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妓生)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말 알아듣는 꽃(解語花) 대중문화 멀티 스타로 뜨다
신현규 중앙대 교수·국문학 blog.naver.com/shglem
일제 강점기는 우리 민족의 장구한 역사가 단절된
시기였다.
이로 인해 왜곡된 근대화 과정으로
정치·경제·문화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심각한 후유증이 남게 됐다. 이런 변화의 와중에
기생도 희생됐다.
우리는 기생에 대해 호감과 배척이라는
이율배반적 시각을 갖고 있다.
기생은 봉건시대의 유물로서 배척해야 할 대상이었으나 실제로는
현대의 대중문화 스타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근대(近代)’라는 용어는 널리 사용되고 있고,
여러 곳에서 논의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개념 규정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다.
근대화는 ‘전근대적인 상태로부터
근대적인 상태로 이행하는 과정, 또는
후진적 상태에서 선진적 상태로 발전해가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특히 ‘대중매체의 광범위한 보급’은
근대화의 척도 중 하나다.
근대화 과정에서 평양 기생 출신
왕수복(1917∼2003)은 대중스타로 변모했다.
주목할 만한 일이다. 왕수복이 태어난 시기는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제가 종래의 무단정치 대신
표면상으로는 문화정치를 표방하던 때였다.
일제는 서둘러 관제를 고치고 조선어 신문 발행을
허가하는 등
타협적 형태의 정치를 펴는 듯했으나,
내면으로는 민족 상층부를 회유하고
민족분열 통치를 강화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대일보 등의
우리말 신문이 간행된 게 바로
이러한 문화정치의 산물이다.
왕수복은 12세에 평양 기성권번의 기생학교에
입학했고 졸업 후
음반 대중 가수로 진출했다. 왕수복은
콜롬비아 레코드 회사에서
폴리돌 레코드로 소속을 옮겼는데, 폴리돌에 와서는
‘유행가의 여왕’이 되고자 했다.
왕수복은 건장한 몸집에 목소리도 우렁차고
좋았다고 한다.
특히 평양 예기학교, 즉 기생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김에는 과연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레코드 문예부장 왕평(王平)의 회고가 있다.
특히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낸 소리로
부른 ‘고도의 정한’은
대중으로부터 열광적 환영을 받았다.
당시 가장 인기를 끈 조선 유행가였으며
음반 판매량에서도 최고를 기록했다.
왕수복이 세상이 알아주는 대가수가 되자
콜롬비아, 빅터 등
음반 회사들은 평양 기생 쟁탈전을 벌이기도 했다.
10대 가수 중 3명이 기생 출신
1930년대는 한국 음악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다.
대중음악이 등장한 전환기였고 그 획을 그은 이가
기생 왕수복이다.
송방송(宋方松)이 ‘한국근대음악사의 한 양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현대 대중가요의 뿌리에 해당하는
유행가, 신민요, 신가요, 유행소곡 등과 같은
새로운 갈래의 노래들이
당시 작사자와 작곡가들에 의해 창작되어 불려졌다.
이 중 신민요(新民謠)는 성악의 한 갈래로서,
전통 민요와 유행가의 가교였다.
신민요의 등장은 근대화의 한 사례다.
전통적인 문화에 외래적인 문화가 더해진
문화적 종합화라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근대화 과정에서 봉건적 잔재인 ‘기생’이
근대의 표상으로 일컫는
대중문화의 ‘대중스타’가 된 것이다.
축음기의 보급은 대중음악의 탄생을 불렀으며,
기생은 그 음반 가요의 주요 소비자였다.
기생들은 음반을 들고 배운 노래를
술자리에서 불러 유행의 확산에 도움을 줬으므로
음반회사에서 보면 큰 고객이었다.
이는 음반회사가 기생 출신을 가수로 발탁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기생 출신의 가수 왕수복, 선우일선, 김복희는 삼천리(1935년) 잡지가 선정한
10대 가수에 오른 5명의 여자 가수 중에
1, 2, 5위를 차지했다.
1937년 21세의 왕수복은 폴리돌 레코드 회사와
결별한 뒤
일본 우에노 도쿄음악학교에 진학했다.
조선민요를 세계화한다는 포부를 가지고
성악을 전공한다. 왕수복은
43세 때인 1959년 북한에서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고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왕수복의 일생에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한 사람은 ‘메밀꽃 필 무렵’ 작가 이효석이고,
또 한 사람은 한때 시인 노천명의 약혼자였던
김광진(金洸鎭)이다.
