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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별 아래에서. 카츄샤를 작사 작곡한 것으로 유명한 미하일 이사콥스키(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Исаковский)와 마트베이 블란테르(Матвей Исаакович Блантер)가 1944년 작사 작곡한 노래로, 소련군 병사가 불가리아 땅을 바라보며 고향 러시아와 갈색 눈의 연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노래입니다. 중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46년 스탈린 문학상 2등 수상작이라고 합니다. 이하의 가사는 일본어 중역입니다.
어여쁜 갈색 눈의 당신은 어디에 있나
내가 태어난 고향은 어디에?
불가리아로의 진군,
도나우 강 너머의 언덕
기나긴 행군과 싸움에
머나먼 대지와 강을 넘어왔지만,
나의 조국 소비에트의 땅을
떠올리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발칸의 별 아래에서
떠올리며 동경하는 것은
야로슬라블, 랴잔,
그리고 스몰렌스크의 나의 집.
어여쁜 갈색 눈을 떠올리며
웃으면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것은
"불가리아는 아름다운 나라이지만
러시아는 더욱 아름답다!"
러시아 제국은 대영제국과 평화협정이 걸려있어서 참전을 거부했습니다. 어느 전쟁이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시기를 봐서는 크림 전쟁밖에 떠오르는 게 없네요. 뭐 까짓거 상관없습니다.
동부 프로이센에서 북독일-러시아 국경을 방위하던 3군단은 갈리치아 방면으로 진격하도록 대기 중이었고, 전쟁 발발과 동시에 타르누프에서 첫 전투가 벌어집니다.
기습적인 전쟁이나 다름없었으니 9천 명이 삭제당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테죠.
하부 슐레지엔을 방위하던 2군단은 이번 전쟁의 핵심이며, 제국 수도 빈까지 일직선으로 돌파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빈과 가까운 브르노에서 제국군과 맞닥뜨립니다.
12000명의 제국군을 삭제합니다.
갈리치아 방면의 3군단이 후방을 교란하려는 제국군을 향해 돌격합니다.
제1차 영국-버마 전쟁에서 승리하여 1826년 얀다보 조약을 맺은 영국은, 몇 가지 사소한 문제로 인해 제독 조지 램버트를 버마로 보냅니다. 램버트 제독은 상당한 다혈질로 평가받았던 모양인데, 극히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랑군 항을 봉쇄하고 버마 왕이 소유한 배를 나포함으로써 제2차 영국-버마 전쟁이 발발합니다. 전쟁 발발 원인이 모호했기 때문에 영국의 명예는 실추되었습니다.
자유무역과 평화주의를 지향하며 소영국주의를 대표하던 정치가 리처드 코브던은, 당시 인도 총독이던 댈하우지 후작 제임스 램지 경이 버마를 공격하여 합병할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비난했습니다.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의 일환으로 의도적으로 해군 제독을 파견한 것, 원래 1000파운드만 요구하려던 배상금을 100배 늘린 10만 파운드로 올려버린 것, 시암의 테나세림에서 근무하며 버마에 대한 이해 수준이 높았던 아치볼드 보글 대령을 파견하지 않았던 것 등을 이유로 들어 비판한 것입니다.
실제로 제2차 영국-버마 전쟁은 램버트 제독이 일방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것이 너무 명확했기 때문에 영국에게는 변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단 분쟁이 터지고 침략이 시작되자 제임스 램지 경은 영국 국기가 모욕당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놈의 영국 국기는 한 번 모욕당할 때마다 대청제국과 뉴질랜드와 미얀마까지 집어삼키는 악마의 물건인 모양입니다.
1865년 10월 28일, 미합중국이 카를리스트 에스파냐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합니다. 전쟁 목적은 쿠바입니다. 남북전쟁이 늦어진 이유가 있군요. 쿠바를 강제로 합병하여 노예주로 편입시키면 남부는 그나마 만족할 것입니다.
타르누프의 3군단이 15000명의 제국군을 삭제합니다.
빈에서 서쪽으로 70km 떨어진 크렘스에서는 작센 군단이 제국군 15000명을 삭제합니다.
