늦었는데, 엘리아가 혼자 집으로 가야할 것 같아. 알다시피 베리안 거리는 여자 혼자다니기엔 위험한 곳이잖아? 그래서 반이 엘리아와 함께 가줬으면 좋겠어. 들어줄꺼지?"
"아아, 샤론! 너는 어쩌면 외모만큼이나 마음씨도 훌륭한거니! 당연하지, 집까지 안전하게 에스코트 하겠어. 물론, 대상이 엘리아가 아니라 너였다면 훨씬 기뻤겠지만"
엘리아는 낮게 코웃음을 쳤다. 반은 이번 공연에서 샤론의 파트너이기도 하며 남자주인공이였다. 자신보다 입단한지는 2년정도가 늦었지만, 결과적으로 더욱더 흥한 쪽은 반이였다. 반과 처음만났던 10살때 부터 지금까지 항상 샤론에 대한 찬사를 입에서 때놓지 않았으며, 8년째 열혈한 짝사랑 중이다. 항상 엘리아 옆에서 샤론의 이야기로 쫑알거리는 반의 얼굴에 주먹을 가하기도 수차례였다. 한참 시간이 지나니 엘리아에게 노골적으로 샤론의 이야기를 하는 일은 적어졌지만, 버릇이라는게 그렇게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였다.
"샤론, 반.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난 일단, 집 정도도 혼자서 못찾아가는 어린애도 아닐 뿐더러, 억지로 집까지 에스코트 해 주는 엉터리 신사는 필요없거든"
"엘리아! 하지만…"
"반, 그러지 말고. 너도 나 말고 샤론을 집까지 에스코트 해주는 건 어때?"
반이 슬쩍 샤론의 눈치를 보았다. 밤이 어두워 그의 섬세한 면 까지는 관찰하기 어려웠지만, 아마도 그의 귀는 붉게 달아올라 있었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엘리아! 나는 반의 에스코트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잖아. 프레드릭씨와 함께인걸?"
"샤론,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그렇다면 뭔데? 반이 나를 집까지 에스코트 해줘야 할 다른 이유라도 있다는 거야?"
"너, 알고서 그러는거니? 아니면 모르는척 하는거니?"
"엘리아, 난 정말 모르겠어. 도저히 이해가 안가"
엘리아는 자신이 괜한 말을 꺼냈다며 후회하고는 특별한 작별인사 없이 등을 돌려 걸었다. 반의 표정이 어떠할지 상상이 간다. 그리고 뒤에서 샤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리아! 남에게 필요없는 호의를 베풀게 하는 것은 나쁜짓이야"
"내가 달의 마수에 흠뻑 취해 실언을 했나 보구나"
그렇다면 너는 나쁜 아이야 샤론. 언제나 반과 샤론은 이런식이였다. 극단 사람들 중 반이 샤론을 짝사랑 한다는 것을 눈치 못 챈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대놓고 구애를 하는데에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한사람. 당사자 샤론은 달랐다. 그녀는 정말 순수하게 모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항상 그녀는 그녀가 생각한 데로 믿어버린다. 그녀의 최악의 단점이자. 무기가 되는 성격이였다.
"브라니안 드 그레이스 머저리 얼빠진 녀석"
"이봐, 그건 너무 심하잖아"
"반?"
어느새 엘리아의 뒤로 바짝 다가와 있는 반에의해 엘리나는 흠칫 놀랐다.
"난 엉터리 신사가 아니라고, 게다가 머저리도 얼빠진 녀석도 아니야"
"그렇다면 너가 진짜 왕자님이라도 된다는 소리야?"
"흐음- 청아하고 순결한 유리조각에 마음을 빼앗긴 방황하는 까마귀 라고 해두지"
"그래? 내가 보기엔 굶주림 앞에서 쉴 새 없이 손을 비벼대는 파리면 충분한 것 같은데?"
"계집애가 말을 해도 꼭..."
