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년 1월의 시인은 최승호입니다
[약 력]
1954년 강원도 춘천 출생. 춘천교대 졸업. 1977년 ‘현대 시학’으로 등단.
김수영문학상(1985), 이산문학상(1990), 대산문학상(2000), 미당문학상(2003) 수상
시집 ‘대설주의보’ ‘세속도시의 즐거움’ ‘그로테스크’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낯설음을 더국 낯설게]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표지에 새겨진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온다'라는 최승호의 명제는 '나와 세계는 동시에 변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세상의 모든 질문들이 그렇듯이 이 질문들은 이미 대답이다. 최승호는 살 만한 세상의 이미지를 언뜻 단 한번 흐릿하게 그려놓는다.
1. 시, 병 속에 띄운 소식
아우슈비츠에서 간신이 살아남은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은, 시를 <병 속에 띄운 소식>이라고 쓴다. 대상의 미세한 부분을 말하면서 대상의 본질적 국면을 관통하는 것이, 비유적 언어의 힘이다. 나는 첼란의 그 비유적 명제에 다음과 같은 명제를 더한다.
시는, 난파된 삶 가운데 진정한 전언傳言을 꿈꾸는 절망적인 용기다. 시는, 억압 없는 대화가 불가능한 시대의 부적이다. 시는, 말할 수 없음의 현실을 뛰어 넘어 말할 수 있음의 현실로 나아가려는 노력이다. 시는, 소통될 수 없는 상태를 뚫고 지나가는 언어적 섬광이다. 시는, 대화 불가능성을 통해 진정한 대화의 공간을 꿈꾸는, 역설의 존재방식이다. 그리고 시에 대한 모든 규정은 시가 아니다.
최승호는,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대설주의보'를 83년 세상의 먼지 속에 던져 넣은 이후,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인 '고슴도치의 마을'(1985), '진흙소를 타고'(1987), '세속도시의 즐거움'(1990)을 계속 상재했다. 그의 문단 입성은 1977년 <현대시학>을 통해서이지만, 이제까지의 그의 시작 활동의 대부분은 80년대라는 시간의 고통스런 무게와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80년대라는 들끓는 연대기에 대한 고려 없이 최승호 시의 숨은 의미 연관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이 글은 한편으로는 최승호 시의 내재된 의미구조와 그 변모 양상에 대해 뜯어 있고, 한편으로는 시와 그 사회의 컨텍스트와의 내밀한 관계에 대해 겹쳐 읽으려는 비평적 전략 위에 서 있다.
2. 그리고 낯설음을 더욱 낯설게
최승호의 첫 시집인 <대설주의보>는, 최승호 시학의 기본적인 방법론을 충실하게 구현하고 있는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드러난 시인의 즉물적 상상력은, 한국 현대시사에서 보기 어려운 예리한 묘사력을 성취한다. 물질세계에 대한 시적 투시는, 언어의 사실성을 고양하고 관념론의 유혹을 거절하도록 해준다. 최승호 시의 광학렌즈는, 풍경의 서정적 환기를 거부하고 그 자체의 물질적인 힘을 형상화 한다.
폭풍우에 휩싸인 채
정전된 밤의 도시
검은 아스팔트, 검은 江
상점마다 촛불이 가물거린다
번개불이 터진다 천둥이 친다
그것은 번갯불로 충전된 푸른 도끼다
때리면 별들이 힘차게 빛난다
때리면 산이 쩌렁쩌렁 운다
때리면 난장이들쯤이야
- <밤의 힘>에서
폭풍우 속에 정전된 도시 풍경에서, 시적 화자는 그 안에 스며 있는 악마적인 힘에 대해 노래한다. 그 힘은 <거신족巨神族의 도끼>로 비유되고, <나>는 <거신족巨神族의 식탁을 위한 한낱 제물祭物>에 불과하다. 정전된 밤의 도시를 때리는 힘은, <얼크러져 꿈틀대는 밤의 힘>이다. 그 힘은 빛과 어둠을 관장하며, 암흑 속에서 엄청난 빛의 위력을 발휘한다.
이 시의 표현 방식에서, 우리는 두 가지 최승호 시의 출발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풍경의 서정적인 재구성을 거부하고 물질세계 자체의 즉물적인 내용을 주목하는 시적 태도이며, 다른 하 나는, 외부세계의 광포한 힘과 왜소하고 무력한 개체와의 선명한 대비라는 관점이다.
이 두 가지 시적 태도는, 최승호 시의 일관된 거점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위 시에서 외부세계의 힘은 자연적인 성격에 가깝기 때문에, 그것은 <싱싱한 힘>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의 시가 도시적 일상의 영역에 접근할수록 외부세계의 힘은 부정적인 것, 인공 적인 것이 되어 간다. 자연의 엄청난 위력 앞에 선 왜소한 개체라는 인식은, 그의 대표작중의 하나인 <대설주의보>에서 빼어난 언어적 풍광을 성취한다.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들,
제설차 한 대 올 리 없는
깊은 백색의 골짜기를 메우며
굵은 눈발은 휘몰아치고,
쬐그만한 숯덩이만한 게 짧은 날개를 파닥이며......
굴뚝새가 눈보라 속으로 날아간다.
길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
외딴 두레마을 길 끊어놓을 듯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밀려드는 눈,
다투어 몰려드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해일 같은 눈보라 속을 날아가는 굴뚝새의 왜소한 모습은, 외부 세계의 엄청난 표호 앞에 선 개체적인 존재의 작디작음을 인식하도록 해준다. 그 작디 작은 개체의 눈에, 자연의 힘은 엄청난 위력을 가진 것이다. 위의 시의 중요한 비유 중의 하나는, <눈보라>와 <계엄령>사이의 언어 연관이다.