김광진은 북한에서 김정일에게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왕수복은 이효석이 죽은 뒤인 1947년 열네 살 연상인 김광진과 결혼해 아들과 딸을 낳았다.
왕수복은 1973년 남편이 김일성 훈장을 받는 장면을 지켜보기도 했다.
왕수복은 1955년 7월 김일성과 처음 만난 뒤
그 다음 달에 열리는 소련 공연에
북한 대표로 발탁되면서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하게 된다.
‘조선가요의 여신(女神)’이란 별칭까지 얻은
그는 1977년 환갑, 10년 뒤 칠순,
다시 10년 뒤 팔순에 김정일에게서
생일상을 받기도 했다.
遊女, 娼妓, 藝者…
기생의 역사에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국학자 이능화가 저술한 풍속에
관한 서적으로, 기생을
종합적으로 다룬 첫 역사서이다.
이방인이 기생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여성 학자 빈센차 두르소는 1997년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조선기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02년 일본 학자 ‘가와무라 미나토’도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해어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 취급을 받은 기생에 관한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는 물론 야사나 각종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 책은 기생의 기원과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뤘으며 각종 일화와
시조, 시가도 소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기생은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생 중에는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다.
기생을 가리키는 명칭 중에 ‘해어화’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시대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 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 또는 ‘기녀’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 했으나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뉘었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기 위해
그들은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는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으며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입술을 아주 빨갛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게이샤 활동 금지령이 내려진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샤의 수는 크게 늘어나
지방도시로까지 퍼지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
(妓生, a gisaeng(-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생의 ‘기’를 ‘妓’외에 ‘伎’로도
표기했다. ‘妓’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기(伎)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 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무대인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遊女, 娼妓, 藝者…
기생의 역사에서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를
빼놓을 수 없다.
1927년 국학자 이능화가 저술한 풍속에 관한
서적으로, 기생을 종합적으로 다룬 첫 역사서이다.
이방인이 기생 역사를 다루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발간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 여성 학자 빈센차 두르소는 1997년
독일 함부르크대에서 ‘조선기녀’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2002년 일본 학자
‘가와무라 미나토’도 ‘말하는 꽃 기생’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조선해어화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기에
이르기까지 천민 취급을 받은
기생에 관한 자료를 모았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는 물론 야사나 각종 문집까지 참고했다.
이 책은 기생의 기원과 시대별 제도,
기생의 생활, 유명한 기생들, 기생의 역할과
사회적인 성격 등을 다뤘으며
각종 일화와 시조, 시가도 소개했다.
이 책에 따르면 기생은 천민층이었으나
매우 활동적인 여성이었다.
또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데 있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기생 중에는 의료에 종사한 의녀도 있었다.
기생을 가리키는 명칭 중에 ‘해어화’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비빈과 궁녀들을 거느리고
연꽃을 구경하다가 양귀비를 가리켜
“연꽃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 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고 말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기생이라는 직종은 신라 24대 진흥왕 때 여자 무당이
유녀(遊女)가 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정약용과 이익은 고려시대에 생겼다고 본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는 것이다.
기생의 배출지로 이름난 곳은
서울 평양 성천 해주 강계 함흥 진주 전주
경주 등이다. 조선시대에
문학 작품을 남긴 기생으로는 황진이 이매창 문향
매화 홍랑 홍장 계섬 소백주 구지 명옥 다복 소춘풍
송대춘 계단 한우 송이 강강월 천금 등이 꼽히며,
이들의 시조 작품 20여 수가 전해 내려온다.
사실 ‘기(妓)’는 형성문자로 뜻 부분인
‘계집 녀(女)’와 음 부분인
‘가를 지(支)’로 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기생을 이르는 말은 다 다르다.
중국에는 기생이라는 표현이 없으며 대신에
‘기(妓)’ 또는 ‘기녀’ ‘창기(娼妓)’를 널리 사용했다.
일본에도 기생이라는 어휘는 없으며 ‘유녀(遊女)’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기(藝妓)’도 일본에서 기생을 일컫는 말로
많이 쓰였다.
즉 예자(藝者, げい-しゃ, 게이샤)로 통용된다.
게이샤는 일본에서 1688~1704년경에 생긴 제도로
본래는 예능에 관한 일만 했으나
유녀가 갖추지 못한 예능을 도와주는 게이샤와
춤을 추는 것을 구실로 손님에게 몸을 파는
게이샤 두 종류로 나뉘었다.
질 높은 서비스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기 위해
그들은 일본 전통예술 훈련을 받는다.
