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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사 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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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조선사 랑 스크랩 [귀한자료] 조선의 명기 -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러브선 추천 0 조회 1,585 15.05.24 11: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말기 명기
 .

 

<Source : Daum. image. 미디어 다음>

 
 
 [귀한자료] 조선의 명기
 
이난향(李蘭香)
1900년 평양 태생. 15살에 상경하여 조선권번에 입적.
하규일 선생의 수제자로 가장 뛰어나다는 인정을 받았다.
이난향은 모든 노래를 두루 잘 부르는 명기로서 명성이 자자했으며,
용모도 단정하고 조행이 발랐다고 한다.
 
 
주옥경(朱鈺卿) 
기명은 산월. 1915년 21살 때 손병희 선생의
세 번째 부인이 되었다.
수의당(守義堂) 주옥경(1894∼1982)은 천도교 교조의 아내로,
천도교 여성회원들의 어머니로, 한국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헌신적 삶을 살아간 인물이다. 
 
오소홍(吳小紅)
평양 기생. 조선권번에 입적되었다.
하규일 선생 밑에서 서도잡가와 장삼무를 익혔다.
원산홍, 김산호주 등과 함께 대선배격인 기생이다.
 
친필편지
 
김취홍(金翠紅)
운빈아미. 눈에 익고, 귀에 젖는다는 뜻으로 김취홍에
대한 묘사를 나타낸 말이다. 장구를 두드리며
춤을 췄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서도잡가에도 능했다.
얼굴이 아름답고 웃음이 매력적이어서 그녀의 웃음을 보면
없던 정이 절로 생겼다고 한다.
 
이진홍(李眞紅)
8살에 기생 서재에 입학. 갸름한 얼굴에 양 옆에
보조개가 있어 애교스런 모습이었다.
시조·가사·노래 등을 잘 불렀고 그 중에 가장 능란한 것은
평양에서 유명한 관산융마(關山戎馬)라는 서도잡가였다.
 
백운선(白雲仙)
본명은 순향. 그녀는 나이를 먹어도 춤과 노래가 변함이 없었고,
인기는 사라질 줄을 몰라서 만년 명기라고 불렸다.
하규일의 손에서 길러지면서 가장 귀여움을 받았다.
 
김산월(金山月)
유행가와 대중가요에 큰 영향을 끼쳤던 기생. 노래를 매우 잘 불렀다.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축음기판 음반을 취입했다.
이 음반에는 <장한몽가-原題는 金色夜叉> 라는 곡이 실려 있다.
 
 강명화(康明花)
본명은 강도천. 1900년에 평양 출생.
11세의 어린 나이에 기생이되고
17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대정권번에 이름을 올렸다.
서도잡가와 시조를 잘했고 사교성이 좋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대구 부호의 아들 장병천과 사랑에 실패해 결국 자살하였다.
 
 
김영월(金映月)
장학선 등과 함께 대표적인 평양기생으로 소리에 능통했으며,
연기에서도 많은 활동을 펼친 기생이었다.
1927년 개봉한 영화 '낙양의 길'의 주인공이었다.
 
 
이옥란(李玉蘭)
한성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국악과 양악 양쪽에 모두 능했다.
특히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한 가요곡 ‘기생수첩’, ‘눈물의 시집’,
‘꽃같은 순정’ 등의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장연홍(張蓮紅) 
평양 기성권번 출신.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로
평양에서부터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중국 유학길에 오른
이 후의 행적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김화희(金花姬)
평양 출신. 용모가 단아했으며, 궁중연회에
자주 참가하였다고 전해진다.
대정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시조, 서가, 잡가, 정재12종무에 능했다.
 
윤채선(尹彩善)
대정권번 출신의 예기. 잡기와 춤에 능했는데,
그 중 조선무용이 일품이었다.
얼굴이 아름다워 남성들에게 많은 구애를 받았다.
 
 
김옥엽(金玉葉)
초창기에는 궁중무용과 서도잡가와 경기잡가 그리고
30년대 중반부터는 가곡, 가사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수심가'는 워낙 뛰어나 당시 장안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문인 김동인과의 염문으로 유명하였다.
빅타, 콜럼비아, 태평 레코드 등에서 수십 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박녹주(朴綠珠) 
판소리의 명창. 1937년 창극좌에 입단.
1945년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판소리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
1970년 《흥부가》의 예능보유자로 변경, 지정되었다.
 
 
최섬홍(崔蟾紅)
평양 예기이자 서도소리의 명창. 기성권번에서 서도소리를 배웠다.
명창 김관운의 제자로 여류 명창에 속한다고 전해진다.
현재 명인명창선집 <수심가 걸작선> 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현계옥(玄桂玉)
경북 대구 태생. 일찍 부모를 여윈 탓에 17세가 되던 때에
대구 조합에 기적을 올리게 된다.
타고난 미모와 재주가 많았는데 춤과 가야금은 필적할만한
상대가 없었다고 한다.
이후 현진건의 형인 현정건을 만나게 되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현정건이 죽은 후,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행동파 사상기생의 삶을 살았다.
 
