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황녀 르네시아
재수 지지리 없게도 박살내고만 30골드짜리 도자기를 실용 마법으로 천조각 기워내듯 꼼꼼히 붙이고 앉아있기를 1시간째.
어째선지 도자기에서 눈만 뗄새라면 해리나의 과한 쓰담쓰담으로 인해 부어오른 혹 세덩어리가 욱신거렸다.
그렇게 한눈도 못팔고 초극도의 정신력 집중을 발휘하며 붙인 성과가 있었는지, 언제 깨졌냐는 듯이 본래의 매끄러운 선을 되찾은 도자기를 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나였다.
"오옷!! 드디어 완성이다!! 해리나, 다 붙였어요!"
"사고만 치는게 재주는 좋아가지고."
깨지기 전과 별 다름없이 아주 말짱해보이는 금색 도자기를 스윽 훑어보더니,
장장 한시간만의 결과물이 꽤나 만족스러운지 이제서야 미간의 주름을 펴며 한시름 놓은듯 입을 여는 해리나였다.
"내려. 도착했어."
"네?"
"헤브너 제국에 도착했다고."
내리라는 해리나의 말에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녀가 나를 촌뜨기 보듯 깔아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중급 땅의 정령을 이용한 마차이기 때문에 보통은 열흘이 족히 걸리는 길을 2시간만에 온거야."
"그거...정령들 노동력 착취...아,아닙니다."
"황녀씩이나 되서 쪼잔하게 말 몇마리로 전용 마차를 몰아서야 쓰겠어?"
"...시얀은 그랬는데요."
"걔가 은근 짠놈이야. 겉만 금색 번쩍번쩍 부티나 보이지 백성들 다 퍼주고 가진거 하나 없다니까."
"해리나 처음 만난날, 말씀대로 그 쪼잔한 말 몇마리가 모는 마차로 편히 갈 수 있었던 길을 해리나가 굳이 처분하고 걸어가자고 했...아,아닙니다."
"그때는 신분을 숨겨야할 때였고! 아무튼, 시얀은 생긴거랑은 달리 쫌팽이라니까!"
"그,그래도 덕분에 신망은 두텁잖아요."
"쥐뿔도 없는 황제가 퍽이나 위엄이 살겠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나름 인정은 하는 눈치로, 마음에 안든다며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려있는 해리나다. 그녀가 마차에서 새침하게 폴짝 뛰어내리고 그 뒤를 따라 노아와 함께 밖으로 나오자 시선이 닿는 곳에 중급 땅의 정령들이 있었다. 물, 불, 바람의 상급 정령들과 초자연의 하급 정령들은 실컷 봤지만서도, 중급 땅의 정령들은 처음인지라 자꾸만 가는 시선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호기심에 끌려 땅속에 몸이 반쯤 파묻힌 채로 서로 장난치듯 투닥투닥하는 녀석들에게 말을 걸어본다.
"내가 머리카락 줄게. 나랑 계약 안할래?"
내 물음에 잠시 하던 놀이를 멈추고 굉장히 의아스런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던 트윗티들이
작은 눈구멍을 몇번 꿈뻑꿈뻑하더니 내 시선을 피해 땅속으로 쏙 숨어버린다.
지,지금 얘네 나 피한거 맞지? 나 피함 당한거 맞지?!
분명 상급 녀석들때에는 내 머리카락이면 충분하다고 그랬었는데. 역시 그건 단순히 그 녀석들의 악취미였던 것인가.
머리카락 얘기에 나를 무슨 정신병 환자 혹은 질나쁜 변태보듯 하며 땅 속으로 숨어버리는 트윗티들의 반응에 석상처럼 굳어버린 나였다.
"크흡...!!! 지금 뭐라고? 율리안 님."
"시끄러. 아무것도 아냐."
"크크크크큭...! 누가 그래? 머리카락 달라고. 푸읍."
그 때. 뒷쪽에서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과 함께 터지기 일보직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제피론이 머리카락 변태발언을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터지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있는 듯한 제피론의 표정이 아주 가관인걸 보니, 내가 상급 세놈들에게 단단히 낚이긴 낚였나보다.
"설마. 율리안 님, 걔네 만난거야?"
"걔네라니...?"
"상급 정령들 중에 셋이 잘 몰려다니는 정령계 '아이돌'이라는 녀석들."
"뭐? 누가 뭐라고?"
그걸 말할테면, 돌아이 혹은 변태겠지.
나는 저쪽 세계에서만 쓰는 줄 알았던 '아이돌'이라는 익숙한 단어에 놀라며,
이 헛소리의 진상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의문이 잔뜩 담긴 표정으로 제피론을 올려다보았다.
"그 세녀석 말이야."
"아, 맞다!"
"맞다니 뭐가?"
"그런게 있어."
제피론의 '세녀석' 거론으로 인해 문득 떠오른 사실이 내 입가를 간지럽힌다.
울프람을 나오던 마지막 날까지도 되먹지 못한 버릇을 몸안사리고 펼쳐보이다 내 심기를 상하게 했던 녀석들이 있긴 있었다지.
그 결과, 방안에서 한발자국도 나오지 못하도록 쳐놓은 나의 삼중 결계막에 갇히게된 녀석들.
지금쯤 꼼짝없이 내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며 울부짖고 있을 불쌍한 변태 정령 셋이 머릿속에 떠오른 나는
제피론의 물음에 아무것도 아니라며 입꼬리를 한껏 귀에 걸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르네시아."