기품 있는 게이샤는 매력적이면서 우아했다.
예전에 게이샤는 남자였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여자로 바뀌었으며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기 전에
예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게이샤는 ‘아름다운 사람’ ‘예술로 사는 사람’ ‘예술을 행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들은 음악, 서예, 다도, 시, 대화 그리고
샤미센이라 부르는 세 종류의 악기 연주를 익힌다.
전통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얼굴을 하얗게 하고
입술을 아주 빨갛게 칠하는 화장을 한다.
풍기를 문란하게 한다 하여
게이샤 활동 금지령이 내려진 일도 있으나
메이지 시대 이후 게이샤의 수는
크게 늘어나 지방도시로까지 퍼지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예능 기량과 관계없이
성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여성이
게이샤의 이름으로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어휘인 기생
(妓生, a gisaeng(-girl)
a singing and dancing girl)은
‘잔치나 술자리에 나가 노래·춤 등으로
흥을 돋우는 일을 직업으로 삼던 여자’로
규정할 수 있으며 ‘예기(藝妓)’란 말도 함께 쓰였다.
특히 ‘기생’의 한자어는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기생’의 ‘생(生)’은 접사로 서생(書生), 선생(先生), 학생(學生)과 같은 경우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기생의 ‘기’를 ‘妓’외에
‘伎’로도 표기했다. ‘妓’의 경우는
창기, 간기, 기첩 등 부정적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기(伎)의 경우는 기악(伎樂) 등
긍정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관기를 기첩(妓妾)으로
맞아들여 집마다 두었다는
기록이 있어 공물(公物)이면서 사물(私物)로서도
존재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관기제도를 한층 정비했으나,
표면상으로만
‘관원은 기녀를 간(奸)할 수 없다’는 ‘경국대전’의 명문이 있었을 뿐이다.
실제로 관기는 공물이라는 관념이 불문율로 되어
있어 지방의 수령이나 관료는
수청(守廳)을 들게 했다. 관비(官婢)와
관기(官妓)는 구별됐는데,
세종 때는 관기가 모자라 관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관기 제도는 조선 말기까지 존속했으며 관기의 딸은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관기가 돼야 했다.
조선시대의 기생청은 기생을 관장하고
교육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가무 등
기생이 갖춰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行儀), 시, 서화 등을 가르쳐 상류 고관이나
유생들의 접대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권번(券番)이 기생청의 기능을 대신했다고
볼 수 있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에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뒀던 조합이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는 한편, 기생들의 활동무대인
요릿집을 지휘하고 그들의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기능도 담당했다.
당시 기생들은 허가제로 되어 있어
권번에 적을 두고 세금을 내야 했으며,
권번기생은 다른 기녀들과 엄격히 구분돼 있었다.
기생, 관광객에게 선풍적 인기
1930년대 조선을 방문한 외국 관광객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것 중 하나가 기생이었다.
그런데 ‘조선색 농후한 전통적 미를 가진 기생’을
볼 수 있는 곳은
평양기생학교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평양 기생학교는 본래 명칭이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기생양성소’인데
3년 학제였다.
대동강 부근에 있었고 그 일대에 산재한 10여 군데의 대규모 요릿집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평양 기생학교의 학생 수는 210명이었다.
1년 3학기였으며 매년 3월 학기말 시험을
통과해야 됐다.
이 기생학교는 평양의 명물이 되어 국내외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소리내는 법을 익히기 위해 3, 4개월 동안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연습했다.
교사가 맞춤소리의 맞춤법, 무릎 치는 방법 등을
일일이 시범을 보이며
가르치면 여학생들은 이를 따라 했다.
기생들의 관심사인
서비스 방법, 손님 다루는 방법은 ‘예의범절’과
‘회화’ 시간에 가르쳤다.
걷는 법, 앉는 법, 인사법 , 술 따르는 법,
표정 짓는 법, 배웅하는 법 등
연회 좌석에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다뤘다.
기생들은 남자의 마음을 끄는 기술에 관한 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아는 재능이 있었다.
뛰어난 선배들이 모범을 보이고, 학교는
권번사무소와 긴밀히 연결돼 있었으며 주변 어디를 둘러봐도 기생 이야기뿐인 환경이었으므로
이 학교 상당수 학생은 겉과 속이 모두 기생다운
기생으로 양성되었다.
기생은 일제 강점기에도 시와 서에 능한 교양인,
문화의 계승자요
선도자 기능을 해 왔다. 기생의 왜곡된 이미지를
바로잡아야 하며
기생 문화 또한 복원될 필요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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