 
김명옥(金明玉)
춤에 일가견이 있었던 기생으로 춘앵무가 특기였다.
가야금을 잘 키고 서도잡가로 유명했다.
다른 기생들에 비해서 일찍 기적(妓籍)에서 물러나
전라도 어떤 부호(富戶)와 함께 남은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김춘도(金春桃)
기명은 춘도(春桃). 9세 때부터 기성서재에서 가무를 연습.
20세세 이르러 거문고와 양금으로 평양에서 이름을 날렸다.
노래에도 뛰어나 수심가와 같은 곡조를 잘했다.
용모가 단정하고 순수한 태도를 보였다.
 
서명옥(徐明玉)
기명은 명옥. 평양 출신. 9살부터 기생학교에 입학.
가무음률을 배울 때 재주가 있고 총명하다고 했다.
소리는 시조, 노래, 수심가 그 외 잡가에 능했다.
입가의 웃음이 매력적이었다. 나이에 비해 조숙한 느낌을 들게 했다.
 
이춘홍(李春紅)
평양기생학교 출신. 미모에 재담과 넉살이 뛰어났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댄스를 잘 춘 기생이었다.
각 요릿집 손님들로부터 가장 많이 초청받아 당대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던 인물이었다.
 
유금도(柳錦桃)
이춘홍과 평양기술학교 동기생.
그녀는 미모에 있어서는 김옥엽과 이춘홍에 뒤졌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서 만남이 잦아지면, 한량들은 어느 누구 없이
김옥엽과 이춘홍보다는 유금도로를 찾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성으로서 숨겨진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현매홍(玄梅紅)
김옥엽과 같은 평양 기성권번 출신으로
가곡, 가사, 시조에 능통했다.
현매홍은 기생조합 최초의 잡지인 '장한' 편집인중 한명으로
활동했으며 일동축음기레코드 등에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다.
 
 
오산월(吳山月)
산월이란 이름은 기생 중에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였다.
손병희 선생의 후처 주산월과 30년대 일세를 풍미한
소리꾼인 서도기생 김산월이 그들이다.
오산월의 특기는 알 수 없지만 빼어난 외모로
20~30년대 화보에 많이 등장하는 기생이었다.
 
 <Source: cafe아이퍄크 골프동호회 (유니코) 님>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명 
 
 
 

 

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말 알아듣는 꽃(解語花) 대중문화 멀티 스타로 뜨다

신현규 중앙대 교수·국문학 blog.naver.com/shglem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단절된

시기였다.

이로 인해 왜곡된 근대화 과정으로

정치·경제·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됐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기생도 희생됐다.

우리는 기생에 대해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 시각을 갖고 있다.

기생은 봉건시대의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로는

현대의 대중문화 스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근대(近代)’라는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고,

여러 곳에서 논의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근대화는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가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특히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은

근대화의 척도 중 하나다.

 

근대화 과정에서 평양 기생 출신

왕수복(1917∼2003)은 대중스타로 변모했다.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왕수복이 태어난 시기는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때였다.

 

일제는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조선어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했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우리말 신문이 간행된 게 바로
이러한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왕수복은 12세에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음반 대중 가수로 진출했다. 왕수복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에서
폴리돌 레코드로 소속을 옮겼는데, 폴리돌에 와서는
‘유행가의 여왕’이 되고자 했다.

 

왕수복은 건장한 몸집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좋았다고 한다.
특히 평양 예기학교, 즉 기생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김에는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레코드 문예부장 왕평(王平)의 회고가 있다.

 

특히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낸 소리로

부른 ‘고도의 정한’은
대중으로부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끈 조선 유행가였으며

음반 판매량에서도 최고를 기록했다.

왕수복이 세상이 알아주는 대가수가 되자

콜롬비아, 빅터 등
음반 회사들은 평양 기생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10대 가수 중 3명이 기생 출신

 

1930년대는 한국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대중음악이 등장한 전환기였고 그 획을 그은 이가

기생 왕수복이다.


송방송(宋方松)이 ‘한국근대음악사의 한 양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행가, 신민요, 신가요, 유행소곡 등과 같은

새로운 갈래의 노래들이
당시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의해 창작되어 불려졌다.
이 중 신민요(新民謠)는 성악의 한 갈래로서,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가교였다.

신민요의 등장은 근대화의 한 사례다.
전통적인 문화에 외래적인 문화가 더해진
문화적 종합화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봉건적 잔재인 ‘기생’이

근대의 표상으로 일컫는
대중문화의 ‘대중스타’가 된 것이다.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음악의 탄생을 불렀으며,

기생은 그 음반 가요의 주요 소비자였다.

기생들은 음반을 들고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의 확산에 도움을 줬으므로
음반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다.