"오라버니...!"
제피아르 제국의 단 하나뿐인 황녀의 침실로 긴 황금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다급히 문을 열고 들어간 그가,
안쪽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사랑스러운 동생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그 이름을 불렀다.
르네시아 알 드 제피아르.
제피아르 황제 부부가 남겨놓고 간 시얀의 하나뿐인 혈육이었다.
뛰어들어오는 오라버니의 변함없는 모습에 얼굴색이 환해지는 그녀였다.
"네가 왔다는 소리를 전해듣자마자 황급히 달려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일이라니요. 제가 꼭 못 올 곳에 왔다는 듯한 말씀이세요."
"그런게 아니야. 놀라서 그런다."
"어머, 오라버니께서도 놀라는 일이 있으세요?"
"너의 안위가 걸린 문제라면 당연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오라버니를 마주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짓는 르네시아.
다독이듯 가져간 오라버니의 손을 곱고 작은 두손으로 살포시 감싸는 르네시아를 바라보다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시얀이었다. 그 상냥함이 베어나오는 따뜻한 손길이 기분 좋은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그리며 르네시아가 말했다.
"오라버니께서 울프람에 입학하셨다는 소식 들었어요."
"그 망할 소식의 근원지는 해리나냐?"
"오라버니도 참. 아무튼 저는 너무 기뻐요. 그렇게 부탁을 해도 마다하시더니 무슨 바람이 부신거에요."
"그럴 사정이 생겼다."
말은 퉁명스럽게 했지만 그의 부드러워진 눈가를 몰라볼 그녀가 아니었다.
르네시아는 시얀의 볼을 자신의 작은 손으로 감싸며 웃어보였다.
"좋은 얼굴이 되었어요, 오라버니. 누군지 몰라도 살짝 질투가 나네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내겐 네가 전부야, 르네시아."
"저를 속이시려구요? 저 르네시아에요. 오라버니 동생이요."
그녀의 말에 시얀이 얼굴을 찌푸리며 뭐라 대꾸 할 말을 찾았지만 딱히 좋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시얀의 모습에 르네시아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속이려는게 아니야. 나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제국의 황제인 내가 자꾸 냉정을 찾지 못하게 돼."
"오라버니께도 그런 분이 나타나신 거군요. 저 오히려 안심이 되는걸요!"
시얀은 오랜만에 또래 아이들처럼 밝게 웃는 르네시아를 보며, 녹지 않는 새하얀 눈이 흩날리던 나무 밑에서 태평한 웃음을 입가에 머금고 기분좋게 잠들어 있던 그녀를 떠올렸다.
- 두근.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껏 함께 있을때도 요동치않던 가슴이.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일까. 생각하는 것만으로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어디 아프세요?"
그의 붉어진 낯빛에 걱정스러움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손을 뻗은 르네시아였지만,
괜찮다며 동생의 가녀린 손을 자신의 커다란 손으로 잡아 끌어내린 시얀이었다.
- 똑똑.
"누구냐."
"폐하, 알프레도 입니다."
"들어와."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리던 알프레도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테일러 학사장님께서 알현을 청하셨습니다."
"내 방으로 모셔라. 나도 곧 그리 가겠다."
"예, 폐하."
알프레도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문을 닫고 나가자, 시얀이 그가 나간 문쪽을 잠시 응시하다 르네시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헤브너 별궁에 도로 데려다주마. 채비하고 기다리고 있거라."
"오라버니께서 데려다 주신다고요?"
"그래. 나도 마침 그쪽에 볼일이 있어서 말이다."
마지막 말을 살짝 흐리며 다시 얼굴이 붉어지는 시얀이었고,
그 모습을 보며 소리없이 웃던 르네시아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오라버니. 꼭 데려다 주셔야해요."
***
"아! 오셨습니까, 폐하."
"무슨 일이십니까. 스승님."
"울프람에서는 별거 없으셨는지요."
"말그대로 별거 없더군요. 울프람이라 해도 허울좋은 귀족가의 자식들이 판을 치는 쓰레기장입니다."
'특히 그 개자식' 하고 시얀이 중얼거렸지만, 토일러 박사는 듣지 못한것인지 못 들은척을 하는 것인지 그저 쓴 웃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율리안 아가씨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까?"
"여전히 사고를 몰고다니는 녀석이라 애를 좀 먹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율리안 이야기에 테일러의 안색이 갑작스럽게 어두워진 것을 느낀 시얀이 의문 서린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율리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아. 아닙니다. 그저..."
"말씀해 보세요, 스승님."
시얀의 말투에서 조급함을 읽은 테일러 학사는 잠시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하더니, 곧 결심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비장한 얼굴로 품 안에서 색이 바래고 닳은것이 매우 오래되어 보이는 책 한권을 꺼내어들었다.
"그건..."
"예, 맞습니다. 제국의 보물로서 전해져내려오는「제피아르 제국 건국 설화」의 원본 입니다."
"그것이 율리안과 무슨 연관이라도...?"
영,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시얀의 의문 가득한 눈빛에 테일러 학사는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침묵은 대답을 대신한 긍정의 표시. 도대체 이런 오래된 설화와 율리안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인지 마음이 조급해지는 시얀이었다.
다들 메리 추석이용 ♥
푸짐한 한가위 보내세요~ 'ㅅ'♡
첫댓글 다음화주세요 어서
하하하핳; 댓글 감사드립니다아. 다...다음화는....다...다음번에.......ㅎ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