<계엄령>이라는 시어는, 그 자체로는 상당히 정치적인 외연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이 시는 자연의 광포한 힘과 인간 권력의 힘을 동시에 보여준다. 자연의 거대한 공간 속의 개체의 왜소함은, 억압적 정치 정황 속의 위축된 개인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전체적인 이 시의 의미구조는 자연의 경이로운 힘에 대한 놀라움과 개체의 왜소함에 대한 자각이라는 문맥에 기울고 있다. 때문에, <백색의 계엄령>은 시적 화자에 의해 완전히 부정적인 의미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외경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관광객들이 잔잔한 호수를 지나갈 때
水夫는 시체를 건지려
호수 밑바닥으로 내려가
호수 밑바닥에 점점 소리 없이 불어나는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버려진 태아의 애벌레와
더러는 고양이와 개도 반죽된
개흙투성이 흙탕물 속에
신발짝, 깨진 플라스틱 통, 비닐조각 따위를 먹고 배때기가
뚱뚱해진 쓰레기들의 엄청난 무덤을
본다 폐수의 毒에 중독 된 채
창자가 곪아가는 우울한 쇠우렁이를
물가에 발상했던 文明이
처리되지 않은 뒷구멍의 온갖 배설물과 함께
곪아가는 증거를
- <물 위에 물 아래>에서
시인의 투시력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관광지의 호수, 그 매끄러운 세계의 표면 아래를 본다. 그 아래엔, 바라보기에 끔찍한 더럽고 부패하고 구역질나는 문명의 온갖 배설물들이 쌓여 있다. 그 배설물들은, 세계의 깨끗한 표면을 위해 버려지고, 망가지고, 죽임당한 것들이다.
그것이 <물가에 발생했던 문명>의 속 모습이다. 그 속의 쓰레기들의 무덤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명의 화려하고 매끈한 외관만을 보는 것이 범용한 세계 이해라면, 그 쾌적함 뒤의 추악함을 투시하는 것은 시적 인식의 힘이다. 김우창은 최승호의 첫 시집의 해설에 <관찰과 시>라는 표제를 달아 주었지만, 실제로 시집 <대설주의보>는 시적 관찰력의 한 모범을 보여주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최승호 시의 단단한 묘사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 <대설주의보>는 그러한 광학렌즈를 통한 관찰력이 나아갈 수 있는 일정한 한계를 부각시켜 주기도 한다.
증오와 증오의 투석이다
거리엔 집단적인 돌들이 깔려 있었다
투구와 방패가 번쩍이고
노동의 기쁨 모르는
어두운 손들이 돌을 쥐던 한낮
먹구름과 먹구름의 충돌이다
서로 으르릉 거리고 찢어지고
노동의 기쁨 모르는
어두운 손들이
파괴하고 방화하던 광산의 밤
결국 범죄와 도주와 눈물을
거느린 밤이 오고
케이블이 다시 돌기 시작하고
돌들만이 고요한 광산촌
거리엔 石器時代의 어둠이 깔려 있었다
- <사북, 1980년 4월>
드물게 사회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이 시는, 최승호의 자전적 경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시인은 시집 <진흙소를 타고>의 자서에서 위 시의 정황이 그의 시세계에서 얼마만한 추억의 무게를 갖는 것인가를 적어 놓았다. 자서를 쫓아 읽으면, 사북에서의 경험은 시인의 시 쓰기의 절실한 동기를 이룬다.
그 충격적인 경험을, 시인은 한 편의 시 속에 너무도 건조하게 옮겨 놓는다. 위의 시에서 시적 자아의 시선은, 철저히 관찰자의 그것이다. 관찰자의 관점은, 사실 최승호의 사실성과 이미지의 풍요로움을 보장하는 중요한 시적 방법론이다. 그것은 자연이나 문명의 숨은 모습을 그려낼 때, 특히 그렇다. 하지만, 명백한 역사적 역동성을 가진 사회적 사건을 다룰 때, 관찰자적 시선의 예외 없는 적용은 그 사건의 현실성을 완벽하게 성취하지 못한다.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중립적인 관점의 부정적인 역할이 아니라, 무섭도록 냉정한 관찰자적 관 점이 경험 세계의 인간적 내용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최승호의 위의 시는, 체험의 절박성에 맞먹는 어법의 역동성이 없이 너무도 단정하고 건조하게 체험 속의 풍경을 소묘하고 있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시집 <대설주의보>에 나타난 즉물적 상상력과 날카로운 관찰력은, 그 관찰의 대상인 세계의 부정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인식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대설주의보>는, 관찰자적 성실함이 분석 가능했던 영역과 그렇지 못했던 영역과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가 세계의 부정성에 대한 심화된 인식으로 나아가는 것은,
나는 모든 노동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 <수리공>에서
라고 노래할 때부터이다.
3. 굴비, 나의 적, 나의 반역, 나의 비굴
<고슴도치 마을>에서 최승호 시의 투시법은, 현대 도시문명의 추악한 속 모습을 겨냥하고 있다. 도시적 삶의 과시적 풍요의 배면에는, 부패한 쓰레기 더미와 찌그러진 개체의 삶이 있다. <고슴도치의 마을> 에서의 도시적 삶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보다 더 심화되고 명료한 방식으로 개진되고 있다.
바퀴 달린 기계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다
작은 차들이 큰 차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 아스팔트다
인간이 쥐처럼 벌벌 떤다
불어나고 우글쩍거리고
충돌하며 인간의 피를 파먹는 기계들
- <붕붕거리는 풍경>에서
깹榴遊돈만 넣으면 된다
그러면 賣淫의 자동판매기가
한 컵의 사카린 같은 쾌락을 주고
十字架를 세운 자동판매기는
神의 오렌지 쥬스를 줄 것인가
- <자동판매기>에서
자본주의적 삶의 중요한 소품 중의 하나인 자동차는, 위의 시에서 멈출 줄 모르는 맹목의 욕망의 상징이다. 자본주의적 질서 속의 도시적 삶의 뒤틀린 욕망은, 자신도 통어할 수 없는 엄청난 가속력을 가진다. 그 속도는, 개인에게 공포와 불안을 가중시키지만, 그것은 결국 <고철을 향하여 질주하는 욕망의 바퀴>의 속도일 뿐이다.
그것들의 질주와 금속성의 소음은, 그 처참한 고철로서의 종말에 대한 언표인 것이다. 두 번째 시에서 <자동판매기>라는 도시적 일상의 소도구는, 자본주의 경제구조의 타락한 소유관계에 대한 함축된 상징이다. <돈만 넣으면> 성性이든 신神이든 살 수 있는 돈의 왕국에 대한 풍자적 관점이 드러난다.