라인란트를 방위하던 5군단은 벨기에의 해안을 지키기 위해 브뤼허로 파견되어 있습니다. 벨기에로의 침공이 불가능해진 영국은 우방 네덜란드에 병력을 상륙시켜 벨기에 국경을 넘고자 하고 있습니다. 치열한 눈치싸움이 이어집니다.
크렘스를 점령한 작센 군단이 빈에 주둔 중인 8만 명의 제국군을 공격합니다. 남쪽에서는 헤센 군단이, 북쪽에서는 1군단이 빈을 반포위하며 작센 군단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브뤼허의 벨기에군이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격하기 위해 빠져나가자 드디어 영국군이 브뤼허로 진군해옵니다. 고작 3천 명의 수적 우세만 믿고 덤비는 걸까요?
1군단과 헤센 군단이 동시에 빈에 도착, 공격 보정 4에 빛나는 헬무트 폰 몰트케가 지휘권을 넘겨받아 맹공을 가합니다.
브뤼허 전투에서는 이미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구축한 북독일군에게 영국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빈 전투에서 제국군은 4만에 달하는 피해를 입으며 퇴각합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가 북독일연방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네덜란드와의 국경 및 북서부 해안을 지키도록 배치받은 하노버 군단이 할 일이 없어 심심해하고 있으니 브뤼허로 파견을 보냅시다.
북독일군이 1200명의 경미한 피해를 입는 동안 영국군은 26000명을 잃었습니다. 무려 21배 차이!
전선은 끝도 없이 확대되어 아드리아해에 이르렀고, 4만의 제국군이 갈 곳을 잃고 파도바까지 쫓겨왔습니다. 베로나를 점령한 6군단이 제국군을 수장시켜버리고자 진군합니다.
6군단을 이끄는 루프레흐트 폰 힌덴부르크(가상인물)도 공격 보정만 4를 받고 사기 3.6%와 조직력 13.2%까지 올려주는 명장입니다. 덕분에 도하 페널티와 수적 열세를 씹어먹고 있습니다.
벨기에의 군사력 공백을 틈타 급진적 사회주의자들이 봉기했습니다. 하노버 군단이 파견되어 반란을 진압해줍니다.
11척의 수송선이 정신줄 놓고 호위도 없이 브뤼허 항을 봉쇄 중이길래 왕립 프로이센 함대를 눈치껏 파견해봅니다.
왕립 프로이센 함대를 이끄는 제독은 북독일연방의 의장 겸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이신 빌헬름 1세 전하와 사촌 관계에 있는 하인리히 빌헬름 아달베르트입니다.
아달베르트 군(君)은 원래 포병 출신이었으나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해군의 중요성을 깨닫고 프로이센 함대 건설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프로이센 왕국은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와 같은 해군 강국들을 우방으로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엔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제1차 슐레스비히 전쟁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는 중립을 지키고 덴마크 해군에 의해 북해와 발트해 무역이 마비당한 것을 계기로 하여 해군 확장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1848년 혁명 중에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는 국가함대(Reichsflotte)를 만들고자 했는데, 아달베르트 군은 <독일 해군 건설 제안서>를 제출합니다. 여기에서 그는 해군 전략을 해안방어 모델, 국가방위와 상선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공격적인 해군 모델, 독자적인 해군강국 모델, 이렇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고 영국과 같은 해군강국을 도발하지 않기 위해 2번째 모델을 지지합니다.
1853년에는 올덴부르크 대공국에게 야데 조약(Jade Treaty)을 제안하여 야데 만의 영토 340헥타르를 제공받아 1854년부터 해군기지를 건설하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빌헬름스하펜입니다. 1854년 3월 30일에는 프로이센 해안 제독과 해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864년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에서는 발트 소함대를 지휘하였으나 전쟁 중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지는 못했습니다. 보불전쟁으로 독일제국이 성립된 1871년에 아달베르트 군은 해군에서 은퇴하고, 그로부터 2년 후에 간 질환으로 사망합니다.
보다시피 독일제국 해군의 아버지 격인 인물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서 딱히 큰 공을 세운 적도 없는데, HPM의 아달베르트 군은 공격 보정 1, 사기 8%, 조직력 22%, 신뢰도 5% 버프를 걸어주는 의외의 능력자로 나옵니다. 프로이센 주인공 보정이 좀 심하네요.
11척의 수송선을 손쉽게 잡아낸 함대는 일단 함부르크로 돌려보냅니다.