 

이는 음반회사가 기생 출신을 가수로 발탁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기생 출신의 가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는 삼천리(1935년) 잡지가 선정한
10대 가수에 오른 5명의 여자 가수 중에

1, 2, 5위를 차지했다.

 

1937년 21세의 왕수복은 폴리돌 레코드 회사와

결별한 뒤
일본 우에노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했다.
조선민요를 세계화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성악을 전공한다. 왕수복은
43세 때인 1959년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의 일생에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메밀꽃 필 무렵’ 작가 이효석이고,

또 한 사람은 한때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金洸鎭)이다.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왕수복은 이효석이 죽은 뒤인 1947년 열네 살 연상인 김광진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다.

왕수복은 1973년 남편이 김일성 훈장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왕수복은 1955년 7월 김일성과 처음 만난 뒤
그 다음 달에 열리는 소련 공연에

북한 대표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게 된다.


‘조선가요의 여신(女神)’이란 별칭까지 얻은

그는 1977년 환갑, 10년 뒤 칠순,

다시 10년 뒤 팔순에 김정일에게서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遊女, 娼妓, 藝者…

 

기생의 역사에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국학자 이능화가 저술한 풍속에

관한 서적으로, 기생을
종합적으로 다룬 첫 역사서이다.


이방인이 기생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여성 학자 빈센차 두르소는 1997년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조선기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02년 일본 학자 ‘가와무라 미나토’도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해어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 취급을 받은 기생에 관한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는 물론 야사나 각종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 책은 기생의 기원과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뤘으며 각종 일화와

시조, 시가도 소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기생은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생 중에는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다.

기생을 가리키는 명칭 중에 ‘해어화’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시대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 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 또는 ‘기녀’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 했으나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뉘었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기 위해

그들은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는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으며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입술을 아주 빨갛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게이샤 활동 금지령이 내려진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샤의 수는 크게 늘어나

지방도시로까지 퍼지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
(妓生, a gisaeng(-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생의 ‘기’를 ‘妓’외에 ‘伎’로도

표기했다. ‘妓’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기(伎)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 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무대인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遊女, 娼妓, 藝者…

 

기생의 역사에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국학자 이능화가 저술한 풍속에 관한

서적으로, 기생을 종합적으로 다룬 첫 역사서이다.
이방인이 기생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여성 학자 빈센차 두르소는 1997년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조선기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02년 일본 학자

 ‘가와무라 미나토’도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해어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 취급을 받은

기생에 관한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는 물론 야사나 각종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 책은 기생의 기원과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뤘으며

각종 일화와 시조, 시가도 소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기생은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생 중에는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다.

기생을 가리키는 명칭 중에 ‘해어화’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시대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 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 또는 ‘기녀’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 했으나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뉘었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기 위해

그들은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는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으며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입술을 아주 빨갛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게이샤 활동 금지령이 내려진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샤의 수는
크게 늘어나 지방도시로까지 퍼지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
(妓生, a gisaeng(-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생의 ‘기’를 ‘妓’외에

 ‘伎’로도 표기했다. ‘妓’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기(伎)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 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무대인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기생, 관광객에게 선풍적 인기

1930년대 조선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기생이었다.
그런데 ‘조선색 농후한 전통적 미를 가진 기생’을

볼 수 있는 곳은
평양기생학교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양 기생학교는 본래 명칭이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기생양성소’인데

3년 학제였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고 그 일대에 산재한 10여 군데의 대규모 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기생학교의 학생 수는 210명이었다.
1년 3학기였으며 매년 3월 학기말 시험을

통과해야 됐다.
이 기생학교는 평양의 명물이 되어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소리내는 법을 익히기 위해 3, 4개월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연습했다.
교사가 맞춤소리의 맞춤법, 무릎 치는 방법 등을

일일이 시범을 보이며
가르치면 여학생들은 이를 따라 했다.

 

기생들의 관심사인
서비스 방법, 손님 다루는 방법은 ‘예의범절’과

 ‘회화’ 시간에 가르쳤다.


걷는 법, 앉는 법, 인사법 , 술 따르는 법,

표정 짓는 법, 배웅하는 법 등
연회 좌석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뤘다.

 

기생들은 남자의 마음을 끄는 기술에 관한 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아는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선배들이 모범을 보이고, 학교는
권번사무소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으며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기생 이야기뿐인 환경이었으므로

이 학교 상당수 학생은 겉과 속이 모두 기생다운

기생으로 양성되었다.

 

기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

문화의 계승자요
선도자 기능을 해 왔다. 기생의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아야 하며
기생 문화 또한 복원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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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cafe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이정현님>
 
 
신현규
●1965년 서울 출생
● 중앙대 국어국문과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고전문학)
● 現 중앙대 교양학부 교수
● 저서 및 논문 : ‘평양기생 왕수복,
 10대 가수여왕 되다’,
‘꽃을 잡고-일제강점기
기생인물생활사’, ‘고려조문인졸기’
(1998년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임병양란을
소재로 한 한문서사시연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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