음료를 파는 자동판매기를 매개로, 성과 종교마저 자본의 권능하에 지배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계적 식생활의 이미지가 성적인 착취로 다시, 종교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의미 연관은, 우리시대에 있어서의 돈의 권능과 뒤틀린 소비관계에 대한 총체적인 현식 파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때로 최승호의 도시적 삶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그때 푸른 잔디 아름다운 숲 속에선
평화롭게 골프치는 사람들
그들은 골프공을 움직이는 힘으로도
거뜬하게 산을 옮기고
해안선을 움직여 지도를 바꾸어 놓는다
산골짜기 마을을 한꺼번에 인공호수로 덮어 버리는
그들을 뭐라고 불러야 좋을까
누군가의 작은 실수로
엄청난 초능력을 얻게 된 그들을
- <부르도자 부르조아>에서
위와 같은 보다 명료하고 풍자적인 방식으로 계급모순을 겨냥하기도 한다. <부르도자>와 <부르조아>는, 음성적 유사성과 <맹목의 힘>이라는 의미연관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국사회의 총체적 모순의 기본적인 국면을 이룬다고 판단되는 이러한 계급모순에 대한 시적 재구성은 분명히 중요한 작업이며, 최근에는 그러한 사회모순이 고리에만 집중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시들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최승호 시의 촉수가 향하는 것은 계급모순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욕망의 맹목성과 잔혹성 그리고 그 욕망이 건설한 부패의 문명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승호의 관점은, 보다 보편적인 것일 수 있다. 그 보편적인 관점에서, 그는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의 유기적 관계의 훼손과 그 일그러진 삶, <굴러지는 생生>의 처참한 상태를 다음과 같은 언어로 옮겨 놓는다.
굴비, 나의 敵, 나의 反逆, 나의 비굴
비굴한 삶은 통째로
굴비를 닮아간다
그물을 뒤집어쓰고 퍼덕이다가
결국 장님에 벙어리
귀머거리가 된 굴비를
나는 왜 두려운 존재라고 말해야 하나
- <무서운 굴비>에서
놀라울 것 없는 이 평범한 삶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빈 새장 같은 죽음의 얼굴은
이빨에 앵무새 깃털을 문 채
웃고 있는데
-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에서
내용을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과 무력감은, 공동체적 유대감의 상실과 개체의 자기동일성의 상실이라는 산업사회의 실존적 정황의 산물이다 <무서운 굴비>는 <소금에 절어 통째로 말려진> 굴비의 참혹하고 무기력한 몰골에서 굴비를 닮은 <나>의 비굴과 두려움을 본다. 그 두려움은, 생명력이 고갈된 삶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데서 오는 두려움이다.
<새장 같은 얼굴을 향하여>의 음험한 이미지는, 죽음같이 <시큰둥>하고 <따분한> 삶, 보람 없이 <밥 먹기 위해> 사는 나날에 대한 단말마적 절규를 담고 있다. 괴기하고 충격적인 시적 이미지는, 측량할 수 없는 절망감을 예리하게 묘파해 낸다. 이런 표현력은 80년대 전반에 걸쳐 이성복, 최승자, 기형도 등 몇 안되는 시인들이 보여 주는 그로테스크한 시적 리얼리 티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인간 내면의 불행에 대한 절망적인 인식이 집단적 삶의 공간에까지 확산되는 것은,
자라나는 빌딩들의
네모난 유리 속에 갇혀
네모나는 인간의 네모난 사고 방식, 그들은
네모난 관 속에 누워서야 비로소
네모를 이해하리라
- 우리들은 네모 속에 던져깆?주사위였지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 <네모를 향하여>에서
우리들은 고슴도치의 마을에서
온몸에 가시바늘을 키운다
평화로운 사람은 문을 걸고
잠 속에서도 곰에게 쫓길 것이다
- <마을>에서
와 같은 시에서이다. <네모를 향하여>에서 도시적 삶의 공간은, <네모>로 형상화된다. 원형상징의 측면에서, 이상적인 도시 공동체는 원형의 형상을 갖는다. 원형적인 생활공간은 공동체적 연대감과 유기적인 조화와 여성적인 생명력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원형도시는 충만한 완전성의 모습이다. 반면, 네모난 도시의 이미지는, 세속화되고 규격화된 연관을 얻는다. 그것은 모태적인 성격을 상실한 척박한 장소이다. 이 네모난 공간 속에서는, 사람들의 의식조차 네모나게 된다.
도시 공간 속의 삶은, 네모에서 태어나 네모 속에서 살아가고 <네모난 관> 속에 눕는 과정이다. 그러한 삶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 던져진> 삶이다. <마을>의 정황은, 도시적인 것이 아니라, 조용하고 평화로운 산골마을, 그러나 그곳에서도 예기치 못한 불행과 막연한 공포가 있다. 그 곳도 <평화로운 사람>이 평화롭게 살 만한 곳은 못된다. 그것은 두려움과 불안이 단순히 도시공간이라는 정황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실존의 조건이라는 문맥을 구성한다. 그러한 세계인식이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보다 깊게 탐구하기 시작할 때, 다음과 같은 잠언적 언어를 성취한다.
내가 나무말 열 두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이 삶이라면
나무말 열 두 마리가 나를 끌고 가는 것은 죽음이다.
- <낮과 밤의 발걸음>
4. 번데기 통조림 속의 나비떼
죽음에 관한 시인의 점증하는 관심은, <진흙소를 타고>에서 보다 풍부한 시적 진술을 얻는다. 최승호에 의하면, 죽음은 <무인칭>의 성격을 갖는다. 개체적 진실을 담보한 삶의 완성이라는 의미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육체적 부패와 소멸이라는 의미에서의, <쇠고기 한 근의 죽음>인 것이다.
그러나 치욕적인 詩 한 편 안 쓰고 깨끗이 갔다.
세발자전거 한 번 못 타고
피라미 한 마리 안 죽이고 갔다.
단 석 줄의 묘비명으로 그 핏덩어리를 기념하자
거기에서 떨어져
변기통에서 울다가
거기에 잠들었다.
- <무인칭의 죽음>에서
모자를 쓰고 우산을 든
궁둥이가 큰 바지 입은 사람의 뒷모습을
밑에서 쳐다보거나
고개 돌려 저 밑계단의 태아들을 굽어보거나
우리가 죽음에 인도되는 건 공짜이다.
서두를 게 하나 없다 저승열차는
늦는 법이 없다, 막차가 없다.