파도바 전투에서 승리했네요. 제국군은 베로나로 후퇴합니다.
하지만 베네치아를 점령한 바이에른군이 제국군 패잔병을 붙잡습니다.
영국군 추가병력이 네덜란드로 향합니다. 함부르크의 프로이센 함대를 불러서 다시 한 번 수송선 사냥에 나서봅시다.
이번에는 16척이나 걸렸군요.
전쟁 도중인 1866년 11월 2일, 보유 재산과는 무관하게 일정 연령 이상의 모든 남성들에게 평등한 투표권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개혁에서 소외된 의무교육 확대 운동과 의료지원 확대 운동은 극단주의가 45 강화되었으며, 연금개혁 운동은 26, 선거제도 개혁 운동은 16 정도가 극단화되었습니다.
사회개혁은 할 수 없고 정치개혁만 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선거제도 개혁 대신 투표권 확대를 먼저 시행한 건 집권 중인 보수당에게 유리하도록 만들기 위함입니다. 투표권을 확대하면 보수주의가 많이 분포해 있는 하류층의 비중이 높아지지만, 선거제도를 개혁해서 게리맨더링으로 넘어가면 집권당 지원이 약해지기 때문에 보수당의 재선이 어려워지죠.
137척에 달하는 거대한 영국 함대가 도거 뱅크로 향하고 있습니다.
59일 간의 포위 끝에 빈을 점령하였습니다.
후퇴가 가능해지자마자 즉시 브뤼허 항으로의 후퇴 명령을 내립니다. 100척이 넘는 영국 해군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아쉽게도 아직 단 한 척의 수송선도 격침시키지 못했네요.
영국 전투함대가 뒤늦게 도착했지만 이미 프로이센 해군은 전장에서 도주하고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위기가 한계점에 다다랐으며, 술탄은 헌법 폐지를 놓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1876년 11월 23일, 비밀결사 청년오스만(Young Ottomans)이 작성한 '기본법'이 공포되면서 오스만 제국은 제1차 헌법 시대를 맞게 됩니다. 오스만 제국은 형식적인 입헌군주정으로 전환되었고 양원제가 확립되었습니다. 1877년 첫 번째 임기가 시작되었으나, 1877년 4월 24일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재선거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1878년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되었지만, 며칠도 가지 못하고 발칸 지역의 불안정을 이유로 의회가 해산되면서 제1차 헌법 시대는 불과 2년도 안되어 끝을 맺었습니다. 1878년에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여 산스테파노 조약을 맺었기 때문이죠.
제3차 보오전쟁의 양상이 거의 기울었는데도, 정작 대영제국은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입니다. 심지어 베를린의 영국 대사는 영독 양국 간의 친분 관계를 밝힘으로써 사실상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포기하는 눈치입니다. 전쟁 중인 적국을 '베스트 프렌드'라고 운운하는 기사는 정말 보기 드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죠.
패배하긴 했지만, 한 척의 배도 잃지 않고 브뤼허에 성공적으로 입항했으니 사실상 북독일연방의 승리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하지만 왕립 프로이센 함대가 전부 브뤼허에 갇히면서 북해가 훤히 열려버렸습니다. 영국군이 엠덴에 출몰하자 하노버 군단이 이를 요격하러 나섭니다.
하지만 영국군의 육군 기술은 30개 중에서 7개만 연구된 상태이며, 군사 전술이 25%에 불과한 것을 보니 Army Leadership 연구는 1836년 게임 시작 시점 수준 그대로인 모양입니다. 무려 30년 넘게 뒤처져 있는 셈입니다. 물론 북독일연방은 이미 Army Leadership을 3단계까지 연구 완료한 상태이며, 군사 전술은 75%에 달합니다.
기술 격차도 크게 벌어지니 당연히 쉽게 이길 수 있는 겁니다.
이제 전쟁을 종결지을 때가 왔습니다.
1866년 12월 9일, 전쟁 발발 6개월만에 제3차 보오전쟁은 끝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북독일연방의 스피어에 들어왔습니다.
해군 제독 아달베르트 군이 6년이나 일찍 사망했습니다. 아니면 은퇴일지도 모르겠지만요.
1867년 의회에서는 작년 5월에 있었던 사회당 스캔들의 여파로 사회주의자 의석이 처음으로 줄었습니다.