엘리아가 흥하는 소리를 내며 걸음을 빨리했다. 바람이 점점 더 차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공연을 앞두고 감기에 걸려선 안될 일이였다. 특히 관객이 황제폐하라면 더더욱 이였다. '황실'에 관련된 물품이랑 물품들은 다 사다드리고 따라하기 좋아하며 사족을 못쓰는 귀족들이 태반이였다. 따라서, 황제의 평이 어떠냐에 따라 공연이 흥할수도 아니면 망할수도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황제폐하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기 위하여 많은 귀족들이 공연의 관객으로 올 것이다. 사실, 황제폐하보다 그 콩고물에 관심이 가는 배우들도 다수였다.
"그리고 반, 아까 말했듯이. 난 에스코트 같은거 전혀 필요없으니까 이만 돌아가"
"뭐? 이왕 온 김에 데려다줄께"
"너가 날 데려다 주느니라 감기라도 걸린다면 셀마여단장님의 잔소리가 앞으로 5년은 더 길어질꺼야. 황제폐하께서 오시는 공연을 앞에두고 남자주인공을 사지불능으로 만든 개념없는 여배우 소리를 듣겠지"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잖아? 게다가 감기에 안걸리면 더더욱 좋은 일이고"
샤론은 장식이니? 엘리아는 귀찮다는 듯 반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여기서 실랑이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이득이 되지 못한다. 엘리아가 수그러 들거나, 반이 그래야 하는데 .. 일단 엘리아는 자신 절대 수그러 들기는 싫었다. 그렇다면 반이 돌아가는 방법이 가장 적절했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나 걱정되서 하는 말이니까 빨리 돌아가"
"하여간, 말을 해도 좀 예쁘게 하면 안돼냐?"
"어째서?"
반은 쯧 하고 혀차는 소리를 내더니 엘리아가 등을 미는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몇 걸음 떼지 않아서 짧은 작별인사와 함께 엘리아 또한 등을 돌려 걸었다.
'펄럭'
반이 어느새 다가와 자신이 입고있던 갈색코트를 벗어서 엘리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내 몸은 너와 함께하지 못하지만, 이녀석이 찬 바람정도는 지켜줄거다"
엘리아는 자신의 몸위로 둘러진 코트를 바라보다가, 어느새 멀리 떨어져 걷고있는 반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하나도 안멋져, 엉터리 신사님"
어느새 엘리아의 발길이 베리안 거리로 들어섰다. 간간히 켜져있던 가로등 불빛이 사라지고, 몇년 전 부터 수리를 하지 않고 제 구실을 못하는 낡은 가로등 만이 즐비해 있었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도둑고양이들이 사람이 다가오는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 곳에 온 몸을 파묻고 있었으며, 때 늦은 새벽인데도 유리깨지는 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함소리가 거리를 가득메웠다.
엘리아는 그럼에도, 밀려오는 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목구멍 위로 올라오는 하품을 내뱉었다. 그 순간이였다. 새벽의 서늘한 찬 바람이 어느새 불쾌하기만 한 뜨거운 바람으로 바뀐것은...
'파바바밧!'
엘리아는 막힘 없이 걸음을 내뱉던 다리를 우뚝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몇 년째 빛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가로등 들이 베리안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환한 빛을 뿜으며 일제히 고개를 나란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리아는 음산한 어둠보다 더욱더 두렵게만 느껴지는 가로등 불빛을 쳐다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빨리 하였다.
'솨아아-'
또 다시 바람이 불었다. 5월의 봄날에 햇볕을 품은 산들바람과는 질적으로 다른 바람이였다. 잠 속으로 빠져 들기전에 들었던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생각나게 하는 불안한 바람이였고, 원망과 탐욕 그리고 복수를 품은 공격적인 바람이였다.
*짜투리 잡담*
으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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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엘리아랑 카힐은 곧 만납니다! 감사합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