- <에스컬레이터>에서
<무인칭의 죽음>에 나오는 죽음은, 갓 태어난 유아의 죽음이다. <미혼모>에 의해 태어나고, 그녀에 의해 죽음을 당한 그 태아의 죽음은, 세상에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못한 허무한 죽음이다. 그 죽음은, 단 석 줄에 요약될 수 있는 <무인칭의 죽음>인 것이다. 하지만, 그 유아의 죽음은 예외적인 죽음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의 죽음이 함축된 죽음이다. 세상에 어떠한 흔적을 남기든 우리는 결국 <무인칭의 죽음>을 향해 나아갈 뿐이 다.
우리들의 삶도, 그 다채로운 생활의 무늬도, 사실 단 석 줄에 요약될 수 있는 것이다. 유아의 죽음은, 그리하여 우리의 죽음을 함축해 놓은 상징적인 죽음이 된다. 그 <무인칭의 죽음>을 향해 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탄다. 댓가를 치루지 않아도 죽음은 필연적으로, 무시로, 온다. 그것은 예외가 없으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란, 그러한 죽음을 향해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위의 과정에 불과하다. <에스컬레이터>는 일방적인 방향만을 가지므로 결코 다른 목적지에 도달하거나 다른 길로의 변경이 허용되지 않는다. 그 길은 벗어날 수 없는 길이다.
낙태의 올챙이들이
쓰레기통에 머리를 쳐박고
공동묘지를 미는 부르도자에
허옇게 드러나는 턱뼈들이
여기에 셋, 저기에 넷,
신에게서
신이라는 이름딱지를
떼어버리고, 보라.
- <무인칭 시대>에서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아내는 설거지통 속잗0d琉㈄湧삯 ]씻고 있고
남편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신문을 방바닥에 펼쳐놓고
숨은그림 찿기를 하고 있다. 국어책을 큰 목소리로 읽는
아들의 발성연습, 딸애의 가계부 정리, 산수를 잘 해야지,
텔레비젼 뉴스 시간에 복권당첨 번호를 보도한다.
발효하는 시체의 냄새 속에서 이렇게
모범 가정이 무덤 속의 여러 개의 관처럼 많을 줄이야.
- <무인칭 대 무인칭>에서
죽음은 단순히 삶의 종결 이후의 문제가 아니다. 최승호의 시에서 문제되는 것은 내세가 아니라 이미 죽음과도 같은 현세이다. 삶 속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그 본원적인 의미에서 삶은 이제 삶이 아니다. 공동묘지에서 허옇게 모습을 드러낸 수많은 태아들의 뼈는, 이미 윤리나 신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는 황폐한 세계의 디테일이다. 그 태아들의 뼈를 신의 이름으로 똑바로 볼 수는 없다.
그 뼈들은 신이 이 척박한 세계를 떠났다는 가장 확실한 증명이다. 그 세계는 <신이라는 이름딱지>를 떼어버리는 세계이다. <무인칭대 무인칭>은, 우리들의 안락한 <모범가정>안의 삶이, 사실, <무덤 속의 무인칭>들의 삶이라는 끔직한 진실을 묘파한다. 안락한 나날의 삶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패하고 있다. 세계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다는 명제가 최승호 삶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다. 삶은 이미 생장력을 고갈하고 있는 것이다. 삶에 있어서의 부패의 힘은,
뚱뚱한 쥐눈에는 뚱뚱한 쥐의 행복만 보이니까
싸워서라도 뚱뚱해져야 한다고 뚱뚱한 쥐들이
서로 잡아먹으며 뚱뚱해지고 놀라웁게 뚱뚱해지고
이만하면 투실투실한 게 남 보기에도 뚱뚱한데
또 뚱뚱해져야겠다고 잡아먹고 잡아먹어서 얼씨구
이러다간 큰 쥐 한 마리 내지 뚱뚱한 쥐가족만 남겠네
- <부패의 힘>에서
자본주의적 질서 속에서의 맹목의 물질적 식욕과 연관되어 있다. 사람들은 가시적인 포만감을 행복의 측도로 삼는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섭취할 수록 행복은 는다고 믿는다.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먹고 먹히는 행위를 지속하는 쥐들의 세계는, 맹목의 욕망에 들떠 있는 현세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그 맹목의 욕망을 북돋우는 것은, 부패의 권능이다. 그 욕망의 먹이사슬의 끝은, 자본의 집중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와 닮아있다. 최승호는 죽음이라는 인식의 창을 통해 욕망의 구조를 탐구한다. 그래서 그가
조서 없는 그대를 위해 타자기 앞에서 나는 조서를 쓴다
누구를 위한 조서인지를 모르는 체, 나만 그대의 죽음이
우리가 훔쳐 읽어야 할 暗號이며, 그대 세계 전부의 죽음인 것을
- <調書>에서
이라고 노래했을 때, 죽음에 관한 <조서>를 쓰는 행위는, 시를 쓰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삶의 공간 속의 개별적 죽음의 세목은, <우리가 훔쳐 읽어야 할 암호>이며, 그 암호는 <세계 전부의 죽음>을 집약하고 있는 암호라고 할 수 있다. 낱낱의 죽음의 이미지는, 세계 전체가 이미 죽음의 법칙 안에 있으며, 그 속에서 부패하고 있다는 인식의 시적 표현이다.
그러한 세계인식에서 보면, 삶은 뿌리도 없고 축적되지도 않는 <자루의 삶>과 같은 것이다. <자루> 연작은 그러한 인식태도의 시적 결정이다.
자루의 밑이 터지면서 쓰레기들이 흩어진다, 시원하다.
홀가분한 자루, 퀴퀴하게 쌓아서 썩던 것들이
묵은 것들이 저렇게 잡다하게 많았다니 믿기 어렵다.
위에서도 큰 구멍, 밑에서도 큰 구멍, 허공이 내 안에
있었구나, 껍데기를 던지면 바로 내가 큰 허공이지.
- <세번째 자루>
삶은, 끊임없이 욕망을 섭취하지만 밑이 터져 그 쓰레기들이 흩어져 버리는 <자루>와 같은 것이다. 그 <자루>는 물질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섭취 욕구에도 불구하고 허공처럼 비어 있다. 그 <자루>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순간, 그것은 허공과 한몸이다. 육체는 물질을 섭취하고 축적하려는 욕망의 틀이다. 그 틀을 벗어버리면, 우리는 자연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인 무無로 되돌아 간다. 그 무無는 물질에 대한 끊임없는 탐욕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 안에 있다.