동방문제가 급격히 떠오릅니다. 발칸 지역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통제력은 너무나도 약화되었으며, 발칸의 균형이 붕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슬라브와 정교회를 앞세워 발칸 지역에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러시아와 이에 반발하는 다른 열강들 간의 분쟁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발칸 지역에 대한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유일한 열강인 북독일연방만이 이 사태를 중재할 명분과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베를린 회의를 열어 발칸 지역의 분쟁을 방지해야겠습니다. 위신을 23 얻게 되는군요.
베를린 회의 이벤트는 독일 전용 이벤트가 아닙니다. 다른 열강도 베를린 회의를 소집할 수 있습니다. 베를린에서 회의가 열린다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말이죠. 다만 프로이센, 북독일, 독일에게 이벤트가 뜰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베를린 회의를 앞둔 북독일연방은 외교방침을 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을 최대한 유지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러시아의 중근동 진출을 막는 것이고, 또 하나는 발칸 지방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북독일연방은 스피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동맹으로 러시아 제국을 두고 있습니다. 비록 러시아 제국이 지금 당장은 동맹이라 하더라도 언젠가는 적대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며, 러시아가 강해져봤자 북독일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세력권 안에 편입한 이상, 북독일연방에게도 발칸 반도는 간접적으로나마 진출 대상이기도 합니다.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1867년 5월 19일, 자유당 스캔들이 터졌습니다. 몇몇 유명 정치인들이 금지물품 밀수에 연계되어 있었고, 투표 매수도 여러 차례 했으며, 정부 자금을 동원해 투기를 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재작년 이맘때에 있었던 사회당 스캔들과 같은 효과가 발생합니다.
그 결과 1868년 의회에서는 자유주의자 의석이 7% 가까이 줄어들었고, 그 반사효과를 사회주의자들이 가장 크게 누렸습니다. 하지만 사회당 역시 스캔들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기 때문에 보수주의자 의석을 추월하지는 못했습니다. 3년 전만 해도 보수주의 24%, 사회주의 25%였지만 지금은 보수주의 28%, 사회주의 24% 수준이죠.
1868년 1월, 드디어 베를린 회의가 끝나고 베를린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북독일연방이 원하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이 결과에 만족한 참가국은 거의 없었고, 특히 러시아가 가장 큰 불만을 품게 되었죠. 오스만 제국에게 우호적인 조약이기는 하지만, 유럽 열강들은 오스만에게 몇 가지 요구사항들을 제시할 것입니다. 위신 23을 더 얻었습니다.
오스만 제국도 베를린 조약을 승인하였습니다. 위신을 90.9 얻고 11.5를 추가로 얻습니다. 베를린 회의 한 번 열었을 뿐인데 위신을 148.4씩이나 얻어냈군요.
AI 오스만 제국이 베를린 조약을 거부할 가능성은 10%입니다. 이 경우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루마니아인, 그리스인의 투쟁도가 6 오르고 정치의식이 4 오르며 해당 문화권이 다수를 차지하는 모든 지역에 nationalist_agitation이 5년 동안 붙습니다. 대신 터키 문화권 군인과 공무원들은 이 결정에 만족하며 투쟁도와 정치의식이 3씩 내려갑니다.
베를린 조약이 거부당했을 경우, 오스만 제국의 어그로가 폭발하면서 베를린 회의에 참석한 모든 나라들의 오스만 관계도와 외교 영향력이 200씩 깎이고, 오스만과의 동맹을 끊어버리며, 2년 동안 위신 전쟁 명분과 cut down to size 전쟁 명분을 갖게 됩니다. AI가 아니라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겠습니다만, 다른 AI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에 다굴을 놓겠죠.
그 결과 발칸 지역의 국경선은 실제 역사에서의 1878년 베를린 조약과 동일하게 그려졌습니다. 영국이 키프로스 섬을 요구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키프로스가 오스만의 속국으로 독립하게 될 겁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닙니다. 30% 확률로 오스만 제국이 키프로스 독립을 준수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만약 오스만 제국이 키프로스 독립 약속을 어겨버린다면 키프로스 독립을 요구한 나라가 키프로스 합병을 명분으로 즉각 전쟁을 선포하든가, 1년 기한으로 위신 전쟁 명분을 얻게 됩니다.