최승호의 시에서 갇혀 있는, 부패하는 생명은, <통조림>의 이미지로 형상화 된다. 밀봉된 상태 속의 썩어가는 존재로서, 삶은 조건지워져 있다. 그 밀봉된 삶, 박제된 삶에는, 초월적 차원이 소멸되어 있다. 하지만, 가끔은, 초월에 대한 버릴 수 없는 꿈을 통해 갇힌 현재적 정황에 대한 치명적인 항거를 표시한다.
번데기 한 마리가 변신 중에 변시체가 되면
번데기 세 마리가 변신 중에 변시체가 되면
번데기 한 가마니가 변신 중에 변시체가 되는
이러한 법칙을 사람들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羽化의 길 위에서 통째로 삶아져
나체로, 침묵으로, 움츠린 몸뚱이로
항거하는 번데기통조림 속의 나비떼, 나비떼!
- <나비떼>
5. 문명엔 너의 죽음이 필요하다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이르면, 최승호 시는 도시문명 전반에 대한 보다 명료하고 심화된 비판적 인식을 보여 준다. 도시적 일상의 세부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그 욕망의 구조에 대한 심원한 탐구는, 부패한 문명의 종언에 대한 예언적 인식에 육박하고 있다.
내 안에서 부패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나는 손을 들어 파리를 쫓았다
그 동작이 늪수렁에 빠져 살려고 바둥거리는
허우적거림으로 비쳤을지 모르겠다 죽음에 둘러싸여
무력했지만 파리를 쫓을 힘은 있었다
빌딩을 오르내리는 날개 없는 요일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었다
올라가도 거대한 수렁 속에 빠져드는 듯
함몰과 큰 추락에 대한 공포에 나는 떨고 있었다
- <엘리베이터 속의 파리>에서
삐걱이는 의자에 앉아
꺼져가는 사람은
머리를 뒤로 젖혀 한숨을 쉰다
토막난 탯줄 삼킨 밤의
어둠이 흘러드는 입술
그토록 빈말을 거품처럼 늘여놓은 입과
부글대던 귀 사이의
뻑뻑해진 근육을 잡아당기며
소리친다
아 안돼, 이렇게 꺼져갈 순 없어!
- <의자의 수렁>에서
발표 당시보다 상당히 가필뒨 위의 두 편의 시는, 자본주의적 문명의 이기이며 그 권력과 욕망의 상징인 엘리베이터와 의자에 관한 것이다. 엘리베이터는 수직적 상승과 삶의 진화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며, 의자는 권력과 안락에 대한 욕구의 상징물이다. 시적 화자는 이 두 명의 상징물이 띠고 있는 상태를 <빠져든다><꺼져간다>고 묘사한다. 수직적 상승을 향한 맹목의 욕망에도 불과하고, 결국 함몰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심이 생기는 것은, 그 수직적 상승의 욕망이 세계와의 생산적 관계의 기초 위에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소모적인 관계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내용을 채우지 못한 욕망이기 때문에, 그 욕망은 헛되고, 무모하고, 맹목적인 것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산업사회의 인간 내면의 불행은 여기에 연유한다. 도시적 일상 속의 생활의 방향성과 생체리듬은, 표면적으로 경쾌하고 안락한 지향을 갖는 것이지만, 그 실존의 밑바닥에 드리워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와 불안감은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움푹해라 내 욕망은
밥숟갈을 닮았다
천만 개의 숟가락이 한 냄비에 덤비듯
꿀꿀거리고 덜그덕대는 서울에서
나도 움푹한 욕망 들고 뛰어가고
보름달 뜨면 먹고 싶어라
둥근 젖
움켜쥘 그 때부터 나는 아귀였던가
- <밥숟갈을 닮았다>에서
최승호의 시에서 모든 욕망의 중심은 식욕이다. 그 맹목의 식욕은, 산업사회의 개인의 온갖 물질적 욕구를 집약하고 있다. 그래서 욕망은 <밥숟갈>을 닮은 것이다. 그 들끓는 욕망의 각축장인 서울은 <천만 개의 밥숟갈>이 덜거덕거리는 <냄비>로 표현된다. 생활의 공간은, 생존을 위한 건강한 노동의 터전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약탈의 장소이며, 폭력적인 경쟁의 장소이다. 타자는, 그 속에서 나를 확인하는 나의 거울이 아니라, 쓰러뜨려야 할 경쟁 대상이다.
그 욕망의 구조 안에서 보름달은 더 이상 - 재래적인 서정시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 환정적喚情的 계기가 아니라, 욕망의 촉매일 뿐이다. 어머니의 둥근 젖은, 악마적인 식욕의 대상일 뿐이며, 그 모성의 경건성을 이미 상실하고 있다. 그 욕망의 방향은, 둥글다는 이미지를 고리로, 밥숟갈 - 냄비 - 보름달 - 둥근 젖의 이미지 연쇄를 얻는다. 그러한 이미지의 연쇄는 가령, 다음과 같은 시에서 풍부한 표현을 얻는다.
운전사는 왕, 뽕짝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달린다, 폭군처럼 달려간다.
브레이크를 느닷없이, 계엄령처럼 다급하게 밟을 때마다
거꾸로 내리박히고 나뒹굴고 엎어져 지지 않으려고, 무수한 나는, 무
수한 중심을, 무수한 손잡이를 잡아야 했다. 선 채로 흔들리는 客들이, 의
자에 나란히 앉아 조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다음은 고목나무 앞입니다' 그 다음은 망우리묘지 종점입니다, 라고
스피커가 앵무새 소리로, 늙음 뒤 뼈의 길과 忘憂의 길을 종알거리지는 않
았지만 나는 벌써 긴 세월을 새우처럼 갇힌 채 호송돼 온 느낌이었다.
그러자 새우깡 광고판이 붙은 버스가, 황혼에 물든 큰 거품 속으로, 속
력을 내며 굴러가는 것이었다.
- <광고판이 붙은 버스>
도시적 이미지들의 연상작용과 속도감 있는 리듬 감각은, 일상적 경험에 대한 사실성에 접근하고 있다. 광고판이 붙은 버스의 운전수는 <폭군>처럼 달린다. 그 <폭군>의 이미지와 <느닷없는> 브레이크의 이미지는, <게엄령>을 연상시킨다. 다시, 버스 속의 흔들리는 나는 <무수한 나>가 되고, <무수한 나>는 <흔들리는 客>들의 일부이다. 스피커에서 <망우리 묘지>라는 안내가 나올 때, 그것은 <忘憂의 길>의 의미연관을 얻는다. <새우처럼> 내가 긴 세월을 호송되어 왔다는 느낌은, <새우깡 광고> 이미지와 겹쳐진다.
광고는 개인에게 거짓 욕망을 불어넣는 산업사회의 압도적인 충동 양식이다. 그것은, 본디 욕망을 왜곡시키는 방향으로 규정력을 발휘한다는 맥락에서, 소외의 양식이다. 그 소외의 양식이 도시적 삶의 일그러진 경험의 표본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다. 도시적 경험의 세부에 대한 이러한 사실적인 묘사가, 그 묘사의 일차원성에 머물지 않고 그 문명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 나아가는 것은,
문명엔 너의 죽음이 필요하다
네 뼈가
공업용 쇠뼈로 부서지고
네 육신이 포장육으로 나눠질 때
가죽공장 노동자들은 네 가죽에
무두질과 염색을 시작한다
가죽들의 무덤, 쇼윈도우에 나타나는
물소
- <물소 가죽가방>에서
와 같은 시에서이다. 문명의 현시적 풍요의 기적에는, 수많은 무고한 죽음이 있다. 문명은 안락하고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지만, 그 외관은 무수한 죽음을 통해 이룩된 외관이다. <쇠뿔 달린 힘센 문명>의 괴력은, 그 구조적인 폭력성으로 시체의 문화를 양산하다. 그것은 생명의 구조와는 반대로 죽임의 구조를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노동이 된다. 그 노동은 죽임의 노동인 것이다. 문명은, 더할 나위 없이 잔혹하고 짐승스럽다.
위기의 시기였다
마루골이 삐걱이는 복도
어둑한 곳에서
뿔쥐들이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였다
나를 혼란시키는 뿔쥐들,
(......)
비현실적이기에 너무 생생했던 사건들
쿠데타,계엄령, 체포, 처형
흘러가며 줄어드는 몽유병자들의 무리를
새로운 몽유병자들이 흘러들어 대신했다
- <뿔쥐>에서
최승호의 시에서 <뿔>은 문명의 폭력성의 상징이다. 최승호에 의해 문명의 배면은, <뿔쥐>가 우글거리는 음습한 세계로 그려진다. 그 <뿔쥐>는 <혼란>과 <위기>의 상황을 조장한다. 그 위기감과 공포는 너무도 일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절망적이다. 그 위기의 일상성은, 우리의 의식을 몽유병 환자의 상태로 만든다. 최승호에게 있어 <꿈>은 초월적 계기와 맺어져 있지 않다. <꿈>은 몽롱하고 도착된 정신의 상태일 뿐이며, 대개 그 꿈은, <천연색 악몽>이다. 우리들은 그 악몽에 갇혀 있다. 그 <갇힘>의 셰계인식의 극단은 이렇다.
변기의 뚜껑을 덮으면
귀뚜라미의 절망은 완성된다.
둥근 벽을 덮치는 둥근 뚜껑,
나는 귀뚜라미를 건지지 않았다
움푹한 자궁과 움푹한 무덤이
아가리를 꽉 맞추고
한 덩어리
둥글네모난 감옥을 이룬
뭐랄까,
임신에서 매장까지의 길들이
둥근 벽 안에서 미끄러지고 뒤집히는
거대한 변기의 감옥 속에서 죽어가는
나를 건져 줄 그 어떤 손도 나는 거부했기에.
- <변기>에서
변기에 빠진 귀뚜라미라는 상황은, 거대한 욕망의 배수로에서 허우적거리는 개체의 모습의 비유적 상황이다. <변기>는 자본주의적 문명의 일상적 소품이다. 그 일상의 이미지는, 감옥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변기>는 또한 원형의 윤곽을 갖고 있다. 우리들의 심층 무의식 속에서 원형은, 자궁과 천체가 그렇듯이 풍요로운 생명의 완전성을 표현하고 있다. 놀랍게도 최승호는, 그 원형에서 감옥과 죽음의 내포를 읽는다.
<움푹한 자궁>은 <움푹한 무덤>과 빈틈없이 <아가리를 꽉 맞추고> 있다. <임신에서 매장까지의 길들>은 <변기>라는 죽음의 구멍 안에서 행해진다. 아무도 그 구멍의 <반대편으로 노젓는 일이란 없다>. 언제라도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 있는 구멍의 깊이는, 죽음의 깊이이면서 문명의 악마적 깊이다. 그 깊이는 기형적으로 비대해진 산업사회의 악마적 규정력의 깊이다. 자본주의의 소모적인 생산성과 그 끔찍한 재생력과 포용력의 테크닉은, 다시, 다음과 같은 곤충의 이미지로 형상화 된다.
너는 조물주를 흉내낸다
너는 게워낸다 세계를
펼치고 그 위에 걸어간다
망가진 세계를 너는 기울 줄도 알지
다 낡아버린 세계는
우적우적 먹어버리지
제가 친 그물에는 절대로 걸리지 않는
자유자재한 왕
걸려 있는 것은 찐득한 인간들이다
엉겨붙어 신음하며 허우적거리는
불쌍한 인간들을 보며
반야왕거미는 말한다
세계를 붙지만 말고 세계를 타라
이것이 비밀이다
- <반야왕거미>
위의 시는 최승호의 곤충 이미지 중 가장 밀도 있는 비유체계를 성취한 것으로 보인다. 거미의 어두운 생존방식은, 피와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 거미의 생존방식은 세계를 빨아먹고 세계를 게워내는 악마적인 기교의 표본이다. 그 악마적인 힘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인간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질서체계의 광범위한 규정력 안에서 <굴려지는 생>을 살고 있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다.