1878년 3월 3일 체결된 산 스테파노 조약에 의거하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가 독립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자치주가 됩니다. 불가리아 공국이 새롭게 건국되었는데 그 영토는 남쪽 에게 해까지 뻗어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불가리아 공국의 남쪽 영역이었는데, 문화권을 기준으로 생각하자면 아주 터무니없는 영토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가리아 문화가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으며, 러시아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는 불가리아 공국을 통해 러시아가 동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컸습니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결과 러시아 함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날 수 없고 흑해 안에 갇혀있었기 때문에, 불가리아를 통해 우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중점이 된 것은 불가리아 공국의 영역을 대거 축소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동부 루멜리아는 자치주로써 오스만 제국에 속하게 되었는데, 1885년 무혈혁명 결과 불가리아에 합병되었습니다. 불가리아와 동부 루멜리아가 완전히 통합되는 것은 1908년 9월 6일,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속국 지위를 유지하던 사실상의 독립국 불가리아가 명목상으로도 완전한 독립을 얻게 되면서였습니다.
베를린 조약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자치주 지위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관할권을 받아 사실상 얻어냈고, 영국은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얻습니다.
러시아는 군사력으로 얻어낸 이익을 대부분 잃었으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를 사실상 병합한 것에 불만을 품고 나중에는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의 삼제동맹에서 탈퇴합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후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이어졌습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불가리아도 열강들의 이해관계에 의해 제멋대로 결정된 영토를 불만족스럽게 여겨 세르비아-불가리아 전쟁, 두 차례의 발칸 전쟁이 일어납니다.
만약 베를린 회의가 발칸 국가들을 지지하는 결과로 나타난다면 대충 아래와 같은 국경선이 그어집니다.
PDM 위키에서 가져온 그림입니다만, 대충 살펴봤을 때 HPM과 같은 결과인 것 같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을 제외한 모든 발칸 지역에서 코어를 전부 잃어버립니다. 불가리아, 보스니아, 세르비아가 완전히 독립하고, 만약 크로아티아를 오스만 제국이 지배하고 있을 경우에는 크로아티아와 달마티아도 독립합니다. 그리스는 테살리아, 도데카니사 제도, 크레타를 돌려받으며, 만약 그리스가 테살리아를 이미 지배하고 있다면 서부 마케도니아까지 가져갑니다. 키프로스를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키프로스는 오스만의 속국으로 독립합니다. 그리스가 열강이며 베를린 회의에 참여했다면 서부 마케도니아와 동부 마케도니아를 전부 가져갑니다. 알바니아는 오스만의 속국으로 독립합니다.
오스만 제국이 발칸 제국에게 유리한 베를린 조약을 수용할 가능성은 70%이며, 이 경우 터키 문화권의 군인과 공무원들은 반동주의를 각각 20%와 40% 더 지지하게 되고, 투쟁도도 각각 5 올라갑니다. 베를린 조약을 거부할 가능성은 30%이며, 이 경우 오스만 제국에게 유리한 베를린 조약을 거부했을 경우와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아무튼 오스만 제국이 다굴당하는 건 정해진 수순입니다.
1868년 총선에서는 보수주의 연합이 82%의 지지를 얻으면서 안정적으로 연임합니다. 앞으로 자유주의 정당의 집권을 볼 일은 다시 없을 겁니다.
올해로 68세에 달하는 고령의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전선 지휘를 그만두고 완전히 후방으로 물러났습니다. 사망이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시스템적 한계로 인해 사망했다고 나와있지만, 1888년에 사임하고 1891년에 사망한 사람이 설마 20년이나 일찍 죽지는 않았겠죠.
폰 몰트케의 후임으로 1군단을 지휘할 인물은 에르빈 폰 스페(가상인물)입니다. 폰 몰트케의 빈 자리가 안타까워질 따름인 능력치로군요.
첫댓글 오헝제국까지 스피어로 들어갔는데, 대독일 하는데 필요한 조건이 더 있나요? 저대로 두면 다시 열강 들어갈 것 같은데 ㄷㄷ
혁명 & 반혁명 연구하고 알자스-로렌만 먹으면 끝납니다. 늦어도 4~5년 안에는 독일제국으로 최종진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