6. 의심하면 사라지는 마음의 나라
네 권의 최승호에 대한 우리의 텍스트 여행은 끝났다. 최승호 시의 방법론은, 낯선 세계를 더욱 낯설게 하는 지각의 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지각의 쇄신은, 대상에 대한 관념적인 이해로서가 아니라, 시각적 특수화의 방식을 통해 성취된다. 시각적 특수화는, 사물의 낯설음을 생성하고, 간단 없이 그 긴장을 지속시킨다.
그것은, 사물의 내재된 꿈틀거림을 포착하는 즉물적 상상력의 성격을 갖는다. 시각 언어의 원근법을 통해 재구성된 세계는, 놀라움의 광채를 발산하는 것이다. 즉물적 상상력은 세계의 외관을 꿰뚫는 시적 투시력이다. 그 투시력은, 재래적인 서정시의 일반 문법
환정적 진술을 거부하고, 현실의 참혹함을 정직하게 바라보도록 만든다. 최승호의 즉물적 상상력이 처음으로 조명한 것은, 대자연의 신비적인 힘과 그 안에 머물고 있는 왜소한 인간 개체이다. 상황의 폭력과 개체의 무력감의 대비는, 최승호 시가 일관되게 품고 있는 문제틀이다.
그 문제틀은 거대한 자연 세계의 힘에 대한 관찰에 머물지 않고, 자본주의적 문명 전체 에 대한 조망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거대한 물질문명의 구조적 폭력과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는 개체의 대비로 변용된다. 외부세계의 일상적 세부에 대한 적확한 관찰력이 문명적 기반 전체에 비판적 통찰로 확대되는, 시적 갱신을 이룩하는 것이다.
최승호 시에서 희망의 언어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희망의 언어에 대한 철저한 거부는, 희망의 언어를 허위의 언어나 위선의 언어로 만들어버리는 이 세계에 대한 준열한 반성이다. 왜냐하면, 섣부른 희망의 언어는 현실을 교묘하게 합리화시키는 긍정의 언어이므로, 최승호의 시는, 참된 의미에서의 희망의 언어가 소통될 수 없는 현실의 소산이다.
최승호 시의 일관된 주제의 하나는 <죽음>이다. 최승호의 죽음은 삶의 완결성의 계기로서의 죽음, 신비성과 초월성과 경건성을 간직한 죽음이 아니다. 그 죽음은 <쇠고기 한 근의 죽음><무인칭의 죽음>이다. 죽음은 부패한 문명의 종언에 대한, 소모적인 욕망의 궁극적인 귀결에 대한, 예언적 인식으로서의 죽음이다. 죽음은, 산업사회의 욕망의 구조에 대한 비판과 풍자의 시적무기이다. 죽음에 대한 잠언적 통찰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적 전략에 수렴된다.
최승호에 의하면 이 문명은 거대한 구멍과 같다. 그것은 모든 개체를 빨아들이는 악마적인 흡인력을 가졌다. 그 구멍의 깊이는, 이 문명이 뿌리없는 문명이며, 참다운 생산력을 갖지 못한 황폐한 문명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문명은 바닥이 없는 밑빠진 문명이다. 바닥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축적은 불가능하다. 문명의 유일한 생산성은 부패의 생산성이다.
최승호의 시적 통찰의 의미론적 중심은, 우리들의 삶이, 이 문명이, 성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패하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서구적 위기 상황에 대한 과학적 대응인, <엔트로피>의 열의학은, 에너지는 생성 가능하며 세계는 끊임없이 진보한다는 뉴튼적 세계관의 기본적인 전제를 뿌리채 전복시킨다. <엔트로피>의 이론적 핵심은,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즉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혹은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이용할 수 없는 것으로, 또는 질서화된 것으로부터 무질서화된 것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외부로부터 물질적인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닫힌 세계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의 유한성으로 인해, 모든 것은 체계와 가치로부터 혼돈과 황폐를 향해 나아간다. <엔트로피>의 세계관은, 과학과 테크놀로지에 의해 문명이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는 자본주의적 신화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엔트로피>의 법칙이 만고불변의 진리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명의 부단한 진화라는 허위의식을 견제하는 데 상당한 효용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최승호의 세계관은, 이 <엔트로피>의 세계관과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최승호의 시에서 문명의 창조적 진화란 허위에 불과한 것이다. 최승호는 생산성의 향상을 통한 사회의 무한한 발전과 개인적 욕망의 확장이라 이론적 지배이데올로기를 전복 시킨다.
그 전복은, 문명의 외관 뒤의 부패의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가능해 진다. 부패의 생태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방법론은, 세계와 자아를 동시에 부정하는 부정적 사유의 투철성을 보여준다. 삶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맹목의 욕망을 비판하고, 문명의 무한한 진화라는 지배이데올로기의 허위를 뒤집어 버리는 최승호의 관점은, 우선, 중요한 것일 수 있다.
최승호 시에 대한 가능한 비판은, 아마도 루카치적인 의미의 퇴폐 문제와 연관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역사적 전망을 공유하지 못하고,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사회 묘사에 이르지 못하는 표현주의적 기법, 외부세계의 잔혹함에 대한 평면적인 진술, 부르주아 사회의 계급적 기반에 대해 비판하지 않고 현대문명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태도, 인간 내면의 위기감과 공포심에 대한 감정적 표현등이, 퇴폐의 미학적 항목이라면, 최승호의 시가 상당 부분 그러한 혐의를 노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평적 측도란 그것 안에 어떤 억압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면, 이미 닫힌 신념체계의 폭력적 적용일 뿐이다. 나는 최승호의 시가 루카치적인 의미에서의 퇴페 개념에 결코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려 하지는 않는다. 내가 질문하려는 것은 이와는 좀 다른 방향의 것이다. 자본주의적 문명의 부패성과 개인적 욕망의 맹목성에 대한 최승호의 비판적 전언은, 파행적 성장을 이룩한 한국 자본주의의 부정성을 비판하는 데, 적절한 문학적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전언 앞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부려놓고 싶어진다. 산업사회의 모든 욕망은 근원적으로 짐승스러우며, 헛된 것인가? 욕망의 헛됨에 관한 허무주의적 세계인식은, 세계 변혁의 단초를 개인의 주체적 실천에서 찿으려는 모든 뜻깊은 노력들마저 야유하는 것은 아닌가?
자본주의적 질서 안에서 생의 건강한 충동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가? 역사 발전의 주체 세력과 그 미래 전망에 관한 인식의 결핍은, 사회집단의 역사적 참여를 무위로 돌려놓는 것은 아닌가? 살 만한 삶을 위한 싸움은, 절망의 언어로서만 가능한가? 문명의 부정성에 대한 광범위한 부정은, 그 부정성의 물적 토대와 계급적 기반에 대한 집중적인 통찰과 배치되는 것인가?
최승호의 시가 자전적인 추억의 무게를 거의 담고 있지 않다는 사실, 많은 시들이 비슷한 화법과 비슷한 알레고리의 동어반복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 시적화자는 언제나 투명한 관찰자의 입장이라는 사실은, 함부로 말하자면, 그의 시가 언제나 고통의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시집 [고슴도치의 마을] 표지에 새겨진 <나.의. 변.모.는. 곧. 세.계.의. 변.모.를. 가.져.온.다.>라는 최승호의 명제는, <나.와. 세.계.는. 동.시.에. 변.모.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명제와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세상의 모든 질문들이 그런 것처럼, 이 질문들은 이미 대답이다. 최승호는 살 만한 세상의 이미지를 언뜻, 단 한번, 흐릿하게 그려놓는다.
서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만나면 하나가 되는 물의 나라가 멀리서
반짝거린다 그리운 시냇가
의심하면 사라지는 나라, 마음의 나라
- <그리운 시냇가>에서
안타깝게도, 그 <마음의 나라>는 너무나 아득하다 [ 현대 시세계에서 발취 ]
[미당 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그는 자신의 시론을 말하고 있다
"나를 지우면서 詩를 쓰고 싶다"
- 최승호
"(시를 쓰는데 있어)시적 형상화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자신의 고통과 슬픔, 사상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독자들이 향유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적 형상화를 중시하다 보니 좀 건조한 문체를 스타일로 얻게 됐습니다. 한편 시를 쓰면서 제 자신에게 반복해서 던지는 물음은 '무엇이 시를 예술이게 하느냐'는 문제입니다."
3회 미당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시인 최승호(崔勝鎬.49)씨는 수상소감도 묻기 전에 준비된 발언을 꺼냈다. 바둑 아마 3단다운 선수(先手)였다. 최씨는 말 사이사이 충분한 호흡을 두고 리듬감 있게, 그러면서도 나직하게 소감을 밝혔다. 듣고보니 수상소감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시론(詩論)에 가까웠다. 그의 나직한 시론은 시의 생사여탈이 문제가 된 가상의 상황에서 시를 옹호하는 최후 변론 같은 힘이 있었다. 얼렁뚱땅 소감을 바꿔치기한 그의 시론은 미당론으로 이어졌다.
"그런 물음을 던지다 보면 우리는 미당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미당이야말로 말의 음악성, 말의 회화성을 조화시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당의 시를 읽으면서 '이건 시가 아닌데' 하는 의문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조금 생뚱맞게 시작한 수상 인터뷰는 내처 최씨의 시론에 대한 문답으로 치달았다. "미당과 소월의 시는 천년 동안 강물로 흘러가고 백년도 못사는 독자는 그 강을 건너가는 사람일 뿐"이라는 최씨의 말꼬리를 잡아 "당신의 어떤 시가 시의 강물이 되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독자가 건너가야만 시가 강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의 시가 흘러가길 바라지 않습니다. 몇편의 시가 흘러갈 수 있다면 행복한 시인이겠죠"라는, 듣기에 따라서 자신만만한 대답이 돌아왔다.
최씨는 꼬집어 말하지 않았지만 1982년 '오늘의 작가상'을 안긴 대표작 '대설주의보'를 그의 '강물'로 꼽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대설주의보'가 보여준 광활하고 막막한 장면의 감동, 충만한 긴장감은 2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하다. 문학평론가 이광호의 지적대로 시 속에 사용된 '계엄령'이라는 단어는 당시의 정치현실과 관련, 폭력과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외연을 지닌 기표였다.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대설주의보'를 포함한 최씨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1983년)의 세계를 '뛰어난 사실적 관찰과 상상력의 결합, 그것을 통해 새로운 지각과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으로 분석했었다.
최씨는 '대설주의보' 시절부터 자신의 시에 일관된 특징으로 '말의 회화성'을 꼽았다. "말의 회화성, 말의 건축, 말의 조소(彫塑),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갖고 시를 써왔다"는 것이다. 미당 시의 두박자 중 한박자는 갖춘 셈이다. 최씨가 시에서 자주 써왔다고 밝힌 데페이즈망(depaysement.轉置) 기법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 의외의 물건을 갖다 붙여 낯선 충격을 주기위해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사용했던 기법이다. 수상작 '텔레비전'에서도 최씨는 산행길 개울가에 버려진 껍데기만 남은 텔레비전에서 삐딱한 영정을 떠올린다.
"제 자신 말의 음악성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초기에는 불협화음 같은 것을 추구했지만 요즘은 말의 자연스러움, 음악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나만의 시의 음악성을 어떻게 가질 것인가를 열등감 속에 모색하고 공부 중입니다."
그동안 말의 회화성에만 치우쳤다는 반성은 최씨를 자연스럽게 말의 음악성에 대한 추구로 이끌었다. 최씨가 보기에 우리 시단에 대상과 자기 자신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은 많지만 정작 언어 자체에 깊은 관심을 갖는 시인은 드물다. "말의 음악성과 역동성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시인이었던 김수영, 언어예술로서의 시에 충실했던 김종삼.박용래 등"이 그래서 아쉽다.
'말의 회화성에서 음악성으로의 관심 변화'로 최씨의 시력 20여년을 압축할 수는 없다. '대설주의보'와 이번주에 출간된 최신작 시집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 사이에는 '세속도시의 즐거움''회저의 밤''그로테스크'같은 시집들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최씨 스스로는 시와 함께 한 20년을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초기▶'회저의 밤'이후 인간 내면에 관심을 기울였던 시기▶'그로테스크' 무렵부터 시작된 이전 두시기의 종합 등으로 정리했다.
요즘 최씨는 "나를 지우고 싶다. 나를 지우면서 시를 쓰고 싶다. 그랬을때 더 큰 세계가 열린다"는 생각에 골몰해 있다. 감수성이라는 시인의 필터를 깨끗하게 유지하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필터를 깨끗이 하기 위해 최씨는 선사(禪師)들의 어록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이광호/문